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이럴 땐 힘을 합쳐야지
11월 29일.
프룬제 일파가 김정일을 암살한 지 열흘가량 지나자, 한국에서도 마침내 김정일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아니, 이게 정말이야? 그 김정일이가 테러당해 죽었다고?”
“허, 김일성이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김정일이까지 이렇게 돼?”
“천벌을 당한 거지! 민족을 배신하니 그렇게 된 거 아니겠어?”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설마, 북한에서 내전이 일어나려나?”
“모르는 일이지. 애초에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자연사가 아니라, 폭사로 알려진 만큼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한국에서는 김정일의 권력을 절대 권력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더욱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김정일을 죽인 게 친중파라더군!”
“나도 들었네. 친중파 장성들이 중국의 명령을 받고 김정일을 죽였다지?”
암살의 배후에 친중파가 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한반도를 넘어 세계로 퍼져나갔다.
한국, 일본, 미국에서는 이미 이 같은 소문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정도였다.
물론 이런 의견도 있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지금 정권을 잡은 쪽이 소련 유학파 출신들이라던데, 그자들이 친중파를 숙청하려고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것일 수도 있어.”
“프룬제 일파의 움직임이 수상하긴 해.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순식간에 정권을 장악해 버렸잖아?”
“그러게. 김정일이 죽으면서 가장 이득을 본 건 프룬제 일파 아닌가?”
하지만 이런 의견은 극소수일 뿐이었다.
프룬제 일파가 내민 증거가 워낙에 설득력이 있어서 그런지 대부분은 암살의 배후가 친중파 군인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여론은 북한 내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에서 위원장님을 눈엣가시로 여겼다더군! 그래서 손을 쓴 모양이야!”
“이 되놈 새끼들, 기어코 일을 저지르는구나!”
“일본은 백 년의 적, 중국은 천 년의 적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중국은 일본만큼이나 신의가 없는 나라야!”
김정일이 죽은 날부터 이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이던 프룬제 일파였다.
그러던 중 마침내 명분 작업까지 끝을 마치자, 더는 지체할 이유가 사라졌다.
이미 여론도 그들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친중파를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 * *
쾅!
“빌어먹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은 화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1세대 권력자들과 달리, 북한과 혈맹 관계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었다.
어느 정도 숨통만 열어둔 후 속국처럼 만들 생각이었는데, 하필 중요한 시기에 북한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김정일이 암살당하더니, 친중파 세력까지 대대적으로 숙청당한 것이었다.
“당장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프룬제 놈들을 압박해! 허튼짓 하지 못하게 막으란 말이야!”
새로 북한의 정권을 장악한 프룬제 일파는 이미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당장 북한에 전쟁을 선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 세계가 북한을 지켜보는 상황에서 북한과 전쟁을 일으켰다간 중국은 설령 이긴다고 해도 남는 게 없었다.
물론 북한이 엇나가는 것을 계속 방관할 수도 없는 일.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애송이 놈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미쳐 날뛰는 모양인데, 현실을 자각하면 우리에게 길 수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이런 그의 생각과 달리, 북한에서는 중국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선에서 자주국의 내정에 개입하냐며, 강한 반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오리방쯔 놈들이, 기어코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린단 말인가!”
덩샤오핑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가 왜 1세대 선배들과 다르게, 북한을 속국 대하듯 대하려고 했었던가.
김일성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지금의 북한 사정이 얼마나 안 좋은지 한눈에 꿰뚫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북한의 사정을 꿰뚫고 있는 그가 보기에 프룬제 일파의 행동은 그저 만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 군을 마주할 때 그 애송이 놈들이 지금처럼 당당하게 굴 수 있을지 한번 보자.’
전면전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단지, 국경에서 군대 일부를 동원하여 북한을 압박할 생각이었다.
“군대를 동원해 북한 내정에 개입할 경우, 미국은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생각도 미국이 나서자 깨끗하게 사라졌다.
미국에서 항공모함을 동원해서는 중국이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은 도광양회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광양회란 빛을 감추고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는 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힘을 감추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마찰은 반드시 피해야만 했다.
소련이 무너진 상태인 지금,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이었으니 말이다.
‘설마 미국에서 이렇게 빨리 북한 문제에 개입할 줄이야. 일이 아주 곤란하게 되었어!’
덩샤오핑이 미국의 개입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자, 국가 주석인 장쩌민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직였다.
그는 이번 기회에 종이호랑이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정치 선배인 덩샤오핑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무서워 혈맹을 버린 사람이, 같은 나라, 같은 인민이라고 버리지 않을 리 있겠는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중화민족의 당당한 사내로 인정하는 법이다!”
“애초에 혈맹이었던 조선을 무리하게 압박하여 반중 정서를 키우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이렇게 중국은 미국이 개입하기 무섭게 자중지란에 휩싸였다.
북한 문제는 이제 안중에도 없을 정도였다.
* * *
남한 사람들은 북한의 새로운 정권을 기대 반, 불안 반의 시선으로 지켜봤다.
친중파를 숙청하면서 반중 정권임을 드러낸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한국에 우호적이란 보장은 없었다.
소련 유학파 출신이 정권의 주류라는 말에 친러시아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고, 북한 문제에 미국이 개입한 것을 두고 친미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프룬제 일파가 정통 사회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셋 중에 무엇이 되었건 간에, 한국으로선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김씨 일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정권인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안정적으로 굴러간다는 점이었다.
“당장 무슨 사건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용하구먼?”
“그러게 말이야. 친중파를 숙청하고도 계속 잠잠한데?”
“쿠데타를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게 사실인 거 같아.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반발이 적을 리가 없잖아?”
“이유가 뭐가 됐건 당장 내전이 터지지는 않을 거 같아서 다행이야.”
김정일이 죽고서 한 달 정도 지날 때까지 북쪽에서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 언론들이 곧 북한에서 수백만 명의 피난민이 몰려올 거라고 보도하여 한국 사회가 잠시 큰 혼란에 빠졌었다.
그런데 정작 북한의 새로운 정권은 한 달이란 시간 동안 김정일 정권보다 오히려 더 잠잠한 모습을 보였으니, 사람들로선 안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북한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외교 라인을 개설하여 한국에 이 같은 요구를 전달하였다.
“수백만 명의 인민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의 북한은 식량과 경제 지원을 요구하면서도 절대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었다.
인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마치 ‘식량을 안 주면 후회하게 될 거다’라는 식의 협박만 할 뿐이었다.
김일성 때라고 다르지 않았다.
평화, 통일 이야기가 진지하게 오고 가기는 했으나, 북한은 늘 오만하면서 뻣뻣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그런데 북한의 새로운 정권은 이전까지와 전혀 상반된, 자존심을 완전히 버린 거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더 충격적인 것은 북한의 새로운 정권이 6.25 남침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 발언을 했다는 점이었다.
“아니, 북괴 놈들이 갑자기 왜 저래?”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는데, 그게 진짜인 거 아니야?”
“그걸 믿어? 다른 사람은 믿어도 북괴 놈들의 말을 믿으면 안 되지!”
“하지만 저놈들이 저렇게 고개를 숙이는데, 우리가 안 도와줄 수는 없잖아.”
만약 김정일이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면 여야 할 것 없이 반대를 외쳤을 것이다.
김정일은 처음부터 친중적인 행보를 보여왔고, 한국에 모욕을 주며 적대 감정을 쌓아 올렸다.
설령 대북 지원을 지지하는 여당이라고 해도 이러한 김정일 정권을 도울 이유는 절대 없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이전과는 상반된 외교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자, 국민 여론은 반으로 갈렸다.
도와봤자 또 속을 뿐이라는 의견과 그래도 같은 민족이니 여유로운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뉜 것이다.
* * *
“이 회장. 이 회장은 정부가 북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계획인지 알고 있어?”
권오중 회장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북한을 돕겠지요.”
“흠. 역시 좌파 정권이라 북한을 끝까지 믿으려는 모양이군.”
“북한을 믿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들을 강제할 수 있는 우리의 힘을 믿고 북한을 도우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김정일이 죽고 한 달이란 시간 동안, 세계는 모르겠지만 북한 내부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피의 숙청을 비롯하여 내부적으로 권력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권력은 가족과도 나눌 수 없었다.
지금의 북한 정권처럼 반중 파벌, 친소 파벌, 반김정일 파벌 등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집단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친중파와 김씨 일가의 충성 세력이라는 외부의 적이 모두 소탕되자 그들은 곧 내부 다툼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이 같은 권력 다툼이 내전에 가까울 정도로 과격했다는 점이었다.
‘만약 내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면 진짜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겠지.’
북한 권력자들이야 나의 힘이 아닌, 한국 안기부의 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뭐가 됐건, 북한에서 안기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에 있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안기부였다.
당연히 북한 권력자들도 안기부의 힘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안기부는 그런 북한 권력자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권력 다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특정 파벌을 밀어주니, 순식간에 북한 내부의 권력 다툼은 끝이 나고 친한파 정권이 세워졌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내가 권오중 회장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북한의 정권이 식량 요청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에서 긍정의 답변을 보냈다.
최소 수천만에서 최대 수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답변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의 입장은 언론과 야당의 거센 공세에 다시 바뀌었는데, 그러자 정부는 현금이 아닌 현물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비자금으로 사용할 수 없는, 생필품 위주로 보낸다고 이야기한 것인데, 물론 그런다고 야당에서 ‘YES’ 할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정부가 현물을 지원하는 것에 대단한 비리가 있을 거라는 식으로 거센 비판을 이어나갔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이래서 문제야.’
나는 혀를 찼다.
옳고 그름을 떠나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서는 여야가 힘을 합칠 필요가 있는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뭐 예상했던 일이니,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될 일이지.’
야당에서 한창 대북 지원 문제로 반발할 때, 나는 기자 회견을 통해 북한에 무상으로 차관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연히 차관은 쌀, 분유, 연탄 등 생활필수품 위주로 지급할 계획이었다.
물론 그 생필품에는 혜성 그룹의 로고를 크게 붙여서 북한 사람들이 누가 자신들을 도왔는지 확실히 알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