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더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야
“좋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에게 긍정의 답변을 해 주었다.
그러자 손정의가 매우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대신 미로 제팬의 지분은 저희 쪽에서 49% 정도 갖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미로에서 직접 일본에 진출해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혜성 그룹의 제품들이 일본에서 성과가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일본이란 나라의 배타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혜성의 휴대폰이 일본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지.’
매출이야 꾸준히 늘고 있었다.
어느덧 100억 엔을 돌파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토로라와의 점유율 싸움은 상대가 안 됐다.
가격으로 보나 디자인으로 보나 모든 것이 혜성폰이 우위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일본에서만큼은 제대로 된 성적이 안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미로의 소유주가 한국인이란 사실이 알려진다면 점유율에 영향이 갈 수도 있다.’
겉으로는 크게 티를 내지 않지만, 일본은 은근하게 한국 제품을 배격하는 나라였다.
설령 가성비가 월등하게 좋은 제품이 한국에서 나와도 대체재가 존재한다면 그 대체재를 선택할 정도였다.
하여 나는 미로 제팬을 손정의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나와 우호적인 관계이기도 했고, 노사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야후 제팬을 성공시킨 사람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 역사의 야후보다 현재의 미로가 여러 면에서 압도적이었으니, 손정의가 이끄는 미로 제팬은 충분히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미로 제팬의 지분 49%는 경제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띌 게 분명하였고 말이다.
‘IT 버블이 한창일 때, 미로 제팬의 지분을 중국에다 팔아볼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손정의의 답변을 기다리니, 마침 손정의가 고민을 끝내고는 대답하였다.
“다른 조건은 없이, 지분만 넘기면 되겠습니까?”
“상징적으로 몇천만 달러 정도만 받으면 저는 만족할 거 같습니다.”
“그 정도라면 어려울 게 없겠군요.”
손정의도 역시 큰 사업가가 되긴 한 거 같았다.
한화로 몇백억 정도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상장으로 벌어들인 돈을 생각하면 몇백억 정도야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터였다.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했는데, 흔쾌히 저의 제안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손정의 회장님의 부탁인데 어찌 안 들어 줄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일부로 ‘부탁’이란 단어를 강조하였다.
거래가 아닌, 부탁을 들어주는 식으로 해서 손정의에게 빚을 씌우려는 의도였다.
“이한성 회장님께서도 혹시 저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저야 지금처럼, 게임사들 인수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기만 해도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내 말에 손정의는 미소 짓는 얼굴로 별로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고 말하더니, 화제를 전환하였다.
“그러고 보니, 미로 말고도, HS 테크에서 출시한 게임들이 요즘 인기라고 들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참 부럽습니다. 안 그래도 혜성 그룹의 제품들이 세계에서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데 신규 사업까지 그리 잘 되다니 말입니다.”
“소프트뱅크의 회장님이신 손정의 회장께서 이런 말씀한 것을 남들이 알면 욕할 거 같습니다.”
“하하, 비교 상대가 이한성 회장님이라면 누가 저를 욕하겠습니까? 혜성 제품은 자동차고 전자 제품이고 가릴 것 없이 미국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 뉴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던데, 그것만 봐도 혜성 그룹이 크게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거 같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혜성의 제품들이 세계에서 잘 나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손정의가 이야기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등장하는 혜성 제품들은 사실 PPL이었다.
노사의 조언을 듣고 PPL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내가 HS 인베스트먼트로 영화에 투자할 겸, 혜성 제품들까지 PPL로 끼워 넣은 것이다.
‘그나저나 PPL의 효과가 크긴 한 거 같단 말이지.’
신문이나 언론에서 아무리 광고해도 어느 순간부터 마케팅 효과가 줄어들기 시작했었는데, PPL 광고를 시작하기 무섭게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영화에 투자한 수백, 수천억에 달하는 돈이 조금도 아깝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뭐, 애초에 성공할 영화에만 투자한 터라, 투자금은 오히려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폴리그램을 인수하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는데?’
시간이 갈수록 엔터테인먼트의 힘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
한국에서만 해도 지금이야 천만 영화는 꿈도 못 꾸지만, 몇 년만 지나도 천만 작품이 여럿 생기게 될 터.
만약 통일까지 하게 될 때 20년 안에 3천만 작품도 나올 수 있었다.
그러니만큼, 자금이 여유로운 지금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하긴, 폴리그램의 인수가라고 해봤자 1조도 안 되는 돈인데 고민할 필요가 없긴 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폴리그램 필름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하기로 결정 내렸다. 엔터테인먼트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뻔히 아는데 인수를 망설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 * *
(때가 됐다.)
“갑자기 나타나서 그리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듣겠습니까?”
(감이 좋아졌나 했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 김정일을 죽일 때가 됐다는 거다.)
“……!”
노사의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드디어……!’
늘 신경 쓰였던 것이 북한 문제였다.
솔직히 말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룬제 일파에는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시점에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소동을 일으킨다면 북한은 순식간에 내전 상태에 빠지고 만다.
북한의 내전이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생각하면 나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계획으로 세워두기만 했던 쿠데타를 실행에 옮긴다고 하니 나로선 반색하는 게 당연했다.
“거사는 언제입니까? 아니 그보다 명분은 정해진 겁니까?”
사실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야 언제든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획을 계속 미루었던 이유는 체제를 바꿔도 바뀐 체제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프룬제 일파에게는 확실한 명분이 없다 보니, 김정일을 죽인 이후에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1월 20일, 김정일이 친중파 장성들과 비밀회의를 가질 거다. 그날 김정일을 죽인다면, 암살 배후를 친중파로 모는 게 가능해.)
“친중파라…….”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친중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나쁘지 않은 계획으로 보였다.
중국의 개입도 사전에 막을 수 있을 테니까.
“11월 20일이라면 며칠 안 남았군요.”
(김기훈 그놈에게만 정보를 전하는 게 좋을 거다. 괜히 다른 놈들에게 이야기했다간, 어디서 말이 샐 수도 있으니.)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김기훈 3차장을 불러서 프룬제 일파에 지시할 내용을 전해 주었다.
당연히 김기훈 3차장은 내가 전해 준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네? 정말 거사를 진행하는 겁니까?”
“그럼 지금까지 계획을 세운 게 장난인 줄 알았습니까?”
“하,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원래 쿠데타는 조용하고 신속하게 진행해야 하는 법입니다. 러시아 정보부에서도 지금이 시기적으로 김정일 정권의 권력이 취약한 시기라고 이야기했으니,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있지도 않은 러시아 핑계를 대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김기훈 3차장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현장의 요원들에게 플랜 A를 진행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런 김기훈 3차장의 모습에 나는 픽 웃었다.
‘참 믿음이 안 가는데, 이상하게 일은 잘한단 말이야.’
이번에는 한 번 믿고 맡겨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김기훈 3차장보다는 내 뒤에 있는 노사를 믿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 * *
11월 20일.
김정일은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와락 찌푸리고 있었다.
‘중국의 요구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군.’
정권 초부터 그는 중국에 빚을 진 상태로 시작하였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권력 세습, 그것도 혈통을 기반으로 한 권력 세습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북한 내부에서도 그가 후계자였던 시절부터 권력 세습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이 김일성의 권력을 세습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암묵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중국이 그의 정통성을 확보해준 셈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중국은 그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북한을 속국 대하듯 대하기 시작했다.
친중파의 직책을 높이라는 식의 인사권에 개입하는가 하면, 이제는 영토 문제까지 건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서 빨리 권력 기반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그도 중국을 좋아하지만은 않았다.
후계자 시절에 중국을 몇 번 시찰한 적이 있었지만, 그리 좋은 기억은 없었다.
오히려 망신당한 기억만 뚜렷하게 남아있을 정도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권좌를 차지한 이후에는 더더욱 중국이 싫어졌다.
식량 지원이나 경제 지원은 소극적이면서 정작 요구하는 것은 나날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남조선의 돈주를 암살해달라는 요구까지 하고 있으니. 쯧!”
중국의 요구 중에는 이런 요구도 있었다.
바로 한국의 재벌을 암살해달라는 요구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한국의 재벌이란 혜성 그룹 회장을 말했다.
자신들을 대국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라가 일개 기업가에게 두려움을 느끼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아무리 혜성 그룹을 싫어한다고 해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지.’
김일성의 뒤를 이어 북한의 절대 권력자가 된다면 혜성 그룹에 보복하겠다는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그가 북한으로 데려와 핵 개발을 시키려고 했던 소련 과학자들을 혜성에서 가로챈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김일성이 죽고 북한의 절대 권력자가 된 그는 혜성에 보복하겠다는 생각을 깨끗이 포기하였다.
암살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에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도 아니고, 일개 기업인이라면 못 죽일 것도 없었다.
다만 문제는 후폭풍이 감히 김정일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거라는 것이 문제였다.
혜성은 단순한 한국 기업이 아니었으니까.
“예? 위원장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운전에나 집중하라우!”
그때였다.
쾅!
어디선가 기이한 소리가 들리더니, 반응할 새도 없이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갑자기 김정일이 탄 차가 폭발한 것이다.
“컥!”
김정일은 단말마도 제대로 뱉지 못한 채 즉사하였다.
* * *
‘성공했군!’
나는 노사가 전해 준 소식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침내 김정일을 죽이는 것에 성공하였다.
계획에서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는 구간을 순조롭게 통과한 셈이었다.
“이제 한반도 통일도 충분히 현실로 옮길 수 있게 되었군요.”
김씨 일가가 사라졌는데 한반도 통일이 불가능하겠는가.
외국의 개입만 차단할 수 있다면, 한반도 통일도 더는 현실 불가능한 꿈이 아니었다.
(방심하지 마라. 기껏해야 김정일 한 놈이 죽었을 뿐이니 말이야.)
“물론입니다.”
나 역시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프룬제 일파의 거사는 노사의 말처럼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김정일을 죽인 이후에도 넘어야 할 벽이 많았기에 아직 방심하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
“하지만 노사가 계시니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습니다.”
내 말에 노사는 피식 웃으며 더는 다그치지 않았다.
한반도 통일은 어려워도 김정일이 죽은 이상, 친한파 정권을 세우는 것은 그 역시 어렵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