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로켓 실험을 하다
“컨소시엄이라도 구성하자는 거야?”
왕재구 회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제안이었다.
혜성과 손을 잡고 미래 그룹을 친 은성 그룹이, 이제는 미래 그룹과 손을 잡고 혜성을 치자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우리 없이 혜성을 이길 수 있겠어?”
“못 이기면 못 이기는 거지. 나는 그렇게까지 한국 이통사를 인수할 마음은 없어.”
미래 그룹이라고 이동통신 산업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재구 회장이 현재 집중하는 사업은 반도체 사업이었다.
혜성 그룹이 반도체에서만 6조가 넘는 매출, 심지어 영업이익은 1조 이상인 것을 보고 반도체가 미래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룹의 총매출이 16조가 넘는다고 해도, 순이익은 1조 정도에 불과한 미래 그룹이었으니 말이다.
“혜성 그룹을 이길 수 있는 기회인데도?”
왕재구 회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구혁재 회장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도가 아예 안 통한 것은 아니었다.
부친의 말을 듣고 혜성 그룹과 평화 협상을 맺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혜성 그룹을 쓰러뜨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으니까.
“좋아. 우리가 힘을 합쳤다 치자. 그러면 한국 이통사를 어떻게 나눌 생각이야?”
“더 많은 돈을 쓴 쪽이 1대 주주가 되어야겠지.”
“돈을 적게 쓰면 2대 주주로 하고?”
“그러는 게 좋지 않겠어?”
컨소시엄을 구성한다면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50대 50으로 하는 것은 미래 그룹도, 은성 그룹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넌 얼마 쓸 생각인데?”
“4천억.”
구혁재 회장의 말에 왕재구 회장은 눈을 부릅떴다.
현재 시점에서 추정되는 한국 이통사의 가치를 생각하면 4천억은 그야말로 최대 금액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 돈이면, 은성 하나로도 충분히 인수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상대는 혜성이잖아? 혜성이라면 5천억 이상도 쓸 수 있어.”
“음.”
왕재구 회장은 생각에 잠겼다.
‘은성에서 4천억을 쓴다면 인수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겠군.’
이제 남은 문제는 지분 배분을 어떻게 할지였다.
1대 주주가 되기 위해서는 은성 그룹보다 더 많은 돈을 써야 했다.
하지만 한국 이통사 인수에 8천억 이상을 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
‘애초에 지금의 나는 3천억 이상 동원할 자금이 없어.’
한때 재계 서열 1위였던 미래 그룹이었지만, 현재의 미래 그룹은 사내 유보금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재계 1위 자리를 탈환하고자, 자동차 사업과 반도체 사업에 투자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출을 더 받는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기업의 부채 비율을 400%까지 낮추겠다는 김태중 대통령의 선언을 생각하면 대출은 최대한 줄여야만 했다.
지금의 미래 그룹은 어느 때보다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할 때였으니까.
“좋아.”
“결정한 거야?”
“혜성을 물 먹이는 일인데 거절할 수는 없지.”
“나는 꼭 그런 이유로 한국 이통사를 인수하는 게 아닌데 말이야.”
“이유야 어찌 되었건, 혜성에게 대적하려는 거잖아?”
구혁재 회장은 피식 웃었다.
예상했던 대로 왕재구 회장은 혜성 그룹에 유감이 많은 듯싶었다.
* * *
혜성 그룹 사옥을 찾아온 권오중 회장이 불쑥 내게 물었다.
“기사는 봤지? 구 회장이 왕 회장과 붙어먹은 거 같은데?”
“한국 이통사를 인수하기 위해 컨소시엄을 구성했다는 기사는 저도 봤습니다.”
“왕 회장은 정말 무식한 건지, 용감한 건지 모르겠어. 미래 그룹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게 좋을 텐데 말이야.”
그가 말하는 미래 그룹의 상황이란, 김태중 대통령이 집권한 상황을 말했다.
왕재구 회장의 부친인 왕주형 총재가 김태중 대통령과 치열하게 경쟁한 것이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대선답게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갔었는데, 결과적으로 왕주형 총재는 김태중 대통령에게 패배하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왕주형 총재의 패배는 왕주형 총재 하나만의 패배를 의미하지 않았다.
야당은 물론이고, 미래 그룹 전체의 패배라고 봐도 무방하였다.
“글쎄요. 제 생각이지만, 미래 그룹에 크게 문제 생길 일은 없다고 봅니다.”
“대통령이 미래 그룹을 가만히 놔둘 거라는 말이야?”
“예. 관용의 정치를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미래 그룹을 공격하면 정적이라 공격했다는 말을 들을 것이니, 김태중 대통령으로선 가능한 피하고 싶을 겁니다.”
“의외로군. 나였으면 절대 용서치 않았을 텐데 말이야.”
확실히 의외의 행동이긴 했다.
재벌 개혁 5대 원칙까지 거창하게 선언했으면 미래 그룹을 본보기로 삼을 만한데 말이다.
‘아무래도 통일과 관련해서 미래 그룹과 무슨 합의를 한 거 같은데.’
서로 정적이었던 관계였음에도 김태중 대통령과 왕주형 총재가 극적인 합의를 보았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국내의 기업 중 통일에 가장 적극적인 기업이 미래 그룹이었으니까.
“그래서 혜성 그룹은 어떻게 하려고?”
“둘이 붙었다고 한국 이통사를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 회장은 한국 이통사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둘이 힘을 합치면 인수가가 상당할 텐데.”
“왜요? 권 회장님도 흥미가 생깁니까?”
“이 회장이 인수한다는데 내가 욕심을 낼 리가 있겠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저도 큰돈을 쓸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최대 금액이라고 해봤자 5천억 정도에 불과합니다.”
내 말에 권오중 회장이 혀를 내둘렀다.
“5천억이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제가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을 생각하면 그리 크게 쓰는 것은 아닙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혜성의 자금력은 정말 한계가 없는 거 같아.”
“한계가 없지는 않습니다.”
남들보다 여유 자금이 조금 많을 뿐이었다.
뭐 그 ‘조금’이란 게 조 단위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5천억 가지고 될까? 미래와 은성이 붙었으면 그 이상도 쓸 거 같은데?”
“저도 사실 그게 걱정입니다.”
“이 회장도 걱정이란 것을 하는 사람이었군.”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저는 두 기업이 한국 이통사를 인수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5천억밖에 안 쓸 거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은 사실 제가 한국 이통사 인수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나는 이어서 설명하였다.
“두 기업 모두 반도체 때문에 자금 사정이 빠듯한데, 무리하게 한국 이통사를 인수한다면 큰 위기를 겪지 않을까 그게 걱정입니다.”
이번에는 황당한 표정을 짓는 권오중 회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내 발언은 경쟁자를 걱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자네가 왜 걱정하나?”
“그야, 저 때문에 위기가 발생할 것이라서요.”
“이 회장 때문에?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치킨게임을 하려고 합니다. 일본과 정면승부를 하려고 말이죠.”
일본에서도 본격적으로 16M D램을 양산하려고 하고 있었다.
은성이나 미래에서도 1M D램에 이어 16M D램의 양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이 16M D램을 양산하기 전에 16M D램의 단가를 확 낮출 생각이었다.
80년대의 일본이 했던 짓을 그대로 하려는 것이다.
‘미래도 그렇고 은성도 그렇고 반도체에다 수천억을 투자했다고 하는데, 양산하면 오히려 적자를 보게 될 테니,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어.’
혜성이야 이미 이득 볼 것은 다 봤으니 상관없었다.
애초에 생산 단가부터가 압도적으로 차이 났다.
우리는 벌써 16M D램의 생산 단가를 15달러 미만으로 낮춘 상태였으니까.
반면 일본이나 후발 주자인 미래와 은성은?
일본의 경우 아무리 못해도 35달러 이상은 될 것이다.
은성이나 미래도 30달러는 족히 될 것이고.
지금의 단가야 50달러니, 그 정도의 생산 단가로도 충분한 이익을 볼 수 있겠지만, 내가 가격을 낮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적자만 안 본다는 생각으로 15달러까지 낮춘다면, 경쟁자들이 입는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테니까.
‘이러다 IMF가 일찍 터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노사가 설명한 IMF의 발생 원인은 다양하였다.
그리고 IMF의 발생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반도체 산업의 과잉 투자였다.
1995년, 유례없는 호황을 겪은 반도체 업계는 과잉 투자를 하다가 1996년과 1997년의 처참할 정도의 불황을 겪고 큰 타격을 입었다.
달러로 치면 거의 수백억 달러의 타격으로, 수출의존국인 한국으로선 실로 천문학적인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원래라면 1996년, 1997년에 있을 반도체 업계의 불황을 3~4년 앞당기려 하고 있으니, IMF도 앞당겨질 가능성도 아예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반대로 생각했을 때, 오히려 IMF의 발생 원인을 하나 제거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뭐가 됐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국으로선 손해가 아니지. 내가 한 행동이 IMF를 앞당기는 거면, IMF로 입게 될 피해를 줄이게 되는 셈이니. IMF가 발생하지 않는다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미래 그룹이나 은성 그룹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쟁하는 사이에 의리 챙겨줄 이유도 없었고.
애초에 그들과 나 사이에 의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도 했지만.
* * *
1993년 4월 3일.
오늘은 서해안 태안반도로 향하였다.
내가 세운 우주과학 연구소에서 KSR이란 이름의 관측 로켓이 발사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강일두 소장이라고 합니다.”
종합시험장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국방부의 관계자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미사일 체계나 로켓추진부, 발사대 등이야 우리가 개발했지만, 나머지를 개발한 것은 국방과학 연구소였다.
애초에 로켓 실험을 민간에서 주도할 수는 없는 일.
당연히 이번 로켓 실험도 국방부 주도하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별을 단 장성들이 내게 인사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말이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들의 인사에 적당히 예의를 갖추어서 대응해 주었다.
예전이었으면 주눅 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거야 5공 시절 때나 그럴 일이었다.
지금의 내게 있어 고위 장성이라고 해봤자, 그냥 동네 아저씨에 불과하였다.
방산 산업을 하고 있기는 해도, 규모가 워낙 작으므로 설령 외압에 의해 사업 규모가 축소된다고 아쉬울 게 없었다.
어차피 김영산 대통령 때문에 반강제로 시작한 것이 방산 사업이었으니까.
‘오히려 저들이 내 눈치를 살펴야겠지.’
대통령조차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데, 고위 장성이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실제로도 장성들은 공손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나를 대하였다.
“장 소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국방부 관계자들을 적당히 상대해 준 나는 이번 실험의 실질적인 책임자를 찾았다.
“저야 회장님 덕에 잘 지냈습니다.”
“다행이군요. VIP도 오실 텐데, 오늘 실험은 문제없겠지요?”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장 소장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해봐야 알 거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애매한 답변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가능하다고 답변하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이 첫 실험이었으니까.
‘대통령이 조금 더 나중에 참관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국방과학 연구소와 힘을 합치긴 했지만, 워낙 주어진 시간이 짧았다.
겨우 2년.
아무리 소련 과학자들이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반드시 성공하란 보장은 없었다.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양준현이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대통령님께서 오셨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멀리서 김태중 대통령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