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미국이 누구의 편을 들까?
김태중 정권의 핵심 인물들은 혜성 그룹과 한성을 그리 고운 눈으로 보지만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혜성 그룹으로 인해 그들의 발언권과 영향력이 다소 감소하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김태중 대통령은 오랫동안 그를 모셨던 측근들보다 한성의 조언을 더 귀담아들을 정도였다.
“한 번쯤 제재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 생각에도, 혜성 그룹에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혜성 그룹은 커져도 너무 커졌습니다. 이병원 원내총무가 하는 짓만 보세요. 마치 혜성맨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지 않습니까?”
“여당의 원내총무라는 사람이 참으로 채신머리가 없는 거 같습니다.”
“그만큼 혜성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전경련의 수장이란 사실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앞으로 진행할 재벌 개혁에 있어서 혜성 그룹이 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혜성 그룹에 제재를 가하자였다.
물론 그들이 그런 결론을 내렸다고 정권 차원에서 바로 혜성 그룹에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작 수장인 김태중 대통령부터가 혜성 그룹을 제재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께서는 혜성을 진정한 애국 기업으로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애국 기업이라니. 혜성이 애국 기업이었으면, 공장을 한국에다 짓지, 러시아에다 짓고 미국에다 짓고 그런답니까?”
“뭐, 명분만 그런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혜성이 선거 때 도왔으니 그에 대한 보은으로 혜성을 치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혜성이 도대체 무엇을 도왔다는 건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선거 자금도 다른 기업에 비하면 아주 적게 지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마치 혜성이 공신처럼 취급받는 지금의 상황이 저 역시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반대에도 여전히 그들은 혜성 그룹을 제재해야 한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단순히 시기나 질투 때문이라면 단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중에 일부는 진실로 사명감을 갖고 혜성 그룹을 제재하고자 하였다.
김영산 정권 때, 혜성 그룹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것은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으니.
그러던 중, 혜성 그룹이 명분 하나를 제공해 주었다.
그 명분이란 다름 아닌, 반도체 단가를 파격적으로 낮춘 행위였다.
“이건 미래와 은성을 죽이기 위한 혜성의 술수입니다!”
“시장의 독점을 위해 후발주자를 말려 죽이려는데 이걸 정부에서 두고 봐야 하는 겁니까?”
“확실히, 시장의 공정성을 위해서도 혜성 반도체를 제재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태중 대통령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측근들은 더욱더 강경하게 혜성 그룹 제재를 주장하였다.
그러자 김태중 대통령의 고심도 깊어졌다.
* * *
“자네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김태중 대통령의 질문에 김중근 비서실장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야당에서도 그렇고, 언론에서도 그렇고 대통령님을 계속해서 혜성 그룹의 이한성 회장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누가 더 영향력이 강한지를 시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권위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제재를 해야 한단 말이야?”
“예.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정치 감각이 남다른 김중근 비서실장이었다.
그가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거론한 것은 실제로도 혜성 그룹의 영향력이 대통령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김태중 대통령으로선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혜성 그룹은 소련 과학자까지 데려와서 국방을 위해 사비로 미사일 연구를 시키는 애국 기업이거늘.’
물론 그렇다고 그의 측근들이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김영산 정권의 핵심 멤버들이야 임기 3년 차부터 점차 부정부패를 저지르기 시작했지만, 김태중 정권은 이제 임기 1년 차였다.
한창 사명감이 앞서 있을 시기이니,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들이 혜성 그룹을 경고한 것은 그만큼 혜성 그룹의 성장이 위협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대통령님. 혜성 그룹의 이한성 회장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한성 회장이?”
때마침 한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김태중 대통령은 눈을 빛내며 한성의 전화를 받았다.
“이한성 회장님,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대통령님. 혹시 우리가 항공모함을 보유할 기회가 생긴다면 대통령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뜬금없는 말이었기에 김태중 대통령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항공모함을 인수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항공모함을요?”
-아시겠지만, 러시아의 재정 상황은 대단히 열악한 상태입니다. 항공모함 유지비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다.
“그 말씀은 러시아의 항공모함을 인수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거의 고철값에 해당하는 인수가로 러시아 항공모함을 인수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대통령께서 허가를 내려주신다면 제가 직접 러시아 국방성과 담판을 지을 계획입니다.
“허어.”
한성의 말에 김태중 대통령은 탄성을 질렀다.
김영산 정권에서 계획만 세우고 시작도 못 한 것이 항공모함 도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설마 민간에서 항공모함 도입을 현실화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래도 혜성 그룹이 애국 기업이 아니라는 건가?’
소련이 건재하던 시절에 몰래 소련 과학자를 빼돌려 나라의 국방에 이바지한 것이 혜성 그룹이었다.
이번 항공모함 건도 혜성 그룹 차원에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행위였을 터.
애국심이 아니라면, 일개 기업에서 이 정도까지 할 일은 절대 아니었다.
“정부의 지원은 필요 없는 겁니까?”
-예.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면,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기에, 자체적으로 인수전에 개입할 계획입니다.
심지어 정부의 지원도 마다하였다.
한국 정부에, 그리고 김태중 대통령에게 부담이 갈 수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말이다.
“또다시 혜성 그룹에 은혜를 입게 되겠군요.”
김태중 대통령으로서는 진심으로 한성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기업도 하지 않은 헌신적인 희생이었으니까.
-반드시 인수에 성공하리란 법은 없습니다. 저희 말고도 무려 30여 개의 나라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설령 인수에 실패한다고 해도 실망하지는 않겠습니다.”
-대통령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희가 항공모함 인수에 성공한다면 일본과 중국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에 김태중 대통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2차 대전 때 만들어진 기어링급이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것이 한국 해군의 현주소였다.
육군, 공군에 비해 낙후되어 있던 한국 해군이었는데, 그런 한국 해군에 갑자기 항공모함이 도입된다면 주변국으로선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일본의 경우,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경제 발전하는 모습을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일본이었으니까.
“자주국방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외교 마찰은 감수할 수 있습니다.”
내년이라면 위험했을 수도 있다.
일본과 외교 마찰은 이미 김영산 정권에서도 경험했듯, 지지율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니까.
하지만 임기 1년 차인 지금이라면?
일본과의 외교 마찰도 충분히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러시아의 항공모함을 인수하는 것에 총력을 다하겠습니다.
“예. 불발에 그쳐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니,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 주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김태중 대통령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혜성 그룹을 제재하는 일은 역시 고민할 가치도 없었군.’
측근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더는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혜성만큼의 애국 기업은 없었으니 말이다.
* * *
항공모함 입찰은 의외로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두 척을 계약하였는데 민스크호는 460만 달러, 노보로시크호는 430만 달러로 두 척을 합해서 한화로 71억에 인수 계약을 체결하였다.
전차 가격이 50억 원이 넘는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항공모함 1척이 전차 1대 값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계약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군사용으로 전환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군.’
계약 조건이 그랬다.
무게만 2만 7천t에 길이 273m, 너비 47m가 넘는 이 키예프급 전술 항공모함은 한반도 인근 해역에서는 실로 위협적인 존재였다.
수직 이착륙기와 전투용 헬리콥터를 발진할 수 있었기에, 대양이 아닌 한반도 인근 해역에서 사용하기 적합한 모델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두 척이나 얻은 게 어딘가. 한 척은 해체하고 한 척은 테마파크로 활용한다고 해도, 해체하는 과정에서 얻는 게 분명 있을 거야.’
태평양 사령부의 반발로, 한 척은 해체하고 한 척은 관광용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해체하는 한 척의 항공모함으로 항모 관련 기술을 최대한 습득한다면 우리나라도 항모 보유국가가 되는 것이 가능할 터였다.
물론 그 항모를 생산하는 기업은 우리 혜성이 될 것이고 말이다.
-이한성 회장님. 정말 큰일을 하셨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청와대에 항공모함 인수 계약이 체결된 사실을 알리자, 김태중 대통령이 곧장 전화를 해왔다.
그는 감격한 목소리로 연신 나를 치하하였다.
2차 세계 대전에서나 사용하던 함선을 현역으로 쓰는 나라가 비록 곧 해체한다고는 해도, 잠깐이나마 항공모함을 보유하게 되었으니 감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계약은 체결하였지만, 계약 그 자체보다는 항공모함을 한국으로 들여오는 과정이 오히려 더 난관일 겁니다. 어쩌면 중국, 일본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말입니까?
“러시아에서 항공모함을 매각한 주체는 옐친 대통령과 중앙 정부입니다. 그리고 태평양 사령부에서는 항공모함 매각에 반대하는 상황입니다.”
-이미 계약을 체결했는데도 문제가 생길 일이 있겠습니까?
“내부 시설과 주요 장비를 파괴하는 식으로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흠. 중국과 일본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와의 외교도 신경을 써야 하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이한성 회장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외교 문제는 정부에서 잘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임기 1년 차 정부는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김영산 정부였으면 일본은 그렇다 쳐도, 중국과 러시아와의 외교 마찰은 부담스럽게 여겼을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그래도 정부만 믿고 있을 수는 없겠지?’
노사가 설명해 준 미래의 한국과 달리, 지금 시기의 한국은 외교력 면에서 높은 평가를 주기 어려웠다.
특히 러시아와의 문제는 내가 직접 해결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다.
* * *
한성이 예상했던 대로 일본 정부는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걸 용납해야 하는 일입니까? 아무리 민간 기업이라고 하나, 엄연히 한국 국적의 기업이 항공모함을 매입하다니요!”
“용납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안 되고 말고요! 조선이 항공모함을 갖다니!”
“애초에 항공모함을 인수한 HS 디펜스의 뒤에 누가 있습니까? 혜성 그룹의 이한성 회장이 그 뒤에 있지 않습니까. 이한성 회장은 말이 기업인이지, 실상은 한국 정부의 지시를 받는 관영기업 사장이나 마찬가지인 자입니다. 러시아의 항공모함을 인수한 주체는 결국 한국 정부라는 의미입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일본에서는 한성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자동차부터, 전자 산업 그리고 반도체까지.
일본 기업과 첨예하게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한성이 절반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HS 디펜스가 항공모함을 인수한 사실에 경각심을 드러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성이라면 결코 순수한 의도로 항공모함을 인수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애초에 항공모함을 순수한 의도로 인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말이다.
“미국에 이야기해야 합니다! 미국이라면 반드시 저희의 손을 들어 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