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거사를 앞당길 수밖에 없겠어
“뭐야, TV 광고였잖아?”
조금 실망스러웠다.
엄청난 무언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TV 광고라니.
‘근데 이 TV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화면을 볼 수 있다는 거지?’
다른 의미로 흥미로움을 느낀 그는, 미로에서 광고하는 클레앙 TV에 관해 검색해 보았다.
그러자 꽤 방대한 양의 검색 결과가 나왔다.
물론 전혀 원하지 않은 내용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클레앙 TV에 관한 내용도 분명 있었다.
‘최초로 화면 비율을 바꿨다고? 숨겨진 화면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구나.’
검색하여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자 더 흥미가 생겼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것은 클레앙 TV를 제작한 기업이었다.
당연히 일본 기업일 줄 알았는데, 일본의 이웃 국가인 한국에서 생산한 제품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기업이 미로의 모기업이라는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집에 TV가 없는데 한 대 사볼까?’
그는 즉흥적으로 결정하였다.
사실 이전에도 미로에서 광고하는 제품을 몇 번 사본 적이 있었다.
자신을 재미있게 해 준 미로에 보답하는 차원이었는데, TV라고 못 살 이유는 없을 거 같았다.
조금 비싸긴 해도 부모님에게 받는 용돈이 한 달에 천 달러가 넘는 그에겐 큰 타격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클레앙 TV를 구매한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고 기능적으로도 문제 될 게 없었다.
숨겨진 화면이란 것이 별거 아니란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 역시 문제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바랐던 것은 이전 제품들과 차별화된 TV라는 것이지, 엄청난 무언가를 바란 것은 아니었으니까.
“너 클레앙 TV라고 알아?”
“그게 뭔데?”
“아, 이거 촌놈이네. 미로에서 광고하는 TV잖아.”
“미로에서 광고한다고 뭐 특별할 게 있나?”
“특별한 거? 당연히 있지. 이 TV에는 기존의 TV에서 보지 못했던 숨겨진 화면을 볼 수 있다고!”
다니엘은 여기저기다 클레앙 TV를 홍보하였다.
원래 그의 성격 자체가 자랑하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클레앙 TV는 광고 문구부터가 딱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최초로 화면 비율을 변경하다’부터, ‘숨겨진 화면을 볼 수 있다’, ‘숨겨진 1인치!’까지.
심지어 미로의 모기업에서 생산하는 제품이니 더더욱 매력적이었다.
“1인치가 늘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한번 느껴봐!”
이런 그의 허세에 주변 반응도 유별났다.
숨겨진 화면과 1인치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까지.
하나같이 젊은 혈기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 * *
클리앙 TV는 바로 광고에 들어갔다.
<숨겨진 1인치를 찾았다!>
내가 생각했던 문구를 그대로 광고하였는데, 역시 호응이 상당했다.
이대로 가면 이재현 대표가 장담했던 시장 점유율 50%도 문제가 없을 거 같았다.
‘다만, 경쟁 기업들의 반발이 거세긴 하군.’
과대광고라느니,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느니.
은성 전자를 비롯하여 미래 전자, 정우 전자 등에서 말들이 많았다.
클레앙 TV가 무서운 기세로 점유율을 장악해나가니 경쟁 기업들도 반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거세게 반발할수록 클리앙 TV의 인기는 더욱 커질 것이다.
국내에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미국에서도 평가가 나쁘지 않은데?’
시장 후발주자로서 저가품의 이미지를 보여줬던 것이 지금까지의 혜성 전자였다.
그나마 필립스 전자와 합병하면서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하지만 클리앙 TV는 독창적이면서 차별화된 제품이었고 그 덕에 미국 소비자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이것도 미로의 영향일까?’
미로에도 광고를 줬는데, 그게 제법 효과를 본 거 같았다.
소비자 연령대 중 20대 비율이 높은 것을 보면 말이다.
‘뭐가 됐건, 이대로 가면 미국에서의 점유율이 20% 이상도 가능하겠어.’
미국에서 이 정도니 다른 나라라고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TV 부문에서도 세계 1위는 힘들어도 세계 2위까지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가장 점유율이 낮았던 TV까지 세계 2위라. 이러면 사실상 혜성 전자가 세계 1위라고 칭해도 부족할 게 없겠는데?’
반도체에 이어 전자 사업에서까지 세계 1위라니.
실로 엄청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똑똑!
혜성 전자의 성과에 혼자 뿌듯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우 그룹의 권오중 회장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이번에는 어디였지?
영국이었던가.
내가 미국에 가기 전부터 이미 유럽 곳곳을 쏘다니던 사람이 권오중 회장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오니, 또 무슨 거창한 용건이 있다고 바로 나를 찾았다.
‘그러고 보면 정우 그룹도 부채 비율이 상당한데,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군. 은성이나 미래나 신규 사업을 축소하기 바쁜데 말이야.’
잠시 그런 생각을 할 때, 집무실 문이 열리며 권오중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이 회장. 잘 지냈나?”
“저야 잘 지냈습니다. 권 회장님께서도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건강하기는. 나도 요즘 늙었어. 은퇴할 때가 되었나 봐.”
“권 회장님답지 않게 무슨 약한 소리를 하고 그러십니까.”
“나이가 나이인데 어쩌겠어.”
“나이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 정력적으로 활동하시는 거 아닙니까. 요즘 정우 그룹의 성장세도 엄청나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그러자 권오중 회장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장세라니. 하하하. 그냥 운이 좋게 사업이 잘되는 거뿐이지.”
“곧 재계 2위도 가능할 거 같더군요.”
결코 아부하는 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권오중 회장에게 아부해야 할 사람도 아니었고.
나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재계 2위로 거론될 정도로 정우 그룹의 성장세는 무시무시하였다.
‘문제는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가인데, 설마 장부를 조작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사실 정우 그룹이 재계 2위로 거론되고 있는 이유는 정우 그룹의 성장세도 성장세지만 미래 그룹에서 사업 확장을 중단한 것이 가장 컸다.
김태중 정권의 재벌 개혁 여파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미래 그룹이었고, 그에 따라 사업 확장을 멈추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정우 그룹은 정부의 지시대로 부채 비율은 줄이고 있으면서 사업 확장도 꾸준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뭐,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지.’
아무리 권오중 회장과 친분이 깊다지만, 그 친분이 분식회계 저지르지 말라고 오지랖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의 오지랖을 부리려면 내가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저 정우 그룹이 무너지려 할 때, 계열사 몇 개를 시세보다 조금 더 쳐줘서 인수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이 회장. 클리앙 TV였나? 요즘 점유율 올라가는 속도가 엄청나더군. 이러다가 클리앙 TV만 살아남겠어.”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자 쪽 임원들이 하는 말 들어보면 내가 한 말도 절대 과장이 아닌 거 같던데? 한국에서만 잘나가는 게 아니라, 미국에서도 잘나간다며?”
“마케팅이 잘 돼서 소득이 있었습니다.”
“살살 좀 해. 정우 전자도 살길을 좀 열어줘야 하지 않겠어? 우리 사이에 말이야.”
“엄살이 심하십니다.”
“아무튼, 전자의 꽃인 TV까지 그렇게 잘 되다니. 축하하네. 이 회장은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한 거 같아.”
권오중 회장이 부러운 얼굴로 그리 말하니 기분이 영 나쁘지 않았다.
지금껏 칭찬은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같은 재벌 회장이 저런 눈빛을 보내며 칭찬하는데 무덤덤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결국 미래 전자와 은성 전자가 합병할 거 같더군요.”
나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기에 화제를 전환할 겸, 그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당연히 들었네. 요 근래 재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일이지.”
“권 회장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글쎄. 솔직히 나는 크게 관심이 없네. 어차피 남의 사업인데 관심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역시 권오중 회장이 나랑 성향이 가장 비슷한 거 같았다.
뭐 그렇다고 내가 이번 빅딜에 권오중 회장만큼 무관심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 회장과 왕 회장이 전경련에 도움을 요청했다는데, 따로 관여하실 생각이 없는 겁니까?”
“정부가 하는 일을 어떻게 막겠어? 심지어 이 회장까지 이번 정부를 지지하고 있잖아?”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니, 권오중 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두 기업 모두에게 이익이 아닌가 싶어. 은성 그룹은 어쨌든 당장에 위기를 넘겼고, 미래 그룹은 그룹 이름처럼 미래를 얻었잖아? 반도체를 가졌으니 말이야.”
참고로 이번 빅딜은 전자와 반도체를 서로 교환하는 것이었다.
즉, 미래 그룹에서는 은성 반도체를 갖고, 은성 그룹에서는 미래 전자를 갖는 식이었다.
언론에서는 이번 빅딜을 나쁘지 않게 평가하고 있었다.
권오중 회장의 말처럼, 은성 그룹은 적자만 나는 반도체 대신 7년 전부터 매년 흑자를 내는 미래 전자를 얻었고, 반대로 미래 그룹은 주력 계열사가 아닌 미래 전자를 포기한 대신 수천억대를 투자한 은성 반도체를 얻었으니 말이다.
‘물론 정작 왕 회장이나 구 회장이나 불만이 클 수밖에 없겠지. 왕 회장은 부채 비율이 더 높아졌으니, 신규 사업을 포기해야 하고, 구 회장은 미래 사업이라 여기던 반도체 사업을 포기해야 했으니까.’
뭐가 됐던 두 기업이 합병했으니 미래 그룹이나 은성 그룹이나 더는 위기를 겪지 않을 거 같았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반도체 업체에 든든한 동맹이 한 곳 생긴 셈이기도 했고.
* * *
김정일은 지금 돌아가는 북한의 사정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과 협상이라니?
그가 생각하기에 시기상조였다.
물론 시장 개방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그의 권력 기반이 점점 불안정해지는 상황이었다.
이럴 때, 시장을 개방하고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한다면 그는 김일성이 죽은 뒤에도 절대 김일성과 같은 권력을 가질 수 없었다.
운이 나쁘면 다른 공산주의 국가가 그러했듯, 권력을 잃거나 아예 인민의 손에 죽임을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나라는 그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김일성의 나라였다.
그리고 김일성은 그가 아무리 말려도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인민들의 사정이 이렇게 열악한지 진즉에 알았으면 내래, 몇 년 전에 이미 시장을 개방했을 것이야.
“시장을 개방하면 인민들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미쳐 날뛸 것인데, 그게 걱정되지도 않습니까?”
-설령 인민들에게 권력을 일부 나눠주더라도 지금은 인민들을 살리는 게 먼저야!
김일성은 마치 성군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말했다.
작금의 식량 문제와 경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시장 개방밖에 없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웃기는군! 인민들이 고깃국을 먹는지, 풀떼기를 뜯어 먹는지 언제 그리도 신경을 썼다고 저러는 거야.’
그로서는 김일성이 노망났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심지어 어제 당 간부 회의에서는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이 나진, 선봉을 하루빨리 국제 관광특구로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이제 막 한국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른 전개였다.
‘아무래도 거사를 조금 앞당길 수밖에 없겠군그래.’
노망이 난 아버지가 나라를 망치고 있는데 자식 된 도리로서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