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이긴 거 같은 기분이 들어
구혁재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혜성 그룹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혜성 반도체 때문에 가전에서 잘나가고 있는 은성 전자가 적자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반도체 사업부를 팔아버리고 싶을 정도야.’
일성이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한 이유를 알 거 같았다.
분명 반도체가 그룹의 미래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당장 적자를 생각하면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정부의 조치로 부채 비율까지 낮춰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은성 그룹의 사정은 더욱더 악화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계열사를 매각해야 한단 말인가.’
은성 그룹은 비교적 선택과 집중을 잘한 편이었다.
즉, 무지성으로 문어발 확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 보니, 매각할 계열사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현금이 귀한 상황이라 제값을 받을지도 의문이었고 말이다.
-구혁재 회장, 안 좋은 소식 하나 전해 줄 게 있다.
어떤 자산을 매각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구혁재 회장에게 미래 그룹의 왕재구 회장이 전화를 걸었다.
“안 좋은 소식?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구 회장도 알겠지만, 지금 미래 그룹의 사정이 말이 아니야.
“사정이 안 좋은 것은 알고 있지. 우리도 별로 좋지는 않아. 아니, 모든 기업이 마찬가지 아닐까? 물론 혜성은 예외겠지만 말이야.”
-그중에 우리가 가장 심각하지. 부채 비율도 가장 높고 그룹의 덩치도 가장 크니까 말이야.
“뭐, 그렇게도 볼 수는 있겠지.”
미래 그룹의 사정이 심각한 거야 구혁재 회장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상관하지는 않았다.
한국 이통사를 인수할 때 잠시 힘을 합치긴 했지만, 결국 그와 왕재구 회장은 경쟁하는 관계였으니까.
-아무튼, 미래 그룹의 사정이 어려워서 특단의 결정을 내릴 거야.
“그 특단의 결정이 뭔데?”
-미래 그룹이 보유한 한국 이통사 지분을 혜성에 매각할 생각이다.
왕재구 회장의 그 같은 말에 구혁재 회장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렵게 인수한 한국 이통사 지분을 매각한다니!”
-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그룹에 돈이 없다고, 돈이!
반도체 때문에 미래 그룹의 자금 사정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2천억이나 써가며 한국 이통사 지분을 인수했으니, 미래 그룹의 자금 사정은 최악을 넘어 도산 위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다른 자산을 매각하면 되는 거잖아!”
-매각하고도 부족하니까, 한국 이통사 지분까지 매각하는 거야.
“혜성이 제값도 안 쳐줄 텐데 굳이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미래 상선의 선박 70척과 미래 건설에서 소유한 삼성동 빌딩 한 채를 넘겨주는 것으로 2천억 받기로 했다. 그러니 더 말하지 마.
구혁재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혜성 그룹은 그야말로 가만히 있다가 어부지리를 본 꼴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점은 혜성 그룹이 한국 이통사의 2대 주주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혜성 그룹이 이동통신 산업에 진출하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막았건만 그 모든 게 헛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할 이야기는 다 전했으니 이만 끊는다.
전화가 끊기자 구혁재 회장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혜성 그룹에 대드는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이라도 다시 친한 척을 한다면 이한성 회장이 받아 줄까?’
뻔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현금이 귀한 상황에서 혜성 그룹과 반목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애초에 대놓고 혜성 그룹과 적대적인 포지션을 잡은 것이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 * *
왕재구 회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악수를 하였다.
기껏 인수한 한국 이통사 지분을 상선 70척, 빌딩 하나까지 얹혀서 똑같은 가격에 되팔아야 하니, 그로선 씁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실무진끼리 나누라고 하고, 저는 일이 바빠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나와 한자리에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지, 왕재구 회장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갔다.
물론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한국 이통사의 지분을 여러 자산에 얹혀서 인수한 이상, 나도 미래 그룹에 더 볼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 정도 지분만 있어도 이통사에 갑질 당할 일은 절대 없겠어.’
통신사의 힘은 막강하였다.
휴대폰 제조 기업을 상대로 갑질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였다.
미래 그룹과 은성 그룹이 합쳐진 통신사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미래 그룹이 보유한 지분을 인수함으로써 미래 그룹과 은성 그룹의 카르텔은 깨지게 되었다.
애초에 나부터가 한국 이통사의 대주주였고 말이다.
“회장님.”
“무슨 일입니까?”
“은성 그룹의 구혁재 회장께서 방문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구혁재 회장이 말입니까?”
유한새의 말을 듣고 나는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구혁재 회장인가?’
확실히 대기업들의 상황이 심각하긴 심각한 모양이었다.
엉덩이가 무거운 빅4 그룹의 총수들까지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면 말이다.
‘운이 좋으면 아예 한국 이통사 지분 전체를 값싸게 인수할 수도 있겠는데?’
구혁재 회장이 나를 찾아오는 이유는 아마 왕재구 회장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돈이 급한 상황이니, 그나마 제값을 쳐 줄 거 같은 나에게 자산을 매각하려고 하는 것일 터.
그리고 구혁재 회장이 매각할 자산은 가장 최근에 인수한 한국 이통사 지분이 유력하였다.
이미 미래 그룹이 보유한 한국 이통사 지분도 인수한 바 있으니, 은성 그룹 역시도 한국 이통사 지분을 매각하려고 할 가능성이 컸다.
“어서 오십시오, 구 회장님.”
다음 날.
나는 구혁재 회장을 그룹 사옥으로 초대하였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오신 거 아닙니까?”
“하, 하. 죄송합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구혁재 회장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소파를 가리켰다.
“죄송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 앉으시죠. 차는 곧 나올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쭈뼛하게 소파로 향하는 구혁재 회장이었다.
나는 차가 나오자, 구혁재 회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급하게 찾아오신 걸 보면 중요한 용건이 있으신 거 같은데,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한 가지 제안과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이한성 회장님을 찾아뵀습니다.”
“부탁과 제안이라. 일단 제안부터 들어보고 싶군요.”
“미래 그룹이 보유한 한국 이통사 지분을 인수하실 정도면, 혜성 그룹은 자금의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금의 여유라.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혹시 은성 그룹의 계열사를 인수하는 것에 흥미 없으십니까?”
“어떤 계열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한국 이통사 지분을 거론할 줄 알았는데, 구자성 회장의 입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혜성 그룹에 은성화학을 매각하고 싶습니다.”
“은성화학이라.”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은성 그룹에서 인수할 수 있는 계열사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좋은 매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은 채 물었다.
“인수가는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한성 회장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으면 절대 매각할 회사가 아닙니다. 매년 성장을 거듭해왔고 앞으로의 잠재력도 무궁무진한 기업입니다.”
그거야 나도 다 아는 이야기였다.
내가 그의 매각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지 않은 이유도 은성화학이 무척이나 탐이 났기 때문이었다.
‘경제적 불황과는 상관없이 매년 흑자를 기록할 회사지.’
화장품과 치약, 플라스틱 가공품 등, 은성화학의 직원조차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정보전자소재 사업, 전지 사업, 의약품 사업 등.
앞으로 치고 나갈 사업도 다양하였다.
‘이런 기업을 매각하려 하다니. 은성 그룹의 사정이 급하기는 한 거 같군.’
물론 한국 이통사를 끝까지 지키려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저울질을 한 결과일 것이다.
내가 은성화학의 가치를 높게 쳐줄 것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뭐, 인수할 기회가 생긴 이상, 인수하는 게 좋겠지. 은성 그룹이 부도날 일은 없으니, 은성화학을 인수할 기회도 지금밖에 없을 거야.’
부채 비율이야 높다지만, 가치 있는 자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은성 그룹이었다.
“인수가로 5천억을 제시하겠습니다.”
나는 더 재지 않고 인수가를 제시하였다.
그러자 구혁재 회장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은성화학의 가치를 생각하면 5천억은 너무 적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7천억은 받아야 할 거 같습니다.”
“일시금으로 지급한다면 어떻습니까?”
내가 요긴하게 잘 써먹었던 일시금 계약.
한동안은 다른 기업들도 현금이 많아져서 크게 써먹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어느 때보다 현금이 귀해진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5천억을 한 번에 지급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계약한 날로부터 일주일 안에 지급하겠습니다.”
구혁재 회장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현금 동원력에 새삼 놀라는 모양이었다.
‘하긴, 미래 그룹에 2천억을 쓴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바로 5천억을 쓴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겠지.’
나야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사내 보유금만 1조가 넘게 쌓여 있었으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보유한 현금도 결코 적지 않았고 말이다.
“어떻습니까?”
“조, 좋습니다. 회장님의 조건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은성화학을 단돈 5천억에 얻다니.
몇 년 뒤에는 은성화학의 화장품 사업부 하나만으로도 5천억 이상의 가치를 기록할 것이니, 나로서는 엄청난 이익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부탁이란 것은?”
인수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나는 다른 용건을 물었다.
“반도체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단가를 다시 올려달라는 부탁이라면, 구혁재 회장님의 부탁이라도 절대 들어줄 수 없으니, 이 사실을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
구혁재 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내 말에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쯧. 아무리 급하다지만, 경쟁 기업에 이런 부탁을 하려 하다니.’
뭐, 그가 직접 입을 열었다면,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서 단가를 낮춰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했을 것이다.
재벌 총수 중에서 구혁재 회장의 말재주는 상당한 편에 속했으니까.
하지만 나로서는 은성 그룹에서 어떤 이유나 조건을 거론해도 반도체 단가를 올리자는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도체 시장에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절대적인 강자로 자리 잡을 기회는 지금뿐이었으니 말이다.
“혹시 다른 부탁이 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바쁘실 텐데, 이만 일어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내 말에 구혁재 회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떠나기 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같이 물었다.
“혹시 한국 이통사를 인수한 일에 마음이 상하셨다면, 늦었지만 사죄드리겠습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사과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애초에 미래 그룹이 보유한 지분을 인수한 시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과인데 말이다.
“저는 그 일에 관해서는 구혁재 회장님께 어떠한 유감도 없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그래도 한국 이통사를 원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니, 사정이 어려워지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제 가격에 인수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얼굴로 물러나는 구혁재 회장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은성 그룹과는 따로 다툰 적이 없었지만, 뭔가 승리를 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