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스티브 잡스에게 인정받은 남자
취임식은 내가 느끼기에는 조금 심심하게 끝이 났다.
애초에, 빌 클린턴에게 눈도장만 찍기 위해 온 거라서, 조용히 움직인 것도 있었다.
괜히 눈에 띄게 움직였다간, 빌 클린턴의 측근들이 곱게 보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빌 클린턴의 취임식도 끝났으니 미국에서의 정무 활동도 마무리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게 미국에서의 일정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사업과 관련해서도 일정이 바빴는데, 혜성 반도체나 혜성 자동차야 말할 것도 없었고 심지어 혜성 전자와 관련해서도 일이 많았다.
곧 필립스 전자에서 비디오 게임기를 출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미로 사이트입니까?”
“예. 여기를 누르면 원하는 사이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치 전화번호부 같군요.”
이번 미국 일정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HS 테크였다.
그도 그럴 것이, HS 테크에서 마침내 포털 사이트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원하는 사이트를 들어가기가 꽤 복잡하군요.”
포털의 이름답게, 인터넷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미로처럼 느껴졌다.
어딜 가야 내가 원하는 종착지에 도착할지 알 수 없다고나 할까?
“당장은 컴퓨터 주 사용자인 대학생들을 위해, 논문 작성에 필요한 정보 사이트들 위주로 리스트를 편성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많이 사용한답니까?”
“예, 일단 스탠퍼드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대학생에게라도 인기가 있다니 다행이었다.
‘일단 야후보다 먼저 시작한 것은 확실한 거 같군.’
나도 잘은 모르지만, 미로(meero)처럼 포탈 형태의 사이트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사이트란 게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고.
‘검색 엔진까지 선점한다면 야후가 설 자리는 없겠어.’
선점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반도체 사업만 해도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따라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던가.
물론 혜성 반도체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D램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가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스탠퍼드에서 인기가 많다니, 이참에 스탠퍼드에서 개발자를 구해 보세요.”
노사도 잘은 모르는 거 같지만, 야후의 창업주가 스탠퍼드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IT 기업이 될 구글의 창업주도 스탠퍼드 출신이라나?
야후의 창업주나 구글의 창업주가 미로의 개발자로 들어올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인재가 많은 곳이니 스탠퍼드 출신을 영입하면 손해는 안 볼 거 같았다.
“예, 알겠습니다.”
“검색 엔진도 계속해서 개발해 주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올해 안에 성과를 내겠습니다.”
“서두르되, 오류 없게끔 확실하게 부탁드립니다.”
내가 한 말이지만, 정말 듣는 입장에선 끔찍하게 느껴질 거 같았다.
빨리 개발하라면서 완벽하게 하라니.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지 싶다.
하지만 나로선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컴퓨터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검색 엔진과 관련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런 거는 해 줄 수 있었다.
“어쨌든 제가 이야기한 시점 안에 미로 사이트를 개발하셨으니, 특별 상여급으로 10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한껏 들뜬 개발 팀장의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돈은 역시 만고의 진리였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개발 팀장의 눈 밑에 있었던 다크서클이 말끔히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기뻐하는 것을 보니 돈 쓸 시간은 있나 보군. 조금 더 굴려도 되겠어.’
언뜻 ‘공돌이는 굴리면 굴러가는 생물이다’라던 노사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노사와 나의 관계가 관계다 보니, 역시 나는 노사를 닮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 * *
스탠퍼드에서 개발자를 구하라는 내 지시에, 김찬희 대표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아예 스탠퍼드와 이야기해서 취업설명회 자리를 마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취업설명회 말입니까?”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스탠퍼드 인재를 끌어들이려면 취업설명회 자리를 한 번쯤은 마련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한 명, 한 명씩 끌어들인다면 시간이 몇 년은 족히 소요될 것이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 기업의 취업설명회에 사람들이 오기는 할까?’
그게 걱정이었다.
한국에서야 어떤 대학을 가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기업들은 인재를 구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며 앓는 소리를 했지만, 혜성은 오히려 과거 그 어떤 때보다 인재가 모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한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에서라면?
솔직히 혜성 그룹의 인지도는 보잘것없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HS 테크나 미로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일단 하기는 해야겠지. 인재를 얻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이니까.’
망신당할 게 걱정이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어차피 미로사는 신생 기업이나 마찬가지니,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기도 했고.
“한번 준비해 보세요. 학교 측과도 확실하게 이야기해서 나중에 문제 생길 일이 없게 하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려 반, 기대 반의 복잡한 기분으로 스탠퍼드의 취업설명회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미로가 미스터 리의 회사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취업설명회를 며칠 앞두고 스티브 잡스를 만났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 만난 것은 아니고, 원래 미국에 오면 최소 한 번 이상은 스티브 잡스를 만나곤 했다.
오늘도 바로 그런 날이었다.
“인터넷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서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습니다.”
“미로뿐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성장세도 무섭던데, 정말 빌 게이츠, 그 친구의 말처럼 HS 테크가 위협적인 경쟁자가 될 거 같습니다.”
“빌 게이츠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HS 테크는 아직 신생 기업에 불과한데, 지나치게 의식하는 거 같군요.”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빌 게이츠가 약한 소리를 할 정도로 HS 테크가, 정확히는 미스터 리가 위협적이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빌 게이츠에게 호적수 취급을 받았다는 건데, 이걸 기쁘게 여겨야 할지, 난감하게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기는 한데, 아직은 보여 줄 게 마땅히 없어서 아쉽습니다.”
“보여 줄 게 마땅히 없다니요. 미로만 해도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스티브도 미로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럼요. 모르는 전화번호를 찾는 것처럼, 어렵기만 했던 사이트 탐색을 미로라는 사이트 하나의 존재로 순식간에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역시 스티브 잡스는 남달랐다.
수익성도 없는 미로 사이트를 보고 벌써 미래 잠재력을 눈치챌 정도니 말이다.
“감사합니다만, 아직 그 정도로는 유저들의 관심을 끌기엔 부족할 거 같습니다.”
“기능이야 차차, 만들어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개발 인력을 모으기가 쉽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한국에는 인재가 넘쳐나서 미스터 리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는데, 제 생각이 틀렸나 봅니다.”
“인재야 많을수록 좋은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스탠퍼드에서도 취업설명회를 열어 최대한 많은 인재를 끌어들여 볼 생각입니다.”
“미스터 리, 스탠퍼드에서 취업설명회를 하신다고요?”
내 말에 스티브 잡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딘가 들뜬 기색처럼 보였다.
“예. 한 번쯤 우리 회사를 스탠퍼드 학생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어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렇습니까?”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스티브 잡스를 보며 나는 농담으로 말했다.
“스티브도 흥미 있으면 구경 오셔도 됩니다. 아마, 재미있는 광경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운이 나쁘면 학생 수가 제 수행원 수보다 더 적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진짜로 스티브 잡스가 구경 오면 창피한 일이 되겠지만, 설마 그럴 일이 있을까 싶었다.
넥스트도 지금 한창 바쁜 상황인데 말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경이요? 좋죠. 안 그래도 스탠퍼드란 말을 듣고 관심이 갔는데, 기회를 주시면 저도 마다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왕 가는 거, 저에게도 연설의 기회를 주시지요.”
“연설이요?”
“제가 확실하게 미스터 리를 홍보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준다면 나로서는 무조건 좋아해야 할 일이었다.
혜성이나 미로만으로 사람을 불러들인다면 끽해 봐야 수십 명이 잠깐 보다 말 테지만, 스티브 잡스가 온다면 수백 명도 거뜬할 테니까.
* * *
취업설명회 당일.
수백 명의 군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면을 본 김찬희 대표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설마 의자가 부족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거의 500명은 온 거 같은데요?”
“의자를 300개 준비했는데도 한참 부족한 것을 보면 확실히 500명은 넘어 보입니다.”
솔직히 300개도 많이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인텔이나 IBM, 마이크로소프트도 아니고 설마 혜성 그룹의 취업설명회에 수백 명이나 모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은 기분 좋게 깨졌다.
수십 명을 넘어 수백 명이나 취업설명회 자리에 참석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이름값이 대단하긴 합니다.”
물론 혜성 그룹의 이름을 보고 참석한 학생들도 있겠지만,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혜성의 이름값이 올라갔다지만, 아직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
빌 클린턴 덕에 미국 정계에서만 인지도가 올라가기는 했으나, 여전히 대중적인 인지도는 최저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던 것이다.
짝짝짝!
김찬희 대표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데, 스티브 잡스가 연단 위로 올라갔다.
스탠퍼드 학생들은 스티브 잡스의 등장에 크게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곳에 여러분들과 잠시나마 함께하는 시간이 생긴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서두를 떼자, 다시 환호성이 터졌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연설을 이어나갔다.
“사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조금 뜬금없었다.
취업연설회 자리에서, 회사 이야기도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로 서두를 떼다니.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극히 사소하게 느껴지는 그의 개인사에 모두가 집중한다는 점이었다.
절정은 애플에서 쫓겨났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할 때였다.
나도 다 알고 있었던 내용인데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이할 정도로 흥분이 되었다.
‘그의 연설을 들으니, 뭔가 서사시의 주인공을 보는 거 같군. 애플에서 쫓겨났음에도 이렇게 버젓이 성공했으니 말이야.’
역경과 고난.
그리고 현재의 성공까지.
순간적으로 스티브 잡스가 서사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지, 스탠퍼드 학생들도 초롱초롱한 눈을 하며 그의 말에 초집중하였다.
그의 연설을 듣고 있으니 속으로 이런 걱정이 들 정도였다.
‘이러다 스탠퍼드 학생들이 죄다 넥스트로 가는 거 아니야?’
물론 이런 걱정은 우려에 불과하였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즉, 내가 세운 미로사를 홍보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고, 그는 이를 훌륭하게 해내었다.
“제가 애플에서 쫓겨나며 위기를 겪었을 때, 제 손을 잡아준 사람은 오직 한 명. 머나먼 동방에서 온 한성 리입니다. 그리고 한성 리는 지금도 저의 친구이자, 투자자로서 저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몇 번이고 강조해서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그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러자 나를 보는 학생들의 눈이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그저 돈 많은 동양인을 보듯, 무신경하게 바라봤다면, 이제는 그 대단한 ‘스티브 잡스’에게 인정받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