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어쩌면 IMF가?
의외로 얼마 지나지 않아 김태중 대통령의 의중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게 아니라, 청와대에서 김태중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이한철 명예 회장이 내게 이야기를 전해 준 것이다.
“대통령이 마음을 굳게 먹은 거 같다. 나와 독대하는 한 시간 내내, 재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더구나.”
“외교 문제도 적당히 해결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재벌 개혁을 진행하려는 모양이군요.”
러시아와의 항모 계약으로 시작된 일본의 외교 도발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미국이 개입하자, 깨갱깨갱하고 물러난 것이다.
중국 역시도 20, 30년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감히 미국에 맞서 싸울 레벨이 아니었기에, 언제 시끄럽게 굴었다는 듯 조용해졌다.
“그래서 아버지는 대통령에게 어떤 대답을 하셨습니까?”
“원론적인 답변만 했다. 꼭 필요한 일이지만, 후폭풍이 걱정이라는 식으로 말이야. 그랬더니 대통령도 별다른 요구는 하지 않고, 그저 전경련 차원에서 반발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더구나.”
“한마디로 중립을 지키라는 의미군요.”
“그래.”
“우리로선 크게 손해 볼 일은 없겠습니다.”
“다만 다른 기업들이 전경련을 안 좋게 볼까, 그게 걱정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정부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재벌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데, 굳이 우리가 나서서 피를 볼 필요는 없었다.
이제 전경련 회장직을 넘겨줄 시기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그 정도야 크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지금까지 전경련을 잘 이끄셨지 않습니까? 앞으로의 일은 차기 회장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내 말에 이한철 명예회장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나나 혜성 그룹이 피해를 보지는 않을지 걱정했던 모양이다.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유 회장이라면 정부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할 것이니, 개혁은 그대로 진행되겠구나.”
“아무래도 그렇겠죠.”
“네 얼굴을 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물론입니다. 김태중 대통령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아버지께서 워낙 증여와 관련한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해서 문제 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한철 명예 회장은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든든하구나.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다오.”
“가시는 겁니까?”
“나도 내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 은퇴할 때 은퇴하더라도, 마무리는 확실하게 해야지.”
“들어가십시오.”
“은퇴하고 나면, 가끔 찾아오마.”
“예. 자주 찾아오셔도 됩니다.”
그렇게 이한철 명예회장이 물러나자, 나는 혼자 생각했다.
‘재벌 개혁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IMF가 안 올 수도 있겠는데?’
IMF의 발생 원인 중 반도체 불황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사실 재벌들의 방만한 경영이 주된 원인 중의 하나로 봐야 했다.
대기업의 평균 부채 비율이 500%가 넘으니 현금 조달이 조금이라도 어려워지면 도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한 곳이 도산하면 도미노처럼 도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고 말이다.
그런데 김태중 대통령의 재벌 개혁으로 대기업의 재무구조가 조금이나마 건전하게 바뀐다면 경제위기는 올 수 있어도 IMF 같은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 *
<이번만은 대기업들이 적당한 구조조정은 안 된다. 대기업들은 우리와 합의한 대로 개혁에 노력해야 한다.>
김태중 대통령은 언론을 통해 재벌 개혁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번만큼은 진심이라는 듯, 말로 선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이었는데, 부채 비율이 과도한 재벌 총수 몇 명을 청와대로 불러 강하게 압박했을 정도였다.
“빌어먹을!”
저택으로 돌아온 왕재구 회장은 화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쾅!
손에 자국이 생겼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분노한 것이다.
“돈이 없으면 주력 기업 3, 4개만 남기고 정리하라니. 대통령이라는 자가 어찌 그리 무식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만 여유롭게 준다면야 부채 비율을 낮추는 것쯤,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미래 그룹의 부채 비율이 600%가 넘는다지만, 미래 그룹의 역량이라면 그 정도 부채는 충분히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태중 대통령은 오래 기다려 주지 않았다.
무조건 1년.
부채 비율을 1년 이내에 400% 이하로 만들지 못하면 각오하라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이다.
‘만에 하나 우리가 무너지면 바로 정권이 바뀔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예전이었으면 ‘우리가 무너지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 그룹 위에 혜성 그룹이 있는 지금의 상황에선 그런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거라고만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미래 그룹이 이번 조치로 큰 타격을 입는다면, 여당의 지지율은 크게 하락할 것이 분명했다.
미래 그룹의 종업원이 수십만 명인데 이들의 가족까지 포함하면 표가 상당했으니 말이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은 투자를 더 늘려서 혜성 그룹을 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부채 비율을 400% 미만으로 만들려면, 투자를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투자를 줄이고 자산을 매각해야 했다.
이는 왕재구 회장으로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대기업 회장들과 모임을 했다.
“이한성 회장은 안 오는 겁니까?”
“올 리가 없지 않을까요. 거기는 부채도 적지 않습니까.”
“하아. 전경련 회장이 이리도 책임감이 없어서야.”
“이한철 명예 회장도 곧 임기가 끝나니, 저러는 거 같습니다.”
“정우 그룹의 권 회장도 안 보이는데, 무슨 일이랍니까?”
“권 회장이야, 이한성 회장과 관계가 돈독하지 않습니까. 혜성 그룹의 자금을 빌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면 누가 앞장서야 한다고 봅니까? 한국은행 출신인 유 회장에게 앞장서 달라고 해봐야 의미가 없을 텐데.”
“재계 1위가 부재하면 재계 2위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어차피 미래 그룹은 왕 총재님 때문에라도 정부와 친해질 수 없을 텐데, 이럴 때 앞장서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왕재구 회장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뭐라도 하나 얻으려고 재벌 모임에 참석했더니만, 주는 것은 없고 오히려 짐만 얹으려 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재벌 모임을 박차고 나왔다.
아무리 대기업의 힘이 강해졌다지만, 혜성 그룹이 아닌 한, 정부에 대놓고 반기를 드는 행위는 피해야만 했다.
미래 그룹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쓸데없는 자산을 매각하며 시간을 버는 것밖에 방법이 없겠어.’
여러 방법을 구상했으나, 소득은 없었다.
정부의 의지가 굳건한 이상, 자산을 매각해서라도 부채 비율을 낮춰야만 했던 것이다.
‘내 대에 혜성 그룹을 넘어서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군.’
혜성 그룹을 넘어서기는커녕 과연 재계 서열 2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인 상황이 되었다.
* * *
혜성 해운의 규모를 키우겠다는 내 계획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회로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다.
“미래 상선에서 선박을 대거 매각한다는 말씀입니까?”
“예. 미래 그룹은 정부의 압박으로 부채 비율을 줄이고자 자산 매각을 시행하고 있는데, 미래 상선의 경우 선박을 매각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습니다.”
김태중 정권은 재벌 개혁을 밀어붙였다.
이를 재벌정책 5원칙이라고 하였는데, 기업 경영의 투명성 제고와 상호채무보증의 조기 해소, 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핵심 부문의 설정과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 강화 등이었다.
그리고 이 중에 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이 바로 부채 비율을 의미하였다.
정부에서 강권한 대기업의 부채 비율은 400%.
사실 400%도 선진국과 비교하면 대단히 많은 수준이었다.
미국은 149% 일본 182%, 독일 99%, 대만은 86%였으니까.
하지만 이건 선진국 기준이었고, 한국의 경우는 부채 비율이 엄청났다.
미래 그룹만 해도 무려 628%.
정우나 은성도 각각 474%, 539%의 부채 비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재벌정책 5원칙은 혜성 그룹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혜성 그룹은 부채 비율이 선진국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설령 기준을 200%로 잡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 그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정책이었는데, 이게 또 나에게 기회를 가져다주는구나.’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처음에는 그저 IMF를 예방한다고 생각하며 넘어갔었다.
전경련에서야 말들이 많았지만, 꼭 필요한 조치니, 혜성 그룹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태중 대통령이 진행하는 재벌정책이 이런 식으로 나에게 도움을 줄 줄은 몰랐다.
‘미래 상선뿐만이 아니야. 곧 다른 기업들도 자산을 매각하겠지?’
왕주형 총재 때문에 미래 그룹은 다른 기업보다 더 정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자산을 빠르게 매각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기업이라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임기 1년 차의 김태중 정권은 실로 무시무시한 추진력으로 재벌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혜성이 나선다면 모를까, 우리가 침묵하는 이상, 대기업이라고 버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아예 부도나는 기업이 생길 수도 있겠어.’
무리하게 자산을 매각해봤자, 그걸 인수할 수 있는 기업은 드물었다.
현금이 그 어느 때보다 귀한 시대가 온다는 뜻이었다.
자산 매각에 실패하면 자금 수급이 급격하게 어려워질 터.
그렇게 하나씩 자금이 막히다 보면, 은행 이자를 갚지 못하는 기업이 나올 수 있었다.
5공 시절의 세계 그룹처럼 겨우 몇백억의 현금이 없어서 조 단위 규모를 가진 기업이 도산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한국 이통사를 인수하지 않길 잘했군.’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동통신 산업의 미래 잠재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금을 아껴뒀던 과거의 내 판단이 지금 빛을 보는 거 같았다.
‘뭐 실상은 포르쉐를 인수하려고 현금을 아껴뒀던 거지만 말이야.’
* * *
정부가 발표한 재벌정책 5원칙으로 큰 피해를 본 것은 미래 그룹뿐만이 아니었다.
부채 비율이 539%에 달하는 은성 그룹도 서둘러 자산을 매각해서 부채 비율을 낮춰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김영산 정권도 이렇게 무식하게 일을 진행하지는 않았는데.’
구혁재 회장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보기에 정부의 정책은 그야말로 탁상행정의 표본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적정부채 비율이란 것은 법인소득세율과 파산위험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400%라고 딱 집어서 정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심지어 주어진 시간도 짧았다.
정부는 무조건 1년 안에 모든 기업의 부채 비율을 400% 미만으로 낮출 것을 지시하였다.
‘이러다 대기업 한 곳이라도 부도난다면 그 후폭풍을 어떻게 견디려고 저러는 건지.’
한성이야 미래에 올 IMF를 적은 피해로 막았다며 높은 점수를 주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국민 여론도 벌써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는데, 재벌 개혁의 강도가 지나치다는 여론이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물론 구혁재 회장이 김태중 정권을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은 은성이 더 급한 상황이었으니까.
“미래 그룹처럼 자산을 매각해야 하나?”
한창 성장해야 할 때, 투자를 줄이는 결정을 내리기도 쉽지 않은데, 어렵게 키운 그룹의 자산을 매각해야 한다니.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은성 그룹이라고 뚜렷한 방법이 있지는 않았다.
539%에 달하는 부채 비율을 줄이려면 결국 자산을 매각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원래도 부럽지만, 이런 상황이 되니 혜성 그룹이 더 부러워지는군.’
자금도 넘쳐나는데 심지어 부채 비율도 낮았다.
그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혜성 그룹의 부채 비율은 400%는커녕 200%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들었다.
남들이 급히 자산을 매각할 때, 혜성 그룹은 오히려 자산을 인수하여 그룹의 규모를 더 불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이한성 회장이 괜히 김태중 대통령을 도운 게 아닌 모양이야. 이런 식으로 김태중 정권의 최대 수혜자가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