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최고의 인터뷰
“어려운 발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영산 대통령이 정중하게 인사하였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이한성 회장님께서 제 초대를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야 이한성 회장님을 부르는 목적이 뻔히 보이는 거 같아서 말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대통령님이 저를 찾으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 아직 죽지 않았다. 혜성 그룹 회장이 여전히 찾아올 정도의 권력은 쥐고 있다. 이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거 아닙니까?”
단순히 나를 보고 싶어서 찾은 것은 아닐 거다.
평소처럼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고영태 비서실장을 통해 빌렸어도 되었을 터.
그런데 이렇게 직접 청와대로 불러들인 것은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셨는데도 청와대에 와주신 겁니까?”
“저에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김영산 대통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씀은?”
“세간의 시선에 신경 쓰기보다는 그저 대통령님과 했던 약속을 지키는 게 저에겐 더 중요했습니다. 부르면 언제든 찾아가겠다는 바로 그 약속을 말입니다.”
“저, 정말입니까.”
“그럼요.”
김영산 대통령은 크게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그의 성격이었으면 이런 사소한 일에 감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임덕이 오며, 그는 조금씩 고립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가장 총애하는 아들은 구속당하기까지 하였다.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당하는 일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으니, 김영산 대통령의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
이런 시기에 내가 김영산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하였으니 그로선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한성 회장님께는 감사하면서도 죄송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대통령께서 제게 해 주신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해 준 게 뭐가 있습니까. 혜성 그룹은 알아서 컸고, 오히려 제가 더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뭐 사실 방해를 안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재계 1위라는 이유로 방해를 할 법도 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한성 회장님의 말씀이 참 위안이 됩니다. 요즘 들어 사실,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의구심이요?”
“저에 대한 의구심이었습니다. 과연 저는 이 자리까지 올라서 무엇을 했는가. 이 나라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가. 그것이 의문이었습니다.”
“…….”
“제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제가 그만큼 부족했던 거 같은데, 그래도 이한성 회장님이 자리를 빛내주시니 정말 마음이 놓입니다.”
“대통령님은 충분히 찬사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IMF를 일으켰다면 모를까, 지금의 김영산 대통령은 원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개혁도 어중간했고, 경제 성장률도 80년대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대통령으로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규모를 키워가던 조폭들을 확실하게 정리한 데다, 금융실명제로 지하조직까지 와해시켰다.
더군다나 하나회 척결도 무시 못 할 치적이었다.
겉으로 크게 티가 나지는 않더라도 이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해 준 셈이었다.
‘뭐 그렇다고 비판할 점이 아예 없는 대통령은 아니지만.’
굳이 김현 일을 거론할 필요도 없었다.
5공만큼은 아니지만, 김영산 정권도 부정부패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정책 이해도가 부족한 면도 많이 보였고 말이다.
그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도 많았다.
‘이번 조선총독부 철거도 갑작스럽긴 했지.’
나는 이왕 기회가 생긴 김에 김영산 대통령에게 조선총독부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이 회장님.”
“조선총독부 철거를 갑작스럽게 진행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하하, 이한성 회장님도 그게 궁금하셨습니까?”
“예. 물론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 조선총독부 철거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다만,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궁금했습니다.”
내가 솔직하게 말하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 부담을 차기 정권에 넘겨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임기 전부터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이한성 회장님께 예고하지 않았던 것은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혜성 그룹은 일본과의 관계를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이미 미국에서 박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인제 와서 국가 간의 사이가 안 좋아지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뭐, 일본 정부가 본격적으로 나서서 나를 견제한다면 조금 골치 아파지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 * *
조선총독부 철거와 관련해서 우익 단체와 서울시의회에서의 거센 반발이 생겨났다.
물론 일본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바로 독도 도발로 대응하는 일본이었다.
그만큼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중요시하던 상징물이었다.
이 같은 우익 단체와 일본의 거센 반응에 국내는 큰 소란이 일어났다.
‘그래도 대선은 문제가 없겠군.’
변수는 변수였지만, 김태중 후보가 당선되는 것엔 지장이 없어 보였다.
범야권에서 왕주형 후보로 단일화를 시도하였지만, 지지율은 여전히 김태중 후보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던 것이다.
‘미국도 이변은 없다고 봐야겠지?’
어느덧 10월 말.
미국 대선 날도 이제 며칠이 채 안 남았다.
나는 오랜만에 빌 클린턴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선거가 코앞이라 바쁘기 그지없던 빌 클린턴이지만, 나의 전화는 바로 받아 주었다.
“지지율을 6% 앞서고 있다 들었습니다. 이제 빌 클린턴 후보께서 대통령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인 거 같습니다.”
-아직은 방심할 수 없습니다. 로스 페로 후보의 지지자들이 로스 페로 후보를 포기하고서 조지 부시 대통령을 찍는다면 결국 패배하게 될 겁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긴, 빌 클린턴이 방심할 수 있는 상황은 절대 아니기도 했지만 말이다.
“로스 페로 후보는 끝까지 조지 부시 대통령의 발목을 붙잡아 줄 겁니다.”
-하하, 저희 참모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미스터 리에게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미스터 리는 한국에 있어도 어느 미국인보다 더 미국의 사정을 꿰뚫어 보시는 거 같습니다.
“정보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 보람이 있는 듯합니다.”
-어쨌든, 미스터 리에게는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미스터 리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빌 클린턴 입장에서는 설령 선거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남는 장사일 것이다.
그의 나이 겨우 46세.
정치인으로서는 이제 신예나 다를 게 없는 나이였다.
그런데 그는 신예의 나이에 현직 대통령과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었으니, 이는 실로 엄청난 정치적 자산이 아닐 수 없었다.
“감사 인사는 취임하고 나서 듣겠습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당선이 확정되면 가장 먼저 미스터 리에게 감사 인사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이 그저 인사치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뜻대로 하라고 말하고서는 전화를 끊었는데, 며칠 뒤 그가 인터뷰에서 한 발언을 듣자 단순히 인사치레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한성 회장이 빌 클린턴 후보의 선거 참모였다?>
<빌 클린턴 후보, 선거가 끝난 후에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한성 회장께 감사 인사를 전하겠다’ 발언 화제.>
<혜성 그룹 이한성 회장의 영향력은 한국을 넘어 미국 대통령도 주관한다!>
빌 클린턴의 행보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대선에서 이긴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빌 클린턴이 혜성 그룹을 언급하며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니, 세간에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했고 말이다.
* * *
11월 3일.
마침내 빌 클린턴이 당선되자, 한국 사람들은 환호하였다.
“이제 미국과의 관계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는데?”
“당연하지! 빌 클린턴을 밀어준 사람이 혜성 그룹 회장이라잖아!”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유야 단순했다.
이미 빌 클린턴의 인터뷰로 한성과 빌 클린턴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알려진 상황이었다.
한성이 한국 사람인 만큼, 빌 클린턴의 당선으로 한미 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양반도 대단해. 어떻게 빌 클린턴이 당선될 줄 알고 밀어줬을까?”
“내가 말했지? 혜성 그룹 회장에게 신기 있다고? 지난 대선 때 김영산을 밀어줬던 것도 혜성 그룹 회장이었어!”
“허, 그러고 보니 그러네?”
“하는 사업마다 저리 잘 되는 것도 신기가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겠나?”
사람들은 진지하게 그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지어 정계나 재계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한성 회장이 김태중 후보를 밀어줬으니, 결과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겠지?”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나. 신기 있는 양반인데, 그 양반이 김태중 후보를 선택했으면 이미 결과는 정해진 거지.”
“솔직히 신기가 아니더라도 김태중 후보의 필승이야.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국민들도 이한성 회장이 밀어주는 이에게 표를 던질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김태중 후보에게 더 많은 돈을 베팅할 걸 그랬네.”
“그러게, 왜 그런 실수를 했나. 이한성 회장이 이종석 의원을 내치고 김태중 후보를 밀어줄 때부터 진즉 선택했어야지.”
“누가 알았나. 미국 대선까지 이리될 줄.”
정재계의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듯, 대선 결과는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김태중 후보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빌 클린턴의 인터뷰로 한성의 지지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이 되었으니, 김태중 후보는 더더욱 유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으나, 한성이 김태중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후보님,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이한성 회장 덕에 어렵게 갈 수도 있는 길을 쉽게 가게 되었군요!”
김태중 후보의 선거 캠프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누구라도 지금 상황에 놓이면 기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승부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모두 방심의 끈을 놓지 마세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정작 가장 기뻐해야 할 김태중 후보는 차분하게 측근들을 다독였다.
물론 그라고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단지, 자신의 지지자들을 의식해서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대통령이 된 이후가 문제로군. 이한성 회장이 미 대통령의 친분까지 얻었으니, 꼼짝없이 혜성 그룹을 밀어줄 수밖에 없겠어.’
김태중 후보는 기쁜 상황에서도 속으로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한성에게 입은 은혜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혜성 그룹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차기 대통령을 뒷배로 두기까지 했으니, 사실상 김태중 후보는 한성의 뜻을 절대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김태중 후보로서는 실로 우려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이한성 회장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원칙을 지키고 나라를 위해 힘쓰길 바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