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레임덕이라
윈도우와 오피스 제품군의 성공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1987년, 1990년, 그리고 1991년.
이렇게 세 번의 액면 분할로 1달러까지 내려갔던 주가가 2달러를 넘어설 정도였다.
윈도우 3.0의 판매량은 무려 1,300만.
마이크로소프트의 매출은 20억 달러로 작년과 비교해서 50% 이상의 매출 상승세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PC용 소프트웨어 업체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빌 게이츠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스티브와 비교하는 것을 그저 언론의 설레발로만 치부했었는데…… 이제는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겠군.’
오래전부터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는 경쟁 대상이었다.
두 사람이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언론에서 두 사람의 대결 구도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나온 이후,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쪽은 빌 게이츠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꾸준한 성장세를 거두었고, 이젠 매출까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가 어느 시기부터 폭발적인 성장을 거두자, 두 사람의 대결 구도는 다시금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넥스트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성장세를 넘어선, 매출만 따졌을 때 매년 300% 가까운 성장세를 거뒀기 때문이었다.
이미 개인용 시장은 완전히 넥스트로 넘어간 상태.
심지어 기업용 시장도 조금씩 넘보고 있는 넥스트였다.
이런 상황이니 빌 게이츠로서는 안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혜성까지 소프트웨어 업체를 차렸다는 점이다.’
사실 빌 게이츠가 넥스트를 까다롭게 여겼던 것은, 넥스트나 스티브 잡스보다는 그 뒤에 있는 한성이란 존재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한성의 혜성 반도체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PC 제조업체에 실로 막대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더군다나 한성의 자금력은 측정 불가일 정도로 엄청난 수준을 자랑하였다.
오죽하면 한때 세계 제일의 전자 메이커로 불렸던 필립스 전자를 인수할 정도였다.
‘스티브 잡스만큼이나 무서운 경쟁자가 될 거 같은데, 문제는 둘이 사실상 동맹이라는 거야.’
빌 게이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IBM, 제니스 데이터 시스템 등 든든한 동맹이 있었다.
하지만 빌 게이츠가 보기에, 스티브 잡스의 곁에 모여드는 세력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인텔, 애플에 이어 이제는 혜성까지 넥스트의 동맹으로 집결하는 셈이었으니까.
‘아무래도 혜성 그룹 회장을 다시 만나든가 해야겠어.’
넥스트의 주주이기도 하니, 아군으로 끌어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만 있다면,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IT 업계에서 혜성을 적대했다간, 제아무리 마이크로소프트라고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할 것이니 말이다.
* * *
1991년은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해였다.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것은 고대하고 고대하던 D램 반도체 시장에서 1위를 달성했다는 사실이었다.
“축하합니다. 미스터 리.”
“스티브, 감사합니다.”
역시 D램 반도체 시장에서 1위 한 것은 대단한 일이긴 했는지, 한창 사업하느라 바쁠 스티브 잡스가 한국을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저는 혜성이 반도체 시장의 지배자가 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지배자라 칭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하, ‘아직’인가요?”
“그렇죠. 아무래도 지금은 시장에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한다고 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절대적인 지배력은커녕 이제 막 갑의 위치에 선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다시 예전의 위치로 돌아가고 마리라.
“그래도 기회는 많으니, 지금처럼만 한다면 언젠가 스티브의 말처럼 될 겁니다.”
“하긴, 지금 혜성 반도체의 기세를 보면 단기간 안에 시장에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 거 같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가 생각하는 단기간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1~2년을 말하는 거라면 아무리 혜성이라도 힘든 일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혜성 반도체가 일본을 넘어선 것은 미국의 대일 제재 때문이었지, 오롯한 혜성 반도체의 역량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3년이란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완전히 일본 업체들을 압도할 역량을 갖추게 될 거다.’
이미 일본 업체들과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내년의 혜성 반도체가 올해의 혜성 반도체보다 더 무서울 터.
지금 기세라면 길어야 5년이었다.
‘3년 안에 혜성 반도체에서만 매출 10조를 찍고 만다.’
참고로 현재 혜성 반도체의 매출은 5조였다.
예전에는 그룹 총매출로 따져도 5조가 안 됐는데, 이젠 단일 계열사에서 5조 매출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미스터 리의 결단이 놀랐습니다. 남들이 1M D램을 포기할 때, 미스터 리는 1M D램에 오히려 승부수를 띄었다면서요?”
나는 피식 웃었다.
미래의 정보를 활용한 거지만, 제삼자의 눈으로 봤을 때는 실로 놀라운 승부수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승부수에 성공한 나는 그야말로 천재적인 승부사처럼 여겨질 테고.
“사실, 스티브의 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 덕이라니요?”
“스티브가 넥스트의 CEO이지 않습니까? 저는 스티브의 넥스트가 사고 한번 제대로 쳐줄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미래 정보도 미래 정보지만, 실제로 나는 넥스트와 마이크로소프트의 활약을 기대하였었다.
마이크로소프트 하나만으로도 컴퓨터의 수요가 폭발적이었는데, 넥스트라는 막강한 경쟁자까지 더해진다면 당연히 컴퓨터의 수요가 더 늘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넥스트는 마이크로소프트조차 경계할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연스럽게 컴퓨터의 수요로 이어졌고 말이다.
“하하, 한마디로 저를 믿고 승부수를 던졌다는 의미군요.”
“예. 사실 결과가 정해진 승부수였다고도 볼 수 있죠.”
“이거 기분이 좋군요. 미스터 리가 저를 이렇게까지 믿어주다니.”
“스티브를 믿지 않았다면 넥스트에 투자할 일도 없지 않았겠습니까?”
내 말에 스티브 잡스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저기서 온갖 찬사를 들었을 텐데도 나에게 듣는 몇 마디 칭찬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미스터 리,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꽤 성과를 보이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혜성 반도체는 D램 반도체에서만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몇 년간 꾸준한 투자를 한 덕분에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나름대로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예. 생산은 파운드리로 하는 터라,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몇 가지 부문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시스템 반도체의 압도적인 강자는 여전히 인텔이지만 말입니다.”
“파운드리라.”
스티브 잡스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저도 파운드리에 관해서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 반도체 기업들의 유행이라죠?”
“예. 아무래도 그게 이익이니 그렇습니다.”
“흥미롭군요.”
“혹시 투자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동현 반도체의 지분을 인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내 말에 스티브 잡스는 눈을 크게 떴다.
“동현 반도체의 지분을요?”
“스티브도 아시겠지만, 동현 반도체는 앞으로 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할 겁니다. 시스템 반도체 업체들의 동향만 봐도 동현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가 늘어날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애플을 시작으로 이제는 인텔까지 동현 반도체에 파운드리를 의뢰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 스티브의 자금이 조금 노는 거 같은데, 동현 반도체에 지분 투자한다면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동현 반도체의 지분을 나눠주는 선택은 스티브 잡스가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어쩌면 혜성 반도체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이 동현 반도체였으니까.
하지만 동현 반도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더 많은 아군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동현 반도체의 아군이 되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머지않은 미래에 애플의 CEO가 될 사람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스티브가 동현 반도체의 주주가 된다면 나와의 관계도 더 끈끈해지겠지.’
적어도 타도 MS를 이루기 전까지는 스티브 잡스와 동맹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다.
물론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가 된 이후에는 필연적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되겠지만 말이다.
“동현 반도체에 투자할 기회를 주신다면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리는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지분을 얼마나 인수할지는 스티브의 역량에 달려있을 겁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미스터 리가 기회를 주셨으니,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눈빛을 반짝이며 그 같이 대답하는 스티브 잡스를 보며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반응만 봐도 동현 반도체가 미국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동현 반도체가 이 정도인데 혜성 반도체는 얼마나 탐내고 있을까?’
만약 내 자금력이 천문학적이라는 소문이 나지 않았다면 너나 할 것 없이 투자 제안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 * *
1991년은 늘 그랬듯,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끝이 났다.
물론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유야 혜성 반도체 때문이었다.
세계 제일의 반도체 업계가 된 것과 더불어 매출 5조를 기록한 일 때문에 언론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슬슬 혜성 반도체도 상장을 고려해봐야 하나?’
언론에서도 혜성 반도체의 상장 이야기를 거론하며 은연중에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아마 개인 투자자고, 기관 투자자고 할 것 없이 모두가 혜성 반도체의 상장을 기대하고 있겠지.
상장만 한다면 혜성 전자의 10조 정도야 거뜬히 넘어설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기세를 보면 20조도 가능할 거 같았다.
뭐, 10년 뒤에 상장한다면 20조가 아니라 200조도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창 혜성 반도체의 상장을 고민하며 상념에 빠져있는데 이소희가 손님이 찾아왔다고 말하였다.
“요즘 대통령 아들 때문에 소란이던데, 이 회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오랜만에 찾아온 권오중 회장이 불쑥 그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생각하긴 뭘 어떻게 생각합니까. 잘못한 것이 있으니, 벌을 받는구나 생각하고 마는 거죠.”
“역시 혜성 그룹 회장쯤 되니, 정치적인 일에 신경을 안 써도 되는가 봐?”
“왜 또 말을 그렇게 하고 그러십니까. 혜성이라고 뭐가 다르다고요.”
“다르지. 다르고말고. 매출부터가 비교 안 되지 않나.”
“뭐 그건 그렇긴 하죠.”
“자네가 그렇게 인정해 버리니 뭔가 기분 나쁜데?”
얄밉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권오중 회장의 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김현 씨가 검찰 수사받는 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내 말은, 이제 대통령도 레임덕이 오는 게 아니냐는 거야.”
“레임덕이라. 겨우 4년 차인데, 너무 이른 판단 아닙니까.”
“겨우 4년 차라니. 벌써 4년 차인 거지. 대통령의 임기도 이제 1년밖에 안 남았는데, 레임덕이 올 만하지 않겠어?”
확실히 세상이 좋아지긴 한 거 같았다.
5공 시절에는 레임덕 운운하는 기업가란 아예 존재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애초에 임기 끝이 끝이라는 보장이 없기도 했고.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내가 용건을 물으니, 권오중 회장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의, 이 회장의 생각이 궁금하네. 이 회장은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 거라고 생각하나?”
어쩐지.
레임덕 운운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를 물으려고 그리 길게 말한 모양이었다.
‘이거 또 질문 공세에 시달리겠는데?’
지난 대선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내 예측력에 대한 평가가 더 올라갔으니, 훨씬 많은 질문을 받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