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결국 부쉈군
이종석은 처음 한성에게서 차차기 대선을 노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로선 당연히 자신을 선택할 줄 알고 있었기에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한성 회장은 왜 내가 아닌, 김태중 후보를 선택한 거지?’
혜성 그룹이 미래 그룹과 한창 충돌하였을 당시, 그는 미래 그룹을 배신하고 혜성 그룹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때 한성에게서 약속을 받아냈다.
대선에서 밀어주겠다는 약속을 말이다.
물론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법이니만큼, 한성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종석은 한성과 관계 유지에 최선을 다하였다.
누가 대통령이 되면 혜성 그룹에 이익이 갈지 꾸준하게 어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성이 선택한 것은 그가 아닌, 김태중 후보였다.
‘당신이 포기하란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이종석은 이를 악물었다.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대통령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한성이 말한 것처럼 5년을 더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 있었다.
5년 뒤에는 김태중이라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지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런 선택은 승산이란 게 제로에 가까웠을 때 하는 선택이었다.
만약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람인 이상,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가능성이 낮은 것도 아니지.’
혜성 그룹의 지원이 있었다면 이 같은 가능성이 90%까지 치솟았을 것이다.
하지만 혜성 그룹의 지원이 없더라도 승산은 충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경선에서만 이기면 되는 승부였다.
한국은 미국처럼 대통령 후보 개인의 인기에 승부가 결정되기보다는, 당의 지지율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 편이었다.
즉, 인물론보다는 당파성으로 대선 결과가 정해진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각 정당 지지율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게 여당이었다.
이 말은 경선에서만 이긴다면 대선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김태중 후보가 아무리 대통령으로서 확실한 브랜드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경선에서만큼은 내가 유리하다.’
본래 두 개였던 정당이 하나로 합쳐진 게 지금의 여당이었다.
그리고 여당에서 김태중 후보의 계파는 지분이 그리 높지 않았다.
반면 이종석의 경우, 킹 메이커로 활동한 경력 덕분에, 여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현재는 김영산 대통령의 계파를 흡수한 상태였으니, 경선에서의 싸움은 이종석이 유리할 수밖에 없으리라.
“후보님, 이한성 회장이 한국으로 귀국했다고 합니다.”
“으음.”
그렇게 한창 전의를 불태우며 경선 준비를 하던 중, 그의 귀로 한성의 소식이 들려왔다.
오랫동안 미국에 가 있던 한성이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었다.
‘어떻게 하지? 찾아가야 하나?’
한성이 차차기 대선을 노리라고 했을 때야 기분이 나쁘기는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한성과 대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종석이 노리는 것도 경선에서 승리한 뒤, 승리자로서 한성을 찾아가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그래야지만, 동등한 위치에서 다시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지금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다른 후보들은 한성의 저택 문턱이 닳도록 한성을 찾고 있겠지만, 지금 그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괜히 지금 한성의 눈에 들어봐야 좋은 꼴을 볼 일은 없을 테니, 최대한 만남을 피하도록 하였다.
“이한성 회장에게 연락할까요?”
“아니.”
“네?”
“당분간은 이한성 회장과는 만나지 않도록 하지.”
보좌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그의 결정이 의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세 과정에서 한성과의 친분을 톡톡히 이용하던 이종석이 아니었던가.
동료 의원들을 만날 때도 늘 한성과의 친분을 언급하며 열심히 자랑하던 이종석이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에 한성과의 만남을 피한다고 하니, 보좌관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거로 알고 더 이야기하지 말게.”
“아, 알겠습니다.”
이종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한성을 만나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을 뿐인데, 큰 죄라도 진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그 정도로 한성의 존재감은 커진 듯싶었다.
‘걱정할 게 뭐 있겠어. 제아무리 혜성 그룹 회장이라고 하나,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나에게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거야.’
재벌의 위세가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재벌은 재벌이었다.
감히 대선에서 훼방을 놓지는 못할 터.
하지만 이런 그의 생각과 달리, 다음 날부터 급격하게 그를 저격하는 기사가 늘어났다.
혜성 그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고려일보에서 주로 기사를 올렸는데,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하였다.
한성이 그를 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다니.’
이종석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한성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대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한성도 침묵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에 하나 경선에서 그가 이긴다면 결국 한성이 밀어줘야 할 사람은 이종석뿐이었으니까.
그런데 한성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를 공격하였다.
심지어 한성의 공격은 언론 공세뿐만이 아니었다.
“지지 철회?”
“예. 김 의원과 박 의원이 갑자기 후보님에 대해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니, 그들이 갑자기 왜?”
“소문으로는 김 의원과 박 의원이 이한성 회장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한성 회장과 자리를?”
그의 편을 들던 3선, 4선 의원들이 갑자기 지지를 철회하며 김태중 후보의 편으로 돌아섰다.
한성이 한국으로 귀국하고 불과 일주일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었다.
‘빌어먹을! 이한성 회장의 한마디에 철새처럼 움직이다니!’
혜성의 영향력이 강해졌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이야.
하긴, 혜성의 자금력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연 매출이 수십 조인데, 한성 본인도 천문학적인 자금을 손에 쥐고 있었다.
심지어 혜성 그룹의 정보력이 안기부를 넘어섰다는 소문이 있으니 정치인들이 혜성 그룹의 눈치를 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설마 여기서 더 훼방을 놓는 것은 아니겠지?’
이미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 그였다.
여기서 더 공격받다간 만신창이가 되고 마리라.
하지만 다음 날, 충격적인 기사가 보도되었다.
<유명 정치인, 사생아 의혹!>
<여당의 이 모 의원, 불륜 사생아에 손찌검까지. 지저분한 과거 공개!>
이종석은 기사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괴성을 질렀다.
자신이 필사적으로 숨겼던 진실이 수많은 증거와 함께 만천하에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 * *
기사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누군가의 몰락을 다룬 기사였는데, 이상하게 보는 내내 웃음이 나왔다.
“이종석 의원도 이제 끝이군요.”
킹 메이커라 불렸던 사람답게 여당이 비판받을 때도 이종석 의원은 다른 꼭두각시를 대타로 내세워 대신 비판을 받게 하였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대선에 출마하려고 하니, 지저분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어, 순식간에 온 국민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역시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같았다.
(아직 끝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지금 시대에 불륜이나 사생아 건 정도로는 정치 인생이 끝나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대통령이 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 되어 버렸지요.”
대통령뿐일까?
5선이나 원내총무에 도전하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
아니, 내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공격한다면 의원직을 아예 박탈당할 수도 있으리라.
‘뭐 그래도 무릎까지 꿇었으니 더 공격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종석 의원은 결국 나를 찾아와 사과하였다.
내 뜻에 따르지 않은 것에 본인이 직접 무릎을 꿇고 사과한 것이다.
(이종석이라는 패를 버리는 게 아깝지 않으냐? 차차기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별로 아깝지 않습니다.”
노사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이종석 의원은 처음부터 쓰다 버릴 패였다.
차차기 대선까지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종석 의원이 먼저 내 지시에 거부했으니 그를 써먹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애초에 차차기 대선에 내보냈어도 당선됐을지도 미지수고.’
브랜드랄 것이 없는 정치인이었다.
여당 지지율이 엄청나게 높은 상황이 아니라면 낙마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더 두고 볼 필요 없이 명분이 생겼을 때 쳐내는 게 좋았다.
내가 확실하게 쳐내야 일종의 일벌백계 효과도 볼 수 있을 테니까.
(하긴, 5년 뒤라면 누가 대통령이 되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겠구나.)
그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지금도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번 대선은 김태중 후보의 승리로 끝이 나겠지요?”
(다른 변수가 없다면 그렇게 되겠지.)
“이 상황에서 변수가 생길 일이 있을까요?”
(모르는 거다. 원래 선거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각 정당별 지지율과 후보 개인의 인기를 생각하면 김태중 후보의 필승처럼 여겨졌다.
‘설령 범야권 후보들이 단일화를 한다고 해도 김태중 후보를 이길 수 없을 거야.’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안심할 때, 노사가 말했던 변수라는 것이 발생하였다.
그 변수란 다름 아닌, 조선총독부 철거였다.
* * *
(기어코 부셨군.)
노사가 TV 화면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김영산 대통령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을 벌일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김영산 성격이 이렇긴 하지. 그래도 저 흉물이 부서지는 모습을 다시 보니 통쾌하긴 한 거 같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전에 조선총독부 철거를 언급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임기가 몇 개월 안 남은 시점에서 조선총독부를 철거할 줄은 몰랐다.
(일본과의 충돌은 필연이겠어.)
“대선에도 영향이 갈까요?”
(당연히 가겠지. 대일 관계가 그 어떤 때보다 악화할 텐데 말이야.)
“확실히 변수긴 변수군요.”
대선 결과가 바뀔 정도의 변수일지는 아직 예측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호재가 아닌 것은 분명하였다.
‘뭐,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긴 했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청와대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이한성 회장님. 이른 시일 내에 청와대로 방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김영산 대통령이 나를 찾는 모양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영태 비서실장에게 답변하였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방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영태 비서실장은 살짝 놀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안 그래도 레임덕인데,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조선총독부 철거를 벌여 여당 내에서도 말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재벌 총수라면 김영산 대통령과의 독대 자리를 피하기 바빴다.
그런데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가까운 시일 안에 찾아뵙겠다고 하니 고영태 비서실장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구태여 김영산을 만날 이유가 있겠냐? 이미 끈 떨어진 신세인데 말이야.)
“지금까지 신세 진 일이 많았는데,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으로는 이번이 마지막 독대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신세는 김영산이 더 졌던 거 같은데. 그리고 그런 거로 따지면 이종석이도 마찬가지 아니야?)
“뭐, 김영산 대통령에게 정이라도 들었던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노사가 워낙에 평가를 안 좋게 해서 김영산 대통령을 마냥 좋게 보지는 않았었다.
대학 다닐 때야, 마음속 깊이 존경했던 정치인이지만, 사업가 입장으로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영산 대통령이 당선되고 대통령으로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자, 그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노사의 세계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내가 사는 세계에서만큼은 혜성 그룹에나 이 나라에나 김영산 대통령이란 존재가 이롭게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