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소니 회장이었으면 이랬겠어?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혜성 그룹은 재계 서열 1위의 기업이었다.
한국에서는 그 누구도 혜성 그룹을 무시하지 못했다.
설령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대선 주자들이 나를 한 번이라도 만나려고 안달 난 것만 봐도 한국에서 내가 받는 대우가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외국이라고 크게 다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혜성 그룹은 세계적인 기업과 비교해도 규모 면에서나 매출 면에서나 밀리는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인들도 나를 무시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은 내 착각에 불과했다는 건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이런 모욕을 받고 참아야 하나?’
미국 대통령이나 부대통령이 저런 말을 했어도 솔직히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장에야 머리 숙인 척을 해도 속으로는 복수심을 불태웠을 터.
그런데 지금 내게 모욕을 주는 상대는 대통령도, 부대통령도 아닌 일개 보좌관에 불과하였다.
한국 대통령조차 예우를 갖추는 나에게, 제아무리 미 대통령의 보좌관이라고 하나, 일개 보좌관에게 무시당한 상황이었다.
나로선 참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하신 발언, 백악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공식적인 입장이든, 비공식적인 입장이든, 이한성 회장께서는 제가 한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숫제 아랫사람을 대하듯 대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로저 포터라는 자에게 어지간히 무시 받는 거 같았다.
“모리타 마키오 회장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소니 회장을 언급하며 그리 말하니, 로저 포터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성 회장은 혜성이 소니와 동급이라고 착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착각이라…….”
-왜요? 소니와 동급 취급해 주길 바랍니까? 그걸 원한다면 허튼짓하지 마시고 제 말을 잘 따르세요. 그러면 언젠가 소니와 동급 취급을 받게 될 겁니다.
뿌드득.
나는 이를 갈았다.
오랜만에 겪는 굴욕이라 그런지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충고 고맙습니다. 덕분에 확실하게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민주당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하자고 말입니다.”
예전이었으면 구태여 분노를 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인내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을 노렸을 테지.
하지만 재계 서열 1위로서의 자부심 때문인지 화를 참기가 쉽지 않았다.
곧 정권이 바뀔 텐데, 굳이 화를 참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이한성 회장.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누가 후회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요.”
나의 날 선 대답에 수화기 너머로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로서는 내가 이리 나올 줄 예상 못 했던 모양이다.
‘얼마나 나를 무시했으면…….’
아무래도 미국에서 너무 조용히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일개 보좌관이 나를 무시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괜찮으십니까?”
통화가 끝나자, 양준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아 보였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미국 대선이 우리나라의 대선보다 중요할 수도 있겠어.”
“예?”
의아해하는 양준현을 무시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도 빌 클린턴을 지원할 생각이었는데, 더 확실하게 지원해야겠어.’
괜히 나비효과가 일어나면 곤란하였다.
미국에서 사업을 접게 만들겠다는 로저 포터의 협박이 현실화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나저나 로저 포터가 하는 말을 들으니, 이래저래 소니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호적수인 거 같군.’
같은 외국 기업이고 심지어 같은 동양이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늘 비교 대상이었다.
황색 언론들은 한일 관계를 거론하며 일부로 경쟁을 부추기기도 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소니는 반드시 꺾어야 할 호적수였다.
그리고 소니를 꺾기 위해서는 이번 대선에서 빌 클린턴이 꼭 승리해야만 하였다.
소니라면 조지 부시를 밀어주고 있을 게 뻔했으니까.
* * *
로저 포터와의 일이 있고 난 이후, 공화당 정치인들이 나와의 연락을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로저 포터가 나를 친민주당 인사라고 소문이라도 낸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는 일이다. 빌 클린턴이 당선된다면 8년 동안은 민주당의 시대가 될 테니까.’
8년 뒤가 문제지만, 그거야 그때 생각할 일이었다.
어차피 그때의 혜성 그룹은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커져 있을 터.
나비효과로 민주당의 시대가 계속 이어질 수도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친민주당 인사로 낙인찍힌 것에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어서 오세요. 미스터 리.”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빌 클린턴 후보자님.”
나는 빌 클린턴을 찾았다.
이미 그는 나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거 하나만 믿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대선이 끝나기 전까지, 아니 끝난 이후에도 계속 얼굴도장을 찍어 내 얼굴을 기억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물론 대선에서 확실하게 이기게끔 지원할 필요도 있었고 말이다.
“경선에서 거의 승리가 확정 난 거나 다름없다고 들었습니다. 후보자님, 축하드립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이게 다 미스터 리의 덕분입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저에게 얼마나 많은 조언을 해 주었습니까. 더군다나 주지사로서 활약할 수 있게 도움도 많이 주셨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꼭 필요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겁니다.”
일단 빌 클린턴이 나를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은 확실한 듯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보다, 빌 클린턴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무명 인사였던 그가 경선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도 그리 기쁘지가 않은 듯싶었다.
‘설마 대선에서 질 거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때, 마침 빌 클린턴이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운이 좋아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된다고 해도, 제가 과연 조지 부시 대통령을 이길 수 있을까요. 차라리 불출마하는 게 낫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싸우기도 전에 불출마를 거론하는 빌 클린턴이었다.
민주당 경선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는데도 여전히 조지 부시는 넘어설 수 없는 강적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인제 와서 불출마라니요?”
“지금 시점에 괜히 대선에 출마해봤자,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다면 그대로 제 정치 인생은 끝나고 말 겁니다.”
사실 그의 생각이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작년보다는 덜하다고 하지만, 조지 부시의 인기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냉전을 종식하고 이라크전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으니, 인기가 상당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전부터 계속 말하지 않습니까.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경제 하나만 집중적으로 공략한다면, 대선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음.”
“지금도 불경기가 진행 중입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던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정책이 오히려 악수가 되어 더 큰 불경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제가 말씀드렸던 이 슬로건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냉전의 시대가 아닌, 경제 전쟁의 시대라는 사실을 함축한 겁니다.”
“경제 전쟁의 시대라.”
“대선을 진행하다 보면 미국 시민들도 알게 될 겁니다. 전쟁이나 냉전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경제가 우상향의 오르막길을 오르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내 말에 빌 클린턴의 얼굴에도 다시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경제만 공략하면 된다는 내 말을 그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싶었다.
“그리고 후보자님. 이 말을 안 하려고 했지만, 후보자님께서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면, 저희 혜성 그룹은 미국에서의 사업을 접어야 합니다.”
나는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로저 포터와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로저 포터가 나에게 전화하여 무슨 소리를 했는지 다 이야기한 것이다.
“아니, 로저 포터가 미스터 리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까?”
“예. 민주당을 지지하면 개인적으로 파멸시킬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였습니다.”
내가 로저 포터의 만행에 관해 폭로하자 빌 클린턴이 진심으로 격노하였다.
“그런 협박을 하다니! 하는 짓이 정말 졸렬하기 그지없군요!”
“졸렬하기는 하나, 효과만큼은 확실합니다. 저조차도 잠시나마 두려움을 느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미스터 리가 벼랑 끝에 서게 되었군요.”
“아닙니다. 이게 왜 후보자님 때문이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후보자님께서 대통령이 될 텐데, 걱정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미스터 리는 정말 제 지지자들보다 더 저를 믿으시는 거 같습니다.”
빌 클린턴은 감동한 표정이었다.
하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절대적인 믿음을 보여줬으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대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불출마에 관해서 걱정이 많았었는데, 이제 완전히 걱정을 털어놓기로 하였습니다.”
“현명한 결단을 내리신 겁니다. 후보자님은 대통령이 되실 몸입니다.”
“하하, 미스터 리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 말겠습니다.”
마음을 굳세게 먹은 그를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다.
정치야 나보다 그가 더 잘 알겠지만, 나에게는 노사가 있었다.
노사에게는 연륜이란 게 있었고, 미래 정보도 있었기에 그가 알려 준 사실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빌 클린턴에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 *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아서 미국의 대선 상황을 지켜보았다.
언제 어떤 식으로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니 내가 자리를 지키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한쪽 귀도 열어두어 한국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준비하였다.
‘이종석 의원이 내 말을 무시했군.’
차차기 대선을 노리라고 당부했었는데, 기어코 경선에 끝까지 남아서 김태중 후보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경선 흐름을 보면 김태중 후보가 이길 것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이종석 의원이 내 이름을 팔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선거 유세에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가면 응징을 해 줘야겠어.’
그래도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어서 미국에 계속 남아 있었다.
다행히 미국의 대선은 예측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빌 클린턴은 결국 경선에서 승리하여 민주당 후보가 되었고, 러닝메이트로 앨 고어를 선택하였다.
또한, 미국의 불경기가 심해짐에 따라 조지 부시의 인기도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빌 클린턴이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를 외치기 시작하니 단숨에 인기가 급상승하였다.
여기에 조지 부시의 득표율을 갉아먹을 로스 페로가 출마 선언하기까지 했으니, 빌 클린턴의 당선은 더욱더 유력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나비효과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긴장을 낮춰도 될 거 같았다.
한국의 정치 흐름이 원 역사와 크게 달라진 것과 달리, 미국의 역사는 변화가 그리 크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변화가 없는 것은 이번 대선뿐이겠어. 내가 빌 클린턴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니, 차기 대선은 나비효과가 벌어질 수밖에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