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이젠 수성을 해야 할 때
(아마 러시아는 고철값만 받을 가능성이 커. 많아 봐야 10억 단위일 거다.)
“항공모함이 10억 단위라고요?”
(유지비가 비싸잖아. 러시아 처지에서는 어차피 오래된 항공모함이기도 하니, 구태여 유지비를 감수할 필요는 없지.)
10억 단위라면 내게는 거저처럼 느껴졌다.
물론 유지비가 100억 단위라는 게 문제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항공모함이야, 정부에서 운용할 테니 나는 유지비를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나는 그저 연구에만 집중하면 될 거 같았다.
아무리 오래된 항공모함이라지만, 전투기 기체발진 및 착륙제어, 갑판의 내열처리 등을 연구하면 얻을 게 많을 것이니까.
“알겠습니다. 한번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끽해 봐야 수십억이라면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수십억은 그리 큰 액수라고 보기는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런데 김태중과는 뭔 이야기를 했지?)
“김영산 대통령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감사 인사를 하더니, 경제 정책과 관련해서 조언을 요구하더군요.”
(경제통이라고 너나 할 것 없이 이용해 먹는구나.)
“뭐, 저는 인터넷을 신경 쓰라고만 조언했습니다.”
(정부가 인터넷 구축에 집중한다면 너에게도 득 될 것이니, 일거양득이겠어.)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노사의 말처럼, 한국의 인터넷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나에게 이익이었다.
혜성 그룹은 IT 비중도가 상당한 기업이었으니 말이다.
HS 테크를 보유하기도 했고.
“다만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한국 이통사를 인수할 생각이 있느냐고.”
(한국 이통사를? 너는 어떻게 대답했는데?)
“없다고는 못 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인수 금액이 얼마인지가 중요하였지만, 이통사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 일단 손해는 아니었다.
안정적인 캐시카우가 되어줄 테니까.
“물론 인수가가 5천억 이상이라면 굳이 인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5천억이라. 돈도 많은 놈이, 5천억 가지고 포기하기는 너무 아깝지 않아? 네가 보유한 소프트뱅크 지분 일부만 팔아도 5천억이 생길 텐데?)
“겨우 이통사 하나 가지겠다고 몇 년 안에 200조짜리 회사가 될 소프트뱅크의 지분을 팔 수는 없죠.”
(빌리면 되잖아.)
“다른 곳에 더 쓸 곳이 많습니다.”
이통사를 얻으면 안정적인 캐시카우가 되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5천억은 너무 큰 돈이었다.
심지어 5천억 줘서 인수한다고 그게 끝인 것도 아니었다.
이동통신 산업은 통신망 구축에만 못 해도 수천억의 투자가 필요하다.
김태중 당선인이 당선되면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있을 테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들 큰 자금이 소요되는 것은 분명하였다.
원래도 자금이 풍부했고, 소프트뱅크의 성공적인 상장으로 무려 4조 원의 자산이 새로 생겼지만, 그만큼 쓸 곳도 많아졌다.
일본 반도체와의 격차를 벌리려고 반도체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기도 했고, 기화 자동차에서는 하이브리드 연구에 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였다.
미국 IT 기업들에 대해 투자도 해야 했고 말이다.
“한국 이통사를 인수하는 것보단, 차라리 소프트뱅크와 함께 미국의 이통사를 인수하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일 거 같습니다.”
한국 이통사를 인수한다면 한국에서밖에 사업할 길이 없었다.
즉, 한계가 정해져 있다는 뜻.
현실에 안주하지 않기로 한 내가 구태여 한국 이통사를 비싼 돈 주고 인수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미국의 이통사라면 달랐다.
미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3위 안에만 들어도 혜성 그룹의 어떤 계열사보다 매출이 높을 것이었다.
(확실히 네가 커지긴 했구나. 미국 이통사까지 노리다니.)
“미국 대통령과도 친분이 생겼는데, 국제적으로 놀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노사가 피식 웃었다.
(잘난 척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긴 한데, 진짜 잘하고 있어서 뭐라 못하겠군.)
“아닙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뒤늦게 겸손한 척해 봐야 의미 없다. 네 잘난 거, 나도 알고 있으니. 그래도 건강은 꼭 챙기도록 해.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건강 잃으면 의미가 없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잔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노사의 말인데 허투루 들을 수는 없었다.
나를 위한 조언이었으니까.
‘권오중 회장이 골프 하자고 꼬시던데, 골프나 해 볼까?’
골프든 뭐든, 일단 어떤 운동이건 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 * *
일본 반도체 업계는 혜성을 따라잡기 위해 악을 썼다.
“64M은 우리가 먼저 개발해야 해!”
“조센징한테 당하고 있을 거야? 빨리 64M이든, 16M 양산이든 뭐 하나라도 성과를 내란 말이야!”
하지만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혜성은 더 멀리 달아날 뿐이었다.
16M까지 혜성과의 격차는 불과 6개월에 불과하였었다.
그런데 혜성 반도체에서 1992년 1월에 64M을 개발하자, 혜성과의 격차는 1년 이상으로 멀어졌다.
1993년 1월이 되도록 일본 어떤 기업에서도 64M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이렇게 혜성을 지켜 보고만 보고 있을 겁니까? 이대로 혜성을 두었다간, 시장의 지배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 겁니다!”
NEC에서 나온 인물이 큰 목소리로 말문을 떼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쯔, 미츠비시.
이른바 일본 반도체 업계의 5인방이라 불리는 기업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주로 미국과 관련된 일이 벌어졌을 때 그들은 한자리에 모였었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한국 기업 때문에 5인방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때는 반도체 업계를 쥐락펴락하였던 그들로선 실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혜성이 개발 속도야 조금 앞서나가고 있다지만, D램 반도체 부문을 제외한 반도체 전체 부문을 따진다면 아직 세계 1위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매출도 1조 엔이 겨우 넘는 수준 아닙니까?”
“맞습니다. 솔직히 미국이 문제지, 혜성이 문젭니까? 미국만 아니었으면, 혜성이 저리 잘나갈 일도 없었을 겁니다.”
“2차 협정까지만 막았으면 좋았을 텐데, 한국 놈들이 운이 좋긴 합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미국의 제재조치와 가혹한 견제가 없었더라면 혜성 반도체가 일본 반도체를 넘어설 일은 없었을 거라고.
“지금 혜성과의 격차가 1년 가까이 벌어졌는데, 아직도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흠! 흠!”
“안일하다니. 말이 조금 심합니다.”
몇몇은 부끄럽다는 듯 헛기침했고 몇몇은 분개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NEC 대표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반도체 업계에서, 기술 격차가 1년 이상 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 세계를 상대로 했던 치킨 게임을, 이젠 혜성에서 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에서 견제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5인방 기업들은 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을 주도하였었다.
그들이 주도했던 치킨게임의 원리는 이런 식이었다.
우선, 압도적으로 고품질의 반도체 칩을 만든다.
고품질의 반도체 칩으로 차기 반도체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한 뒤, 후발 주자가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 단가를 낮춘다.
많은 투자 끝에 반도체 칩을 간신히 연구하여 생산하였던 후발 주자는 원가보다 낮은 반도체 단가에 자금 회수는커녕 오히려 적자를 본다.
후발 주자는 자금력이 넉넉지 않으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후발 주자가 떨어져 나가면 일본 반도체 5인방은 다시 단가를 높여서 차세대 반도체 칩 연구에 활용한다.
만약 미국에서 일본 반도체를 제재하지 않았다면 이 같은 사이클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이어졌을 터.
혜성도 일성 전자처럼 반도체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혜성은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NEC 대표가 경고한 것처럼 이제는 혜성에서 치킨게임을 주도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게요. 우리 회사에서도 이미 써먹을 방법은 다 써먹어 봤지만, 혜성을 견제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자금력이라도 부족하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이제는 빌 클린턴 당선인과도 친분이 생겼으니, 미국에서 견제하기가 더더욱 까다로워졌다.
인맥 다툼에서 미국 대통령을 이길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왜 방법이 없습니까. 우리가 힘을 합치면 될 일입니다.”
“힘을 합치다니요?”
“혜성에서는 이미 2년 전부터 256M의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뒤늦게 쫓아가고 있지만, 혜성보다 개발이 늦을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우리 일본 기업들이 힘을 합쳐서 공동 개발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겁니다.”
NEC 대표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기술로 자부심을 가진 일본 반도체 기업이 힘을 합친다면 혜성의 개발 속도를 못 따라잡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따라잡는 수준을 넘어 아득히 추월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공동 개발이라.”
“흠, 혜성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공동 개발을 끌어내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섯 기업은 결국 경쟁 기업이었다.
혜성 반도체가 아무리 잘나간다지만, 그거야 메모리 반도체 부문 한정이었고, 다른 사업 부문까지 합친다면 매출 순위는 4위 정도에 불과하였다.
메모리 반도체만 1등인 기업을 견제하기 위해 종합 반도체 1, 2, 4, 6위가 힘을 합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여전히 속으로 혜성을 얕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NEC 대표의 말에 설득된 곳은 히타치 한 곳이었다.
10%가 넘던 점유율이 7%대까지 떨어진 히타치는 새로운 돌파구로서 NEC와의 공동 개발을 선택한 것이다.
‘히타치 한 곳만 얻어도 나쁘지 않다. 히타치가 자랑하는 패터치 기술과 우리의 기술을 합치면 256M만큼은 혜성보다 개발을 앞당길 수 있을 거야.’
NEC 대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5인방 중에 겨우 한 곳과 힘을 합쳤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히타치도, NEC도 기술력으로는 남부럽지 않은 곳이니, 공동 개발의 시너지는 실로 상당할 것이 분명하였다.
혜성을 넘어서는 것은 물론이고, 독보적인 1위까지도 가능하리라.
‘아예 히타치와 합병하는 게 최선인데, 그건 일단 나중을 기약해 봐야겠어.’
일본 정부에서도 반도체 사업의 구조조정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니 물밑에서 잘 협상한다면 NEC와 히타치가 합병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았다.
* * *
새해가 되자마자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NEC와 히타치가 힘을 합쳤단 말씀입니까?”
“예. 256M D램과 차차기 D램을 공동 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것은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반도체 업계에서 기술력으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기업 두 곳이 힘을 합치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256M이야, 우리가 앞서겠지만, 1G부터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문제는 NEC와 히타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일본 반도체 업체도 여러 방식으로 혜성 반도체를 견제하려 들고 있었다.
‘역시 수성이 쉽지만은 않아.’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1위 한 게 불과 2년 전이었다.
그런데 벌써 이런 상황이 연거푸 닥치니, 1위 자리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대비하면 좋겠습니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히타치와 NEC의 개발 인력을 더더욱 공격적으로 영입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