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중국을 견제해야지
제리 양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와! 이거 진짜 재미있는데?”
“뭔데?”
데이비드 필로가 컴퓨터 앞으로 다가오자 제리 양이 Meero라고 적혀 있는 사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봐봐. 이 사이트에 들어가면 각종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어. 사이트와 사이트를 이어주는 곳이라니까?”
“사이트를 이어준다고?”
“그래, 마치 포털처럼!”
그러자 데이비드 필로도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기발한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미로를 만든 사람은 엄청난 천재일 게 분명해. 어쩌면 우리 학교 사람일 수도 있어.”
두 사람은 미로를 연신 칭찬하며 그 뒤로 미로를 탐구해나갔다.
다른 유저들처럼 단순히 사이트를 이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이트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 역시 미로와 비슷한 사이트를 개발해보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사업을 뺏겠다는, 엄청난 욕심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재미.
사이트를 만드는 게 재미있어 보여서 미로를 만들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리 양의 귀로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뭐? 미로가 우리 학교에서 취업설명회를 한다고?”
실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미로를 매일같이 이용하고 있었는데, 미로에서 직접 취업설명회를 개최한다니.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기는. 당연히 들으러 가야지!”
“미로에 취직할 생각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 미로라는 회사가 어딘지 궁금하잖아? 취업설명회도 여는 거 보면 영세한 곳은 아닌 거 같은데,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졌어.”
미로의 기발한 창의력은 분명 대단하기는 했다.
사이트를 전화번호부처럼 이용하겠다는 발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창의성 하나만 보고 미로에 취직할 수는 없었다.
‘아무 회사에 들어갈 거였으면, 차라리 나도 사이트를 만들고 말지.’
지금 당장도 미로 같은 사이트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리라 자부하는 제리 양이었다.
물론 미로가 이미 이 업계를 선점했기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는 미로의 상대가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거 들었어? 스티브 잡스도 취업설명회에 온다는데?”
“스티브가 온다고?”
제리 양은 입을 떡 벌렸다.
미로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봤자, 작은 벤처 기업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스티브 잡스라니?
‘도대체 스티브와는 무슨 관계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미로사의 취업설명회를 기다렸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스티브가 오니까 그런 거겠지.”
“쳇. 이 중에 미로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요즘 유저 수가 많이 늘었다니 절반은 되지 않을까?”
“그 말은 결국 절반 이상은 미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스티브 구경하러 왔다는 말이네.”
“미로를 아는 사람들도 스티브를 구경하러 왔을걸?”
제리 양이 데이비드 필로와 그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스티브 잡스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역시 스티브 잡스의 연설에 빠져들었다.
‘와, 이런 비사가 있었구나.’
애플에서 쫓겨난 과정을 들을 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고, 역경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들을 땐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그러다 한성이란 이름이 그의 귀에 박혔다.
스티브 잡스는 중간마다 한성의 이야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주인공을 응원하는 아군처럼 등장하다가, 나중에는 거의 주연급으로 격상하였다.
‘미로사가 이렇게 큰 기업이었어?’
연설을 계속 듣던 제리 양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사실 ‘혜성’이란 기업에 관해서는 언뜻 듣긴 했었다.
자동차라던가, 휴대폰이라든가.
몇 가지 분야에서 꽤 유명한 기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혜성이 미로와 관련 깊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정확히는 혜성의 CEO가 미로의 CEO가 동일 인물이라나?
‘그룹 총매출이 수백억 달러라니. 내가 아는 대부분의 기업보다 매출이 크잖아?’
역시 가장 귀에 들어온 것은 돈과 관련된 ‘매출’이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미로사의 매출은 보잘것없었기에 스티브 잡스는 혜성 그룹의 매출을 이야기하였는데, 이게 실로 놀랍기 그지없었다.
혜성 반도체 한 곳에서만 80억 달러가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한국 기업이 이렇게 대단했었나? 믿기지 않을 정도야.’
같은 동양 기업이 잘나가는 모습을 보니,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대만 기업이 아니라서 안타까워해야 할지 의문이었다.
어쨌든 미로사를 다시 보게 된 것은 확실하였다.
“난 미로에서 한번 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
스티브 잡스의 연설이 끝나자 데이비드 필로가 물었다.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뀐 거야?”
“저 연설을 들었는데 생각이 안 바뀔 수가 있어? 우리 원래부터 미로에 흥미 많았잖아. 근데 저리 탄탄한 기업이라면 미로에 입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데이비드 필로의 말에 제리 양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미로와 경쟁하는 것?
혜성 그룹의 매출이 수백억 달러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미 그런 생각은 접은 지 오래였다.
오히려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많은 이들이 미로의 가치를 모를 때, 미로에 입사하여 회사 중역이 되어보자고 말이다.
* * *
스탠퍼드 취업연설회가 끝나고 며칠 뒤.
나를 찾아온 스티브 잡스가 물었다.
“제가 연설할 때는 학생들의 분위기가 괜찮은 거 같았는데, 미로사는 개발 인력을 잘 구했습니까?”
“물론입니다. 정말 스티브의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잘 구한 정도가 아니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최대 10명 정도였는데, 무려 50명 넘는 학생들이 미로사 취업 문의를 하였다.
심지어 미로사만 취업 문의를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혜성 그룹의 회장인 것을 알고서 혜성 반도체, 혜성 자동차, 혜성 전자 등에도 취업 문의를 하였다.
졸업생 중에는 바로 입사한 예도 있었고 말이다.
‘무엇보다 제리 양이 미로사에 입사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야후의 창업주라는 제리 양.
물론 나도 제리 양에 관해선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포털 사이트를 최초로 개척한 인물이니 분명 범상치 않을 것이다.
어쩌면 미로사의 최대 경쟁자가 될 수도 있었을 거고.
그런데 제리 양이 미로사에 들어온다고 했으니, 나는 잠재적인 경쟁자를 아군으로 끌어들인 셈이 되었다.
그것도 포털 사이트를 최초로 만든 대단한 인물을 말이다.
“혜성의 이름값이 없었으면 제 연설로도 효과를 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럴 리가요. 스티브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혜성이 어딘지, 미로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학생들입니다.”
“하하하, 너무 고마워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미스터 리가 도와준 것에 비교하면 이 정도 도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역시 일방적으로 도움만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티브가 사업을 잘 해 줘서 제 지분 가치가 크게 상승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요? 하하하!”
스티브 잡스와의 대화는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 뒤로 다시 바쁜 일정을 소화하였다.
스탠퍼드에서의 취업설명회로 지역 언론에 꽤 화제가 된 상태.
인터뷰도 몇 개 추가되어 내 일정은 더 바빠졌다.
‘제리 양과도 한번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데, 이건 나중으로 미뤄야겠어.’
어차피 지금의 제리 양은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하였다.
벌써 관심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뜻.
하여 정해진 일정만 마무리하고 귀국할 준비를 하였다.
1월 말.
귀국 준비를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백악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미스터 리? 대통령께서 찾으십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부르는 데 안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가겠다는 대답을 남기고는 한국행 비행기 대신 워싱턴행 비행기를 탔다.
* * *
“갑자기 불러서 죄송합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시간이 안 날 거 같아서 말입니다.”
빌 클린턴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그리 말하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죄송하다니요.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미스터 리를 초대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감사 인사를 너무 소홀하게 한 거 같아, 죄송한 마음에 미스터 리를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통령이다 보니, 미스터 리에게 괜히 부담을 주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드는군요.”
“백악관에 오는 것이 부담 안 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대통령께서 불러 주신다면 저야 기쁜 마음으로 올 뿐입니다.”
“미스터 리의 생각이 그렇다면, 앞으로도 걱정 없이 미스터 리를 초대하면 되겠군요. 하하하.”
나도 마주 웃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자주 초대해 준다면 나야 기뻐할 일이었다.
다른 자들의 시기와 질투가 문제겠지만, 그래도 8년 동안 초강대국 수장으로 자리를 지키는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친분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감수할 수 있었다.
“혹시 대통령이 된 저에게는 따로 조언해 주실 것이 없으십니까? 제가 주지사 시절에 조언해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빌 클린턴 대통령의 말에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친분이 깊어지는 것은 좋은데, 아무래도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조언하는 것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표정만 그럴 뿐이고, 내심으로는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너무 부담을 갖지 마세요. 저는 사실 미스터 리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불러서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조언을 듣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군이나 대외 정책과 관련된 조언도 많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러니 어떤 조언이든 괜찮습니다. 저와 미국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더 뜸 들이지 않고 내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선거도 끝났는데 선거 이야기를 또 할 수도 없고, 경제 이야기도 주변에 경제통 전문가들이 많으니 제가 따로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시아 사람이니, 아시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경제와 관련된 조언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경청하겠습니다.”
“저는 미국이 앞으로 가장 견제해야 할 국가는 중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이요?”
“소련과 일본이 지금까지 미국을 위협하는 나라였다면, 그 둘이 무너진 지금, 미국을 위협할 나라는 오직 중국뿐입니다.”
이스라엘 기업들이 괜히 수십조씩 기부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국심도 애국심이지만, 자신들의 기반이 이스라엘에 있으니 이스라엘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도 이들과 같은 입장이었다.
중국을 이웃으로 둔 한국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안정한 나라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이 불안정하면, 한국에 기반을 둔 나로서는 좋을 게 없었고 말이다.
하여 나는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이 순간에 중국을 거론하였다.
‘미국이 제때 중국을 견제해 주기만 한다면 노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중국이 그렇게 오만무도해질 일도 없겠지.’
중국이 북한의 보호자 행세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제 앞가림 못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북한을 챙기지 못할 테고, 우리가 통일한다고 해도 방해하지 못할 테니까.
“미스터 리는 중국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는 거 같군요. 하긴, 시장 개방을 한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률이 실로 대단한 수준이긴 합니다.”
“곧 중국으로 천문학적인 자본이 유입될 겁니다. 12억이 넘는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수많은 기업이 중국으로 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지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될 겁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그 뒤에는 소련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중간에 끼인 한국은 갈수록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