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진짜 가능하겠어
포르쉐 가문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970년대부터 포르쉐 가문은 전문 경영인 제도를 도입하였다.
무슨 고상한 경영 이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한 페리 포르쉐와 그 누나인 로이제 피에히가 반목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두 사람은 서로 합의하여 가문의 누구도 경영에 참여하지 않은 채, 전문 경영인을 따로 고용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결정된 경영인이 포르쉐 생산파트를 총괄하고 있던 벤델린 비데킹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누나가 그렇게도 밀어주던 비데킹이 중국에서 기술만 뺏긴 채 아무것도 얻지 못했잖아!”
페리 포르쉐는 자신의 누나인 로이제 피에히를 강하게 비난하였다.
벤델린 비데킹은 로이제 피에히의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폭스바겐그룹 CEO인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밀어주는 인물이었는데, 자신감 넘치던 것과 달리 그는 실패를 거듭 저질렀다.
페리 포르쉐로서는 당연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누나와 정적 관계여서 그렇기도 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포르쉐가 망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2년도 안 지났어. 어떻게 2년 만에 결실을 보려고 해? 네가 그렇게 근시안적이니 사업을 그리 망쳤었지.”
“뭐? 지금 상황에서 그딴 말이 나와? 내년에 회사가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라고!”
“우리가 누군데 무너져? 우리, 포르쉐야. 고작 이런 위기에 무너질 리가 없잖아?”
“그래서 비데킹, 그 사람을 계속 밀어주겠다는 거야?”
“능력 있는 사람이야. 당연히 더 지켜봐야지.”
“누나의 생각이 그러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내 지분을 비싸게 인수해 주겠다는 기업이 있거든. 나도 내 살길을 찾아 떠나야지.”
로이제 피에히가 미간을 찌푸렸다.
포르쉐 가문의 사람인 페리 포르쉐가 포르쉐의 지분을 매각한다니?
“미쳤어? 네가 포르쉐 지분을 왜 매각해?”
“말했잖아. 이대로 놔두면 무너질 게 분명한데, 계속 지분을 손에 쥐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말이야.”
페리 포르쉐는 결코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물론 그도 원래 같았으면 지분을 팔 생각 따윈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포르쉐는 그의 자존심이자, 가문의 상징이었다.
아무리 돈이 좋다고 자존심과 가문의 상징을 팔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돈이라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혼다, 도요타, 벤츠 등.
수많은 경쟁자가 인수 제안을 했었다.
지금까지 받은 제안 중에 가장 금액이 높았던 제안은 2억 마르크.
달러로 치면 1억 3,000만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사실 포르쉐의 가치를 생각하면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액수였다.
자식들의 지분까지 모아서 매각한다면 2억 달러도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페리 포르쉐는 그 같은 제안을 단숨에 거절하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야 높게 쳐준 것이라지만, 포르쉐의 영광을 기억하는 그로선 금액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혜성 그룹은 무려 4배나 쳐줬단 말이지.’
2배, 3배도 아닌 4배.
무려 5억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제시하는 금액이 이 정도로 달라지자 페리 포르쉐도 매각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물며 포르쉐의 사정이 나날이 악화하는 지금이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도대체 누구에게 판다는 거야? 혼다? 아니면 도요타?”
“혜성 기업에 팔 생각인데?”
“거기는 또 어디야?”
“설마 혜성을 모른다고? 어지간히 몰상식하군.”
페리 포르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국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두 개의 자동차 브랜드를 보유한 기업이 바로 혜성이었다.
업계 사람이 아니어도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업계 사람, 심지어 포르쉐 가문의 여인이 혜성을 모른다고 하니 몰상식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역시 지분을 매각하는 것이 정답이야.’
상식이 없는 자가 저리 나대고 있으니 미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포르쉐의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지분을 매각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 * *
‘의외군.’
독일에서 전해진 소식에 나는 놀랐다.
일단 시험 삼아 포르쉐 가문의 주요 인물들에게 인수 제안을 넣어봤는데, 의외로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진짜 포르쉐를 인수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겠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인수할 확률은 절반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다.
폭스바겐그룹도 있으니, 자금을 더 빌리면 빌렸지, 회사를 매각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무려 페리 포르쉐라는 포르쉐 가문의 가주라 할 수 있는 인물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 소식을 들으면 부회장이 어지간히 좋아하겠군.’
물론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지금이야 위기를 겪고 있다지만, 포르쉐는 스포츠카의 명가였다.
노사가 전해 준 이야기대로라면 미래의 포르쉐는 시가총액 100조 이상의 기업이 될 것이니, 더욱더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었다.
‘뭐, 그런 거를 제외하고 포르쉐의 상징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에 들지만 말이야.’
나는 피식 웃고는 다시 본래 업무로 복귀하였다.
포르쉐가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지금 하는 사업들보다 중요하지는 않았기에, 본래의 업무에 최대한 집중했다.
늘 그랬지만, 1993년은 혜성 그룹에 있어 의미 있는 한 해였다.
혜성 반도체는 D램 반도체 업계에서 더 압도적인 격차로 경쟁 기업들을 따돌렸다.
3분기부터 진행한 치킨게임으로 몇몇 기업은 도산 위기에 빠질 정도였다.
가전 쪽의 성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필립스 전자와 완전히 합병한 혜성 전자였다.
두 기업의 합병으로 혜성 전자는 가전에서 세계 1위의 규모를 자랑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매출에서도 세계 1위를 넘보고 있었다.
일본 기업들이 오히려 매출 하락을 겪는 동안, 미국은 물론이고 동남아, 인도, 유럽 등 전 세계에서 매출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반도체처럼 기술력으로도 더는 일본 기업들에 밀리지 않게 되었다.
자동차야 말할 것도 없었다.
구태여 포르쉐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기화 자동차와 혜성 자동차는 미국 시장에서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이었다.
두 기업을 합치면 매출이 10조 이상일 정도였다.
이렇게 주력 회사 세 개가 무난한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면, 몇몇 계열사는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혜성 건설, 혜성 해운, 혜성 엔진, 혜성 호텔 등등.
기업들이 도산 위기를 겪는 동안 매물로 나온 자산들을 인수하며 급속도로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 * *
1993년이 끝나기 직전, 마침내 기다리던 러시아의 항공모함이 한국에 도착하였다.
한 척도 아니고 무려 두 척의 항공모함이었다.
‘마지막까지 만족스럽군.’
항공모함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기뻐하는 것은 역시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청와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한성 회장님, 늦은 시간인데 통화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대통령님.”
-너무 기뻐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
“저 역시 항공모함이 무사히 예인되어서 무척 기쁩니다.”
-러시아의 항공모함을 얻었으니, 이제 우리도 항공모함을 만들 수 있게 되겠지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자신감 있는 나의 목소리에 김태중 대통령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항공모함 건도 그렇고 빌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한 일도 그렇고 이한성 회장님께는 정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하다니요?”
-얼마 전에 빌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이한성 회장님의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저러는 걸까?
지난번의 만남에서는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었는데 말이다.
-회장님이 통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한반도가 통일되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긴 했습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과 독대했을 때, 중국의 위협을 강조하며 한반도 통일에 관해서도 살짝 언급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때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게 하는 것이 주목적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못했었지만 말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과의 통일 문제는 저보고 주도하라 하더군요. 본인은 옆자리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다면서 말입니다.
한국이 통일 문제를 주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사자가 주도하지 않으면 누가 주도하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의 허락 없이는 북한과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했던 것이 한국의 현실이었다.
사실 김영산 정권 때 북한과의 협상이 다소 소극적이었던 이유도 조지 부시 정권의 반발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빌 클린턴 정권이 들어서며 통일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이제 한국이 주도적으로 북한과 협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년에는 제가 북쪽으로 올라가서 김일성 주석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것인데, 어쩌면 정말 통일이 가능할 거 같기도 합니다. 물론 제 임기 내에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이야기가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년에 남북 정상 회담을 한다면 김태중 대통령의 말처럼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 같았다.
물론 김일성의 남은 날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한성 회장님께 한 가지 섭섭한 게 있습니다.
“섭섭한 거라면?”
-저도 김영산 전 대통령처럼 이한성 회장님께 조언을 받고 싶은 적이 많은데, 매번 청와대 초청을 피하시더군요.
“죄송합니다. 저야 김태중 대통령님의 경륜을 믿고 그런 겁니다. 호사가들에게 괜히 이야깃거리를 주고 싶지 않기도 했고 말입니다.”
-회장님이 조언을 해 주셨다면 재벌 개혁과 관련해서 더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지금도 잘 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 기업인에게 재벌 개혁과 관련해서 좋은 말을 듣는 건 처음인 거 같습니다.
“저는 한국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개선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김태중 대통령님의 업적을 높게 평가합니다.”
미래를 아는 나니까 할 수 있는 평가였다.
물론 IMF가 예정된 미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비판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이한성 회장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위안이 됩니다.
“국민들이 대통령님의 업적을 알아주는 날이 곧 올 겁니다.”
-오늘 전화를 드린 거는 회장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함이었는데, 회장님과 전화하니 감사한 마음이 오히려 더 커진 거 같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실제로도 이번 정권에서는 내가 한 일이 많이 없었다.
그저 뒤에서 어부지리를 보는 일이 많았으니까.
-국방에 크게 이바지하셨고, 그 어떤 외교관보다 나라의 외교에 보탬을 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미래 그룹과 은성 그룹의 자산을 인수하여 최악의 사태를 막아주시기도 했고 말입니다.
뭐 그렇게 말하니 내가 한 일이 아예 없지는 않은 거 같았다.
딱히 김태중 정권을 위해 한 일은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아,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은 거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쁘신 분인데.
“아닙니다. 대통령님에게는 언제든 시간을 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청와대에도 찾아오고 그래 주세요. 이한성 회장님의 조언을 듣지 못해서 답답한 점이 많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하, 통화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즐거운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대통령님도 즐거운 저녁 되십시오.”
김태중 대통령과의 전화가 끝나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청와대의 초청을 계속 거절해서, 어지간히 나에게 서운한 것이 많은 듯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뒷말이 나올 걸 뻔히 아는데 굳이 청와대를 갈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도 혜성 공화국이란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김태중 대통령과 독대하여 국정에 개입한다는 소문까지 나돈다면 혜성 그룹에 이로운 것이 없었다.
‘이제는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무언가를 설득하기보단 다른 수단을 써서 내 뜻에 따르게끔 유도해야겠지.’
물론 지금의 김태중 대통령처럼 혜성 그룹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한다면 크게 개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