294화 눌러 주긴 해야겠어
“가민사 직원들도 기뻐했으면 좋겠군요.”
가민.
이번에 미국에서 인수한 기업의 이름이었다.
참고로 가민은 내비게이션을 제조하는 기업이었는데,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기업인데도 무려 2억 달러를 주고 인수하였다.
그만큼 나는 가민의 미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비게이션에 MP3 기능을 넣는다면 흥행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지.’
내비게이션만 팔아도 엄청난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MP3가 추가된다?
천만 대를 넘어, 1억 대 이상의 판매량도 충분히 가능하였다.
매출은 한국 돈으로 조 단위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니 2억 달러에 달하는 인수 자금도 아깝지 않았다.
“물론 기뻐할 겁니다. 한국 기업이라지만, 전 세계가 인정하는 혜성 그룹이지 않습니까? 성과급도 성과급이지만, 혜성 전자의 직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들도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직은 혜성을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하, 그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선진국 국민이라면 휴대폰과 컴퓨터, MP3를 무조건 사용하는데, 세 개 다 우리 혜성이 업계 1위입니다. 선진국에서만큼은 혜성을 모르는 나라가 없을 겁니다. 아, 물론 TV나 세탁기, 청소기 등도 포함하면 더 그럴 것이고 말입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혜성 그룹 임직원이라면 아마 모두가 진봉현 비서실장처럼 생각할 것이다.
세계가 혜성을 주목하고 있다고.
이제 혜성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처럼만 성장한다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
반도체 업계에서 1등을 하는 것은, 기업들이라면 모를까, 일반 사람들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휴대폰은?
청소기나 TV는 어떨까.
본인이 직접 구매하는 전자기기니, 브랜드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혜성이란 브랜드가 적어도 전자 업계에선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업계 종사자뿐만이 아니라, 일반 소비자들도 혜성이란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전의 필립스 명성은 이미 한참 전에 추월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소니도 더는 혜성의 위에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매출이나 규모뿐만이 아니라, 인지도조차 소니를 넘어선 상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다고 하니, 너무 그렇게 장밋빛 미래만 해서 좋을 것은 없을 겁니다.”
혜성 그룹이라고 언제까지 성장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도 성장 동력을 잃고 조금씩 적자가 나는 계열사가 생기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자리를 지키시는 한, 혜성 그룹에 희망찬 내일만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봉현 비서실장의 말대로 됐으면 나야 좋은 일이지만, 과연 어떨지 모르겠다.
미래라는 것은 나도 이제 알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으니까.
* * *
(지금이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지?)
창밖의 마천루를 바라보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사의 목소리였다.
“예, 신문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GDP 1만 달러 돌파라는 상징성이 어마어마하니 말입니다.”
(IMF가 없으니, 앞으로 더 성장했으면 성장했지, 경제가 하락할 일은 없을 거다.)
여기서 경제가 더 성장한다니.
이미 지금도 OECD에 가입한다느니, 만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판이었다.
경제적 수혜국에서 지원국으로 지위가 바뀔 정도로 국제적 위상도 올라가기도 했다.
그야말로 80년대의 일본이 떠오를 정도로 경제적 호황기였는데, 이보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재미교포조차 한국으로 일하러 오는 상황인데 말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이 일자리를 찾으러 미국으로 떠나야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재미교포가 역으로 한국으로 들어오는 상황이 되었다.
재미교포뿐만이 아니었다.
중국, 동남아 국가들부터, 저 멀리 아프리카, 인도 등의 사람들까지.
아메리칸드림, 아니, 코리안드림을 꿈꾸고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만큼 임금이 높고 나라 전체가 살기 좋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IMF는 확실히 일어나지 않겠죠?”
하지만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혜성 그룹의 미래를 알 수 없듯, 나라의 미래 역시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노사는 IMF가 절대 없을 거라고 했지만, 혹시 아는가.
원래의 IMF보다 더 큰 재난이 올지.
(몇 번 말하게 하는 거냐. 원 역사만큼의 IMF는 절대 없을 거다. 설령 경제위기가 발생해도 대기업 몇 곳이 부도 나는 정도일 거야.)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군요.”
늘 걱정하던 것이 IMF였다.
노사는 IMF를 두고 나라가 한 번 망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고 비유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노사가 저렇게까지 확신하며 말하는 것을 보니 걱정을 줄여도 될 거 같았다.
(정 불안하면 종금사의 자금을 북한으로 돌리게끔 유도해 봐. 외화가 동남아로 빠지지만 않는다면 경제위기가 일어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내 돈도 아니고 종금사의 돈을 북한에 투자하게 유도하라니.
“종금사의 돈이라.”
(IMF 원인 중 하나가 종금사의 해외 채무야. 막무가내로 동남아 채권을 샀다가 동남아에서 금융위기가 발발하니 그대로 망해버린 거지. 그 영향이 국내 기업에까지 퍼졌고.)
“저도 알긴 합니다만, 종금사들의 투자 계획을 제가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설령 정부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돈 욕심 앞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의미가 없을 테니까.
(너는 네 영향력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제 영향력 말입니까?”
(주식 시장에서 너는 신으로 통하고 있어. 투자의 신으로 말이지.)
“그런 소문이 도는 것은 듣긴 했습니다.”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주식 전문가란 작자들이 그 이야기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니까?)
“그렇습니까?”
(네가 북한 투자에 관해 몇 마디만 언급해도 종금사 놈들은 태국이 아니라, 북한을 선택하게 될 거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하이에나 같은 종금사들이 과연 그렇게 쉽게 내 의도에 따라줄지 의문이었다.
‘뭐 그래도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정치적으로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지금의 북한은 그 어느 때보다 한국과 사이가 좋았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일본 기업들의 태도가 바뀐 거 같던데?)
“예, 소니도 그렇고 일본 반도체 기업들도 갑자기 태도를 전향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일본도 드디어 주제 파악을 하기 시작했나 보군.)
확실히 그런 거 같기도 했다.
뭐, 그래 봤자 아직 일부에 불과했지만.
(나중에 여력이 생기면 일본 정치권에 개입해서 친한파 정권을 세울 수 있게 해 봐.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이야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도, 혜성 그룹의 힘이 더 강해진다면 일본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야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당장 소프트뱅크만 해도 일본 사회에서 영향력이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었으니.
그리고 그런 소프트뱅크의 대주주가 바로 나였고 말이다.
“뭐가 됐건 일본은 확실하게 꺾은 거 같긴 합니다.”
(도요타는 아직 못 꺾었잖아?)
“시간문제입니다. 기화 자동차와 포르쉐까지 합치면 이제 규모도 엇비슷해집니다.”
(성장이 빠르긴 하군.)
“90년대 후반이 되면 도요타를 꺾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이제 중국만 확실하게 견제하면 되겠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의 중국을 생각하면 과연 혜성 그룹에 도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싶지만, 노사는 미래를 보고 온 사람이었다.
중국이 G2가 될 정도로 잠재력이 있는 국가임을 노사가 말해주었기에 나 역시 중국을 무시할 생각이 없었다.
‘다시 북한 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는 거 같은데, 기회가 생기면 중국을 눌러주긴 해야겠어.’
* * *
김진식은 푸른 바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중국 어선이야?”
1996년이 되면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번 주에만 4번이나 출동했었는데, 그들이 쫓아낸 중국 어선만 수백 척이 넘었다. 나포하여 끌고 간 중국 어선만 10척이 넘었고.
그리고 지금도 중국 어선이 불법 조업하고 있다는 신고에 다급히 출동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떼로 몰려왔군.’
신안군 가거도 해상에 징글징글하게 많은 숫자의 중국 어선이 보였다.
적어도 100척은 넘어 보였는데, 어선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손도끼와 쇠 파이프, 해머 등으로 무장한 건 예사였고 권총부터 시작해서 소총, 심지어 기관총까지 보유한 어선도 있었다.
위이잉-! 위이잉-!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비정이 퇴거 경고 방송을 하였다.
물론 중국 어선들은 여느 때처럼 경고 방송을 무시한 채 조업에 열중할 뿐이었다.
“이제는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는데요?”
“빌어먹을. 경고 사격밖에 못 하는 우리가 우습다 이거지.”
해경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면 저리 당당하게 행동하지도 못했을 터.
김진식은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탕! 탕! 탕!
경고 사격을 하자 그제야 중국 어선들이 반응했다.
하지만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저들도 경고 사격이 경고 사격으로 그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엇! 저기 어선 하나가 돌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친 새끼들!”
“쏘, 쏩니까?”
“당연히 쏴야지, 뭐 하고 있어! 더 오지 못하게 기관총 쏴 버려!”
자신감이 넘쳐나는지 중국 어선 하나가 경비정을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기관총 앞에서 그 자신감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300발의 위협 사격이 이어지자, 그제야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돌진을 멈추는 중국 어선이었다.
“어떤 놈들인지 가만두지 않겠어!”
김진식은 씩씩거리며 해경 대원들을 이끌고 중국 어선으로 이동하였다.
물론 그는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늘 그렇지만, 중국 어선을 단속하는 일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 선원들이 언제 도끼를 들고 달려들지 몰랐으니까.
실제로 어선에 올라타니 쇠창살과 철창 등이 위압적으로 설치된 모습이 보였다.
아마 단속을 방해하기 위해 설치한 거 같았다.
다행히 기관총의 영향인지 중국 선원들은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고 체포에 응하였다.
위이잉-! 위이잉-!
하지만 그때였다.
사이렌 소리가 울리더니, 경비정에서 다급한 경고 방송이 나왔다.
김진식이 놀란 눈으로 바다 쪽을 바라보니 어선 세 척이 나포된 어선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들!’
경비정은 당황했는지 제대로 기관총도 사격하지 못하고 그들의 진입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어선 세 척에 탄 중국 선원들이 그대로 나포된 어선으로 넘어왔다.
무슨 해적처럼 하나같이 무기를 든 채였다.
탕! 탕! 탕!
하늘에 대고 권총을 쏘았지만, 중국 선원들은 기죽지 않은 채 계속 넘어오더니 이윽고 해경 대원들을 공격하였다.
이미 대원 몇 명은 중국 선원들의 공격을 받아 바닥으로 쓰러진 상태였다.
‘빌어먹을!’
더는 참지 못한 김진식이 가장 위협적인 무기를 든 중국 선원을 향해 권총을 발표하였다.
“컥!”
기세 좋게 달려오던 중국 선원은 그대로 심장을 부여잡고 앞으로 엎어졌다.
그렇게 김진식이 공기탄을 발사하자, 다른 대원들도 공기 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공기 탄을 발사한 이후에도 중국 선원들의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지만, 결국 상황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도 김진식은 웃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쏜 공기탄에 맞은 중국 선원이 응급조치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