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탐날 만해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전도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하는 행동은 여느 비서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옆머리를 쓸어 올리는 행동이나 은근하게 보내오는 눈빛은 분명 나를 유혹하려는 속셈으로 가득해 보였다.
“전 비서를 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정말 능력이 좋으신 분 같더군요.”
“저를요? 정말 영광이에요.”
“혹시 지금의 업무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지금 하는 업무도 만족스럽긴 한데, 저는 보다 가까이서 회장님을 모시고 싶어요.”
“가까이서 말입니까?”
“꼭 들어 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제 생각을 물어보셔서 답변해드린 거지, 회장님께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어요.”
“아닙니다. 안 그래도 해외에 갈 일이 많은데, 전 비서처럼 외국어를 잘하는 비서가 한 명이라도 더 많아지면 저야 좋죠.”
“저는 외국어만 잘하는 게 아닌데.”
“예?”
“아니에요, 헤헤. 저를 생각해 주셔서 너무 기쁘다는 말이었어요.”
“앞으로 외국에 가거나, 한국에서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전 비서와 최대한 함께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정말 회장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방방 뛰며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 * *
“회장님, 혹시 마음에 두신 직원이 있으십니까?”
진봉현 비서실장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어서 말입니다.”
“이상한 소문이라. 혹시 그 소문이란 게, 제가 어떤 여직원을 총애하고 있다, 뭐 이런 소문입니까?”
내가 묻자,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나는 피식 웃었다.
‘벌써 이런 소문이 나다니. 소문이란 게 확실히 대단하긴 하군.’
공식적인 자리에서 몇 번 챙겨 준 것이 전부였다.
사실 전도연의 직책은 비서였기에 단둘이 붙어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소문이 나다니, 나로서는 그저 황당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다른 재벌 총수들은 도대체 어떻게 바람을 피우고 사는지 모르겠어.’
나라면 가족 보기가 민망해서라도 그런 짓은 못 할 거 같았다.
뭐 워커홀릭인 나로서는 그런 짓을 할 시간도 없었지만.
“소문이 사실이었습니까?”
내가 웃기만 하고 제대로 답변을 안 해서 그런 것일까?
진봉현 비서실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편한 대로 생각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흠. 뭔가 계획이 있으신가 보군요.”
계획이야 있긴 했다.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고, 적의 첩자를 역이용하여 중국을 물 먹이려는 계획이었다.
‘나중에 IT 버블이 한창일 때, 소프트뱅크나 다른 IT 기업에 투자하게끔 만들면 재미있는 상황이 나오지 않을까?’
통할지 안 통할지는 아직 몰랐다.
사실 통한다고 해도 중국의 피해가 얼마나 클지 내가 알기 어렵기도 했고.
하지만 내가 잘 연기하기만 한다면 중국은 해외 투자를 몇 년간 하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IT 버블의 여파는 그만큼 크다고 하니 말이다.
‘뭐 그래도 전도연이 핵심 정보를 가져가지 못하게 철저히 막아야지. 괜히 언론이 이상한 기사를 내지 않게끔 막기도 해야 하고.’
전도연을 잘 관리하는 것이 이번 반간책의 핵심이었다.
다행히 본인의 외모에 자부심이 있어서 그런지 그녀를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들보다 조금만 더 챙겨줘도 본인이 잘나서 그런 줄 알았던 것이다.
“저는 사실 일본 버블이 오기 전에 예상했었습니다. 이때 조 단위의 돈을 벌었고 이때 벌었던 돈이 필립스 전자를 인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그녀에게 여느 남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허세를 떨면서 은근하게 내 투자 실력도 같이 드러냈다.
이래야 나중에 IT 투자에 관한 역정보를 넘길 때, 신뢰 있는 정보로 취급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 *
공산당 간부의 임명권을 가진 당 판공청 주임 쩡칭훙.
그는 작년, 1993년부터 중국의 권력자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었다.
국가주석인 장쩌민의 최측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혜성 그룹 회장이 넘어왔다고?”
“예. 교차 검증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저희 요원의 미인계가 통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깨끗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역시 그자도 남자였군.”
“미인계가 통하지 않을 사내는 세상에 없을 겁니다.”
“있다고 해도 그놈은 남자가 아니겠지.”
쩡칭훙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의 혜성 그룹은 중국의 권력자들이 굉장히 주목하는 기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혜성 그룹의 사업 분야는 중국에서 앞으로 육성해야 할 사업 분야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전자, 반도체 등등.
만약 혜성 그룹의 내부 정보를 얻는다면 신규 사업을 육성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미인계로 써먹은 그 요원에게 전해진 정보는 따로 없나?”
“일단 확실하게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뭐지?”
“저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혜성 그룹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에 쩡칭훙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혜성 그룹을 일본의 도요타, 소니, 파나소닉 등과 거의 동급으로 보고 있었다.
그룹의 총매출을 합하면 혜성 그룹이 조금 더 많을 수는 있겠으나, 세계적인 영향력이나 인지도까지 종합해서 평가하면 거의 비슷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과소평가한 것이었다고?’
도요타, 소니, 파나소닉이 중국에서 가진 위상을 생각하면 쩡칭훙으로선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혜성 그룹도 혜성 그룹이지만, 일단 혜성 그룹 회장이 가진 부가 저희의 예상보다 훨씬 거대했습니다. 소프트뱅크, 넥스트 등 IT 기업의 대주주이고 현금으로만 최소 50억 달러를 가지고 있다 합니다.”
“50억 달러라고? 그게 사실이야?”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일단 혜성 그룹 회장이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고는 합니다.”
“아니, 그자는 본인 사업을 하면서 현금은 왜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 거야?”
“부채 비율도 낮으니 언제든 은행 돈을 빌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회사 하나를 상장해서 실탄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쩡칭훙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인물은 난 인물이군.”
“그렇습니다. 심지어 그자가 가지고 있다는 50억 달러의 현금은 1,000만 달러 정도의 현금으로 한국 내에서의 주식이나 일본 버블을 이용해서 벌어들인 자산이라고 합니다.”
“혜성 그룹 회장의 투자 실력이 좋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 정도였다고?”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혜성의 자금력을 생각하면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엄청나게 비싼 평가를 받는 회사라도 거침없이 인수해왔던 혜성이었으니.
“그 정도로 투자 실력이 좋다면, 조금 도움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정치에 돈이 필요한 것은 중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스케일 하나는 대륙인 중국이었기에 한국이나 일본 등의 경제 부국보다 오히려 정치에 돈을 더 많이 썼다.
당연히 쩡칭훙도 돈을 많이 필요로 하였는데, 문제가 있다면 그의 권력 기반이 아직은 그리 안정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뇌물을 정도 이상 받으면 정적의 탄핵을 받을 수도 있는 일.
하여 그는 첩자가 전해줄 한성의 투자 정보를 활용하기로 하였다.
이미 한성의 투자 실력은 입증된 거나 마찬가지니, 한성의 투자만 따라 해도 돈이 부족할 일은 없을 거 같았다.
“그런데 혜성 그룹 회장이 중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뭐라던가?”
포르쉐로 마찰이 있었을 때, 중국인들은 혜성 그룹에 반감을 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혜성 그룹을 ‘무시할 수 없는 강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한국을 소국이라 비하하는 이들조차 혜성 그룹만큼은 도요타, 소니 급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하여 중국의 일부 권력자는 혜성 그룹을 회유하려고 시도해보기도 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시도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듯싶습니다.”
“쯧. 혜성 그룹이 중국에 반감을 품는 이유를 안다면 회유의 가능성이 생길 텐데, 아쉽게 되었군.”
혜성 그룹이 포르쉐 마찰로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힌 게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만약 중국 정치인 중에 혜성 그룹을 설득하여 지난 일을 사과하게 유도하는 자가 있다면 당내 평가가 비약적으로 올라갈 것이 분명하였다.
쩡칭훙이라면 장쩌민의 후계자가 되는 것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셈이었고 말이다.
‘뭐 앞으로도 기회는 있겠지.’
기업가가 애국심 같은 거창한 이유로 반중 감정을 품는 것은 아닐 터.
그러니 앞으로 설득의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 * *
보고서를 읽던 나에게, 전도연이 팔을 어루만지듯, 살짝 터치하고는 용건을 말했다.
“회장님, 소프트뱅크 회장이 찾아왔습니다.”
“아, 그래요?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에~”
애교 섞인 대답을 하며 뒤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도청이나 뭐 다른 엉뚱한 짓은 하지 않아서 좋긴 한데, 저런 모습은 보기 거북스럽긴 하군.’
유혹의 효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인지 그녀가 아무리 애교를 부려도 나로서는 그리 보기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속내를 밝힐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지만.
어쨌든 손정의가 온다는데 언제까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정의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한창 일하느라 바쁘실 텐데, 제가 방해하지 않았나 걱정입니다.”
“아닙니다. 손 회장님이 오시는데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시간을 내드려야죠. 그리고 애초에 지금은 평소보다 여유로운 시간 때입니다.”
“그렇습니까? 하하, 다행이군요.”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들으셨는데, 우리 사이에 더 끌 게 있겠습니까? 속 시원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소파에 앉은 손정의에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손정의가 감사 인사를 하더니, 미로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요즘 많이 쓰고 있는데, 정말 유익한 사이트인 거 같습니다. 정보를 얻기도 편하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더군요.”
“예.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이 미로의 매력 포인트입니다.”
“맞습니다. 뉴스부터 시작해서 자료 검색, 경매, 쇼핑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들까지. 정말이지 이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표정을 보면 미로에 푹 빠지긴 한 거 같았다.
하긴, IT에 관심이 있는 사람치고 미로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에 접어든 포털 경쟁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미로였으니까.
“그런데 미로 이야기를 꺼내시는 걸 보면 미로에 관한 부탁인가 봅니다.”
“예, 본론을 이야기하자면 저는 미로 제팬을 원하고 있습니다.”
“미로 제팬이라.”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미로는 일본에서도 미국과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큰 성공을 이루어내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손정의와의 친분을 생각하면 그의 제안을 받아주고 싶기는 한데, 또 미로의 미래 가치를 생각하면 함부로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일본의 시장 규모를 생각하면 미로 제팬 하나가 웬만한 대기업보다 더 가치가 높을 것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