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재벌 개혁이라
(역시 미국 대통령을 뒷배로 두니, 일본의 발악도 미약하기 그지없구나.)
노사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히 성가시게 굴었는데, 일본의 발악이 미약하기 그지없다니요.”
(빌 클린턴이 뒤에 없었으면 일본이 저 정도의 도발로 끝났겠어? 지금의 일본이라면, 해군을 동원하여 독도 도발이라도 했을 거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 나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격렬하게 반대하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 노사의 말도 일리가 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조지 부시 정부였으면, 진짜 일본이 해군을 동원할 수도 있었겠지?’
딱히 조지 부시라고 일본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을 아시아의 강국으로 인정하며, 상당히 배려해 주는 편이었다.
만약 일본에서 강하게 반발했다면, 조지 부시 정부는 일본의 의도대로 한국을 강하게 압박했을 것이다.
(아무튼 네가 러시아까지 설득했다고 하니, 항공모함을 들여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
“예. 항모를 해체하는 일로 환경단체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기는 한데,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거 같습니다.”
(항모에 미사일까지. 네 덕에 대한민국은 엄청난 군사 강국이 되겠구나.)
“미래의 중국을 생각하면 턱없이 모자란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십수 년만 더 주어졌다면, 미국과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거라는 게 노사가 평가한 미래의 중국군이었다.
미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이 정도 평가도 엄청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내가 미사일과 항공모함만으로는 부족하게 여기는 것이다.
(중국이야, 통일하여 북한 지역에 미군을 주둔하게 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데, 과연 통일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이다.
역사가 바뀌었지만, 통일은 여전히 요원하게 느껴졌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김일성, 김정일이었어도 통일을 과연 할까 싶었다.
절대 권력을 자랑하고 있는데, 한국과 통일하면 어떤 식으로든 권력을 내려놓아야 할 테니 말이다.
“김태중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나는 회의적이구나. 김태중이가 북한에 농락당하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싶다.)
“전에는 김일성이가 조금 더 늦게 죽는다면 통일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주장한 학자가 있다고 했지, 내가 그럴 거라고 하지는 않았다.)
“노사께선 더는 통일을 기대하지 않는 모양이군요.”
(김영산 정권 때, 보다 적극적으로 남북 관계를 발전시켰다면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벌써 1993년이 되었어. 김일성이 죽을 때가 다 된 거야. 권력밖에 모르는 김정일 그놈이 북한의 수령이 된다면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혜성의 영향력이 영향력인 만큼, 내가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면 한반도의 역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역시 통일이란 것은 쉬운 것이 아닌 듯싶었다.
‘통일이 안 되면 어떻게든 미군의 주북 주둔이라도 끌어내야 할 텐데.’
꼭 통일할 필요는 없었다.
북한이 시장 개방을 하여 북한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고, 군사적으로 남북이 적대하지 않기만 해도 한국에서 사업하는 것에 대한 위험 부담은 크게 사라진다.
이른바 북한 리스크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실로 엄청난 이점이었으니, 통일이 불가능하다면 북한의 시장 개방만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아무튼, 통일에 관해서는 내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마.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야.)
아무래도 노사는 북한을 직접 방문할 생각인 듯싶었다.
귀신의 몸으로 북한의 사정을 살피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었으니까.
하여 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통일 문제와 관련해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했고.
(그나저나 너를 향한 민심이 아주 좋아졌더구나. 누가 보면 네가 독립 운동이라도 한 줄 알겠어.)
“민심이요?”
(지지율이라고 해야 하나? 진짜 네가 대선에 나가도 당선될 가능성이 50% 이상은 될 거 같을 정도야.)
나는 피식 웃었다.
대선이라니.
내가 대선에 나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쨌든, 국민들이 나와 혜성 그룹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뭐 반대로 중국인이나 일본인은 나를 극도로 싫어하겠지만.’
일본에서는 혜성 그룹을 거의 한국 정부와 동일시하는 분위기였다.
당연히 혜성 그룹의 수장인 나를 김영산 전 대통령 이상으로 증오하고 있었고.
물론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일본이나 중국에서 크게 사업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혜성 그룹의 이미지가 좋아진 거 같긴 합니다. 새로 출시한 휴대폰만 봐도 모토로라를 상대로 압승하지 않았습니까?”
모토로라는 세계 1위의 휴대폰 기업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끈질기게 한국 시장에서 살아남았었다.
하지만 혜성 전자에서 얼마 전, 새로운 휴대폰 기종을 출시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10%를 유지하던 시장 점유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사업을 접어야 하는 수준까지 되고 말았다.
이게 다 소비자들이 모토로라 휴대폰을 사는 것을 매국, 혜성 휴대폰을 사는 것을 애국이라 여겨서 생긴 일이었다.
(휴대폰이라. 이제 휴대폰도 신경 써야 할 때가 됐구나.)
“예. 곧 CDMA 휴대폰을 출시할 텐데, 그때가 모토로라를 넘어설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TIA가 CDMA를 북미 표준으로 채택한 상황이었다.
이제 CDMA가 세계적인 기준이 될 터.
그런데 우리 혜성 전자는 CDMA 방식의 휴대폰을 몇 년에 걸쳐 연구하고 있었으니, 누구보다 CDMA 시대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CDMA의 개척자인 퀄컴의 대주주이기도 했고 말이다.
‘늦어도 내후년에는 휴대폰 시장의 절대 강자가 될 수 있겠어.’
모토로라를 넘어서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심지어 혜성 전자는 노키아의 통신 부문까지 흡수한 바 있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세계 1위가 될 잠재력을 가진 노키아의 통신 부문이 우리 혜성 전자의 것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일성 전자의 잠재력과 노키아의 잠재력을 합친 혜성 전자라면 휴대폰 시장에 장기 집권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리라.
(D램 반도체는 이미 1등이고, 휴대폰도 곧 1등에, 이제 남은 것은 가전과 자동차인가?)
“노사께서 원하시는 혜성 해운도 1등 기업이 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반도체나 자동차, 전자 사업에 비하면 크게 관심을 안 두고 있으면서 말은 잘하는구나.)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안타깝게도 노사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식을 똑같이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사람인 이상 매출이 잘 나오고 잠재력이 더 뛰어난 효자 기업을 더 챙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슬슬 해운 기업을 챙길 때가 되긴 했지.’
꼭 노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사도 노사지만, 해운 사업의 규모가 이제 무시 못 할 수준으로 커졌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었다.
만약 해운 시장에서 세계 1위가 된다면?
반도체를 마냥 부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5년마다 2배에 가깝게 성장할 정도로 해운 시장의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 * *
“회장님. 청와대의 전화입니다.”
임신하여 휴직 중인 이소희를 대신하여 수행비서 일을 수행하고 있는 유한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항모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자축이라도 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빈약한 해군을 가진 한국에서 항모를 보유한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전화를 받아보니 전혀 다른 용건으로 나를 찾고 있었다.
“경제적 자문 말씀입니까?”
-예, 그래서 말인데,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김중근 비서실장의 말에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정권 때도 김영산 대통령께 경제적인 조언을 한 적이 많았었다.
내 예측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김영산 대통령으로선 내 조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정권에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
김영산 정권 때야, 정권과 친하면 친할수록 이익이었기에 경제 자문 역할을 도맡아 수행하였었다.
딱히 정부의 특혜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원한 것은 그저 약간의 정보와 영향력 정도.
결과적으로 김영산 정권의 비호를 받은 혜성 그룹은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은 채 쑥쑥 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정치인조차 굽신거려야 할 정도의 레벨이 되었지.
그래서일까?
이번 정권에서는 지난 정권 때와는 사뭇 다른 포지션을 취할 계획이었다.
이한철 명예회장이 조언한 것처럼, 청와대와 가까운 모습을 보여줘 봐야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경제 자문 역할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김태중 대통령의 재벌 개혁 의지는 김영산 대통령보다 훨씬 강해.’
물론 정부에서 재벌 개혁을 한다고 해도 혜성 그룹으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개혁의 방향은 결국, 재무구조의 개선이나 경영진의 책임 강화 등일 텐데, 혜성 그룹은 부채 비율이 낮고 다른 재벌 총수들과 달리, 내가 압도적인 지분율을 가지고 있었기에 경영진의 책임 문제에 관해서도 자유로웠던 것이다.
뭐, 상속세나 증여세 같은 부분에서는 나도 슬슬 생각하기는 해야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재벌 개혁 의지가 강한 김태중 대통령이었기에 재벌인 나로서는 경제적인 조언을 해 주기가 뭐했다.
재벌 개혁이 나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재벌들과의 관계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요. 시간을 내주실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저 또한 재벌 총수입니다. 한 기업을 경영하는 재벌 총수로서 대통령께 경제적 자문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단호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김중근 비서실장이 잠시 침묵하더니, 별로 아쉽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한성 회장님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대통령께는 제가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영태 비서실장과는 완전히 딴판이군.’
김영산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고영태 비서실장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나를 설득하려고 했을 것이다.
내 조언이 국정 운영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태중 대통령의 비서실장인 김중근 비서실장은 한눈에 봐도 나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일개 기업인이 국정에 개입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 거 같았다.
‘이번 정권과는 유대감이 형성될 일은 없겠어.’
지난 정권 때는 사실 김영산 대통령뿐만이 아니라, 김영산 대통령의 측근들과도 상당한 친분이 쌓였었다.
김영산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과의 일이 있고 나서가 결정적이었는데, 오히려 김영산 대통령 측근들이 나와 친해지기 위해 안달을 냈었다.
하지만 이번 정권의 실세들은 아무래도 나와 인연이 아닌 듯싶었다.
뭐, 그래도 김태중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으니, 나중에 대통령이 직접 도움을 청한다면 조언 몇 마디 정도야 못 해줄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근데 궁금하긴 하군. 김태중 대통령이 어떤 게 궁금해서 나를 찾았는지 말이야.”
내 예상에는 재벌 개혁과 관련된 거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두고 봐야 알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