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마음에 듭니까?
재벌 개혁을 진행할수록 국정 수행 지지율은 나날이 떨어졌다.
기업들이 투자를 줄임으로써 취업률이 떨어지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행정부에서조차 ‘성급했다’라는 여론이 나오고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혜성 그룹이 나서주어 다행이야.”
김태중 대통령은 쓰게 웃었다.
이번에도 혜성 그룹의 도움을 받았다.
혜성 그룹이 은성 그룹과 미래 그룹의 자산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두 기업이 지금보다 더 큰 위기를 겪었을 터.
정부의 입장에서는 혜성 그룹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혜성 그룹이야 본인들을 위해 두 그룹의 자산을 인수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은성 그룹과 미래 그룹의 위기는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닙니다.”
“역시, 반도체 때문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나마 은성 그룹은 조금 나았다.
부채가 상당했던 은성화학을 혜성 그룹에 매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래 그룹은?
미래 그룹의 부채와는 전혀 상관이 없던 한국 이통사 지분만 매각했을 뿐이었다.
현금을 일부 얻었다지만, 미래 그룹의 부채 비율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였다.
“특단의 조치를 사용할 수밖에 없겠군.”
다른 기업들도 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래도 우선순위를 두자면 빅4 기업인 은성 그룹과 미래 그룹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두 기업 중 한 곳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김태중 대통령은 탄핵당해도 할 말이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어설픈 조치를 취해 봐야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특단의 조치라면 빅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중근 비서실장의 물음에 김태중 대통령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빅딜.
본래는 ‘큰 거래’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였지만, 김태중 대통령은 기업 구조조정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사용하였다.
사실 지금까지는 이 단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적은 없었다.
빅딜을 실행에 옮길 경우, 재계의 반발이 얼마나 거셀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벌 개혁의 후폭풍이 예상했던 것보다 컸기 때문에, 김태중 대통령도 특단의 조치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래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와 은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를 합병하면 두 그룹 모두 경제 위기를 해소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개혁을 원 상태로 돌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니 빅딜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었다.
* * *
“은성화학 직원들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내 물음에 하운철 부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제가 다 황당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습니다.”
“분위기가 좋다면, 긍정적인 일인데, 황당할 거까지 있습니까?”
“허허, 은성 그룹이라면 혜성 다음으로 복지나 월급이 괜찮은 기업인데, 혜성 그룹의 직원이 되었다고 저리들 기뻐하니, 저로선 황당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하운철 부회장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사실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제는 한국대 졸업생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입사해야 하는 기업이 혜성 그룹이었다.
현재 혜성은 미국, 일본, 유럽 인재뿐만이 아니라, 인도의 IT 인재들까지 대거 흡수하고 있었다.
세계의 이름난 명문대 졸업생들도 혜성 그룹을 입사하고자 하는 상황이었으니, 혜성 그룹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빅4 중의 하나인 은성 그룹 직원이라고 이 같은 혜성 그룹의 인기를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한국인이었기에 더욱더 잘 알고 있을 터.
“다만 임원들의 분위기는 썩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몇 번 면담했는데, 하나같이 울상을 하고 있더군요.”
“그렇습니까?”
그 또한 예상했던 일이었다.
혜성은 직원도 쉽게 뽑지 않지만, 임원은 더더욱 까다롭게 뽑는 기업이었다.
혈연, 지연, 학연.
다른 기업이라면 모를까, 혜성에서만큼은 이 모든 게 부질없었다.
임원을 뽑는 것은 전적으로 내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오직 능력을 보고 뽑았기에 은성화학 임원들로선 아마 지금쯤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미 혜성 그룹은 인수한 기업의 임원들을 대거 구조조정을 한 전적이 있었으니, 그들로선 절대 안심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능력이 없으면 배제해야지. 물론 비리를 저질렀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임원으로 승진시킬 능력 있는 직원이 넘쳐 나는 데 굳이 문제 있는 임원을 남겨둘 필요는 없었다.
내가 은성 그룹이나 정부의 눈치를 봐서 그들의 사람을 임원에 꽂아줘야 하는 상황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본인의 능력에 자신이 있으면 살아남을 텐데, 울상을 짓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은성화학엔 인재가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허허, 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요.”
“아무튼, 은성화학은 계속해서 부회장님이 신경 써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 재편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빅딜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는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내 대답이 의외였던 것일까?
하운철 부회장이 눈을 크게 떴다.
사실 재계 인사들이라면 정부에서 진행하는 빅딜에 관해 좋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정부가 개입하여 대기업 간에 계열사를 맞교환하게 하는 것이니, 좋게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왕주형 총재의 경우 ‘기업 맞바꾸기가 장난감 바꾸기냐?’며 비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너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해서, 어떤 식으로든 교통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당하는 입장이었으면 나 역시 유감을 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혜성 그룹에 빅딜을 강요할 가능성은 절대 없었다.
애초에 정부의 협박은 은행 여신을 근거로 할 텐데, 나는 꼭 한국의 나야 꼭 한국의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아도 돈을 구할 방도는 많았기에, 협박이 통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허허, 그렇습니까?”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미래 반도체와 은성 반도체를 합병하는 것일 텐데, 대통령의 의도가 통하기만 한다면 국가 차원에서는 중복 투자를 줄이는 셈이니 나쁘지만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혜성 반도체의 강력한 경쟁자가 생기게 되는 셈이겠군요.”
“두 기업이 합쳐봐야 우리를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두 기업 모두 반도체 시장에서는 한참 뒤처져져 있는 기업들이었다.
둘이 합쳐봐야 D램 반도체 1위인 우리를 위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기업이라면 충분히 위협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제가 하운철 부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빅딜이야 솔직히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내 사업하기도 바쁜 사람이었으니.
그렇기에 나는 빅딜에 관한 이야기를 중단하고는 새로운 화제를 꺼내 들었다.
“기업을 하나 인수할까 합니다.”
“은성화학을 인수하면서 부채 비율이 올라갔는데, 괜찮겠습니까?”
“혜성 그룹의 규모가 규모인데, 은성화학 하나 인수했다고 부채 비율에 큰 변화가 있겠습니까?”
“허허, 그건 그렇군요.”
“참고로 제가 인수할 기업은 외국 기업입니다.”
“외국 기업이라. 정부가 좋게 보지는 않겠군요.”
“정부야 좋게 보지 않겠지만, 하운철 부회장님은 좋게 보실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하는 외국 기업이란 포르쉐를 말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
하운철 부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포르쉐를 인수한단 말씀입니까?”
“제가 부회장님을 영입하면서 약속드렸지 않습니까. 스포츠카 제조업체를 반드시 인수하겠다고요.”
“그게 포르쉐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허허.”
“마음에 듭니까?”
“물론입니다. 당장에라도 함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흥분하지는 마십시오. 저희가 포르쉐를 인수하기로 계획했다고 해서 반드시 인수에 성공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었다.
무려 스포츠카의 명가인 포르쉐를 인수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독일인들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아무리 포르쉐의 사정이 심각하다고 해도 사업을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수가를 압도적으로 높게 부른다면? 그때도 과연 자존심을 지키려 들까?’
자금도 넉넉하니 일단 최선을 다해 인수해 볼 생각이었다.
뭐 끝까지 매각을 거절한다면 그때야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겠지만 말이다.
* * *
1980년대 중반부터 포르쉐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미국 시장에 의존하는 경영방식 탓에 환율의 하락으로 큰 손해를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부채만 세 배 가까이 늘어, 현재는 부채가 40억 마르크에 달할 정도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포르쉐의 부채는 늘어만 갔다.
하지만 포르쉐 경영진은 이런 상황에서도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C88만 출시한다면, 빚이야 몇 년 안에 바로 갚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요. 중국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10억이 넘지 않습니까? 연간 30~50만 대를 판매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저는 100만 대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렴하면서도 중국에 딱 맞게 설계된 차이니, 프로젝트 이름처럼 중국의 국민차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국이 시장을 개방하면서 세계의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 시장을 탐욕스럽게 바라봤다.
인구만 10억이 넘는다고 알려진 중국이었다.
물론 인구도 비슷한 인구를 가졌지만, 중국의 경우 일부 기간산업을 제외하고는 특정 산업에 대해 기업들의 참여를 제한하는 규제가 없었다.
기업들의 입장에서 사업하기 더 좋은 나라는 중국이었던 것이다.
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중국 시장을 탐냈는데, 포르쉐라고 다르지 않았다.
포르쉐는 오히려 어떤 기업보다도 저돌적으로 중국 시장에 진출하였다.
중국의 ‘국민차 공개입찰’ 사업에 참여한 것이다.
스포츠카 회사지만, 포르쉐는 소형차에 대한 노하우도 상당하였다.
실제로 포르쉐는 불과 몇 개월 만에 중국 정부의 구미를 맞춘 차량을 개발해냈을 정도였다.
그렇게 중국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얻은 포르쉐는 가장 먼저 C88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중국(China)을 뜻하는 알파벳 ‘C’에 중국에서 행운의 숫자로 여겨지는 8을 두 개 더한 이름인 C88은 포르쉐 경영진의 상당한 기대와 관심을 받고 있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구조로 단가를 낮추었고, 중국인들의 구미에 맞춘 디자인을 더 하였다.
디자인, 성능, 그리고 가격까지.
모든 게 딱 들어맞았다.
여기에 포르쉐의 명성까지 더해진다?
이건 실패하고 싶어도 절대 실패할 수가 없는 사업이었다.
어쩌면 전 세계의 매출보다 중국 한 곳에서의 매출이 더 높게 나올 수도 있으리라.
포르쉐 경영진은 그 같은 기대를 하며 C88 출시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다름이 아니라, 중국 정부에서 돌연 국민차 프로젝트를 취소한 것이다.
“아니! 인제 와서 프로젝트를 출시하면 C88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프로젝트가 취소되었으니, 당연히 C88도 출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C88을 어떻게 준비했는데! 이렇게 한 대도 팔지 못하고 포기해야 한단 말입니까?”
“중국 정부에 놀아난 겁니다. 저들은 애초에 우리와 함께 사업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저 우리의 기술만 원했을 뿐!”
“아직 포기하긴 이릅니다. 중국 기업과 합작하면 사업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당하고도 모릅니까? 중국 기업과 합작해봤자, 기술만 도둑질당하고 쫓겨날 겁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실로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열심히 중국인들의 국민차가 될 만한 자동차를 개발했건만, 개발이 끝날 때가 오니 돌연 프로젝트를 취소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포르쉐가 중국 정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대는 정부였고 그들은 일개 기업일 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