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러시아 대통령이 방한하다
빌 클린턴 당선인을 보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역시 대우가 달라졌군.’
미국에 오자마자 느꼈다.
나를 향한 대우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그도 그럴 것이, 나와의 만남을 피하던 공화국 정치인들부터, 까칠하게 나왔던 민주당 정치인들까지 모두가 나를 찾았던 것이다.
‘설마 소니 임원까지 나를 찾을 줄이야.’
정치인들만 나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일본 기업, 그중에 소니 임원까지 나를 찾았다.
이유야 뻔했다.
빌 클린턴과 끈끈한 관계처럼 보이니, 지금이라도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는 것이겠지.
‘로저 포터, 그 양반은 뭐 하고 있으려나?’
조지 부시의 경제 정책 보좌관인 로저 포터.
아마 그도 지금쯤, 굉장히 초조해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대선 직전에 나를 대놓고 협박했는데, 정작 대선의 승리자는 빌 클린턴으로 정해졌으니 말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빌 클린턴 당선인의 측근이 나를 이끌었다.
“미스터 리! 어서 오세요!”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활짝 웃으며 나를 환영해주는 빌 클린턴 당선인이었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자신감에 차 있는 얼굴이었는데, 46세의 나이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나에게 고마운 감정을 품은 건 확실해 보이는군.’
고마운 정도가 아니라, 나를 은인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로 빌 클린턴 당선인은 이런 말까지 내뱉었다.
“당연히 환영해야지요. 1등 공신 아닙니까!”
1등 공신이라니.
주변에 앨 고어 부통령부터 여러 사람이 있는데도 개의치 않고 이야기하는 빌 클린턴 당선인이었다.
“1등 공신이라니,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굴면 여기 계신 분들이 정말 오해합니다.”
내가 뒷머리를 긁적일 때, 앨 고어 부통령이 내게 다가와 악수를 하였다.
“당선인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당선인이 주지사였을 때부터 전적으로 지지해주셨다고요?”
“단순히 지지만 한 게 아니라, 선거 전략까지 짜줬습니다. ‘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을 기획한 것도 바로 미스터 리입니다.”
“그런 소문을 듣기는 했는데, 그게 정말이었습니까?”
“하하하, 제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앨 고어 부통령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직 빌 클린턴 당선인에게 정확한 소개를 들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이번 대선의 1등 공신이셨군요.”
나는 속으로 흡족함을 느꼈다.
미 대통령에 이어, 미 부통령의 마음을 얻다니.
리스크가 상당하긴 했지만, 역시 빌 클린턴 당선인을 밀었던 것은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 * *
많은 것을 얻고서 한국으로 귀국하니, 이번에는 한국 대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그가 말하는 변수란 왕주형 총재가 당선되는 일을 말하였다.
미래 그룹의 창업주가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혜성 그룹에 변수는 없겠지.
하지만 다행히 지지율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내가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러시아 대통령이 방한한다고요?”
“예. 다음 주에 방한한다고 합니다.”
“선거까지 보고 가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러시아 대통령의 방한이라.
뭔가 기분이 묘했다.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인 고르바초프가 한국을 방문한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소련이 몰락하고 러시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다니.
나도 나이가 들기는 한 건지, 세상이 바뀌는 것이 잘 적응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뭐, 오히려 2000년대라면 더 적응이 쉬울 수도 있겠지만.’
노사에게 익숙한 연도가 나에게도 익숙하다.
그리고 노사는 2000년대를 살던 몸이니, 아마 나도 2000년대는 곧잘 적응하지 않을까 싶었다.
“옐친 대통령은 아마 회장님을 가장 먼저 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를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러시아가 이 나라에서 자금을 얻으려면, 기댈 곳은 회장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외국의 정상이 나를 찾는다고 하는데 이걸 기뻐해야 할지, 귀찮다고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무언가를 요구할 게 뻔하니 더더욱 그러했다.
‘무엇보다 러시아 대통령이라면, 과학자 문제 때문에 만나기가 껄끄러운데.’
내가 소련에서 빼돌린 과학자가 몇 명이던가.
미사일, 로켓 관련 과학자만 50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 과학자들은 소련, 아니 러시아에서도 몇 없는 귀중한 인재들이었다.
당연히 러시아로서는 이 과학자들을 되찾고 싶을 것이다.
‘옐친 대통령이 내가 한 짓을 모르길 바라야겠지.’
쉽게 걸리지는 않을 거 같았다.
뭐 걸려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제아무리 러시아라고 과학자 몇 명 때문에 혜성과 적대하려 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러시아는 러시아고 나는 다시 혜성 그룹을 경영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1992년도 얼마 안 남았기에 신경 쓸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년에는 CDMA 휴대폰도 출시해야 했고, 혜성 반도체의 16M D램 양산 라인도 8인치로 바꿔야 했다.
256M D램도 1993년 안에 개발할 수 있게끔 최대한의 지원을 해야 했고.
자동차 역시도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혜성 자동차야 이미 고급차 브랜드로 미국 시장에 완전히 자리 잡은 상황.
유럽에서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SUV야 도요타를 능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고 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화 자동차인데, 나는 올해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지금 이대로 남들을 따라 하는 식으로 간다면, 10년, 20년이 지나도 도요타를 이길 수 없을 겁니다. 하여 우리는 남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곳, 말씀입니까?”
“저유가의 시대인 지금, 우리는 고유가를 대비해야 합니다. 엔진 성능을 개량하여 연비 좋은 자동차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30㎞대 연비를 실현하라.
이게 내가 기화 자동차에 지시한 내용이었다.
‘지금 성과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미래를 생각하면 연비 좋은 자동차는 필수지.’
앞으로 환경오염 문제가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될 거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사람들이 환경오염 문제를 신경 쓰면 쓸수록 연비가 좋은 자동차가 주목을 받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환경오염 문제가 대두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노사 말대로라면, 1990년대 후반만 되어도 환경오염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될 것이니 말이다.
‘하이브리드 기술을 제때 꺼내 들 수만 있다면, 도요타를 능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내 전략이 통한다면 도요타를 넘어서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물론 도요타라고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이 문제겠지만.
‘전자, 반도체, 자동차를 제외한 다른 계열사도 신경을 써야겠지.’
매출이야 세 곳의 비중이 절대적이긴 했다.
반도체에서만 5조 이상의 매출이 나오고 있었고 자동차의 경우 기화 자동차와 혜성 자동차를 합치면 거의 9조였다.
혜성 전자 역시도 필립스 전자의 매출을 합치면 8조가 넘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계열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매출 비중도는 낮지만 그렇다고 미래 잠재력까지 낮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특히 HS 테크가 중요해.’
혜성의 계열사는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나에게 있어 혜성 3대장만큼이나 중요한 기업이 HS 테크였다.
지분율이 98%에 달하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HS 테크는 현재 김찬희 대표를 영입한 뒤에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여러 게임사를 인수하여 규모를 급속도로 키웠는데, 내년에 필립스 전자에서 비디오 게임기를 출시할 때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 * *
대선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 옐친 대통령이 방한하였다.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 정부가 옐친 대통령을 소홀하게 대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부에서는 대대적으로 환대 행사를 하였고, 옐친 대통령도 이에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였다.
‘역시 가장 많이 나온 이야기가 경협 문제로군.’
지금 러시아에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돈이었다.
옐친 대통령이 한국을 찾은 것도 사실 돈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었는데, 실제로 김영산 대통령과 접견하고 경제 협력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에 경제적으로 많이 진출해서 경제적인 공통이해를 넓혀야 한국의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나?
“이한성 회장님.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십니까? 옐친 대통령께서 이한성 회장님과의 만남을 희망하고 계십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의 추측은 정확하였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돈을 필요로 하는 러시아 정부다 보니,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나부터 찾았다.
“옐친 대통령께서 뵙자고 하는데 당연히 시간을 내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 날.
옐친 대통령이 안드레이 외무장관과 빅토를 수석 보좌관, 바실리 재무장관 등을 대동한 채 수원의 혜성 반도체 공장을 시찰하였다.
당연히 나 역시 미리 수원 공장에 가 옐친 대통령을 환대해주었다.
“규모가 대단하군요! 혹시 면적이 어떻게 됩니까?”
“20만 평 정도 됩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면적이 2만 2,000평이니, 거의 10배에 달하는 규모군요! 역시 세계 1위 기업답습니다.”
“과찬입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두 장관과 비서진, 그리고 120명에 달하는 수행단까지 수원 공장을 보며 하나같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옐친 대통령이 한 말처럼 규모 면에서는 그리 크다고 볼 수는 없었다.
자동차 공장이나 다른 공장들과 비교하면 규모 면에서 밀리는 게 당연했으니.
하지만 수원 공장은 누가 봐도 첨단시설로 가득해 보였다.
반도체 시설을 처음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이 반도체 공장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겠지요?”
“미국에도 이보다 비슷한 규모의 공장이 하나 있습니다.”
“혜성 반도체의 공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내 말에 크게 감탄하던 옐친 대통령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러시아에도 이런 공장이 세워진다면 더 바랄 게 없겠군요.”
사실상 반도체 공장을 세우라는 압박이었다.
물론 내 성격에 이런 말을 듣고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대러시아 추진 사업이 점점 늘려가고 있으니,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겁니다. 다만, 그것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 제대로 안착해야지 가능한 일입니다.”
현재 러시아에다 여러 공장을 세우고 있었다.
노사의 이야기를 듣고 러시아가 몇 년 뒤,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것을 알지만, 설령 그렇다고 한들 선점 효과는 중요하였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든 말든, 러시아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반도체 공장이라고 못 지을 이유도 없었다.
다만 러시아 정부의 지원이 없다면 굳이 러시아에 공장을 세울 이유가 없기도 했다.
“혜성의 사업이 러시아에 확실하게 안착할 수 있게끔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옐친 대통령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로서는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우리는 웃으며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 민감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분위기는 참으로 화기애애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때, 옐친 대통령이 통역사도 잘 들리지 않을 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