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지
“약속했던 대금은 여기 있습니다.”
윤상덕은 달러 뭉치가 들어있는 봉투를 마케예프 설계국 국장에게 건넸다.
그러자 마케예프 설계국 국장이 탐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가 건네준 봉투를 열어보았다.
‘참, 내 상황도 우습군. 안기부 간부 출신이었던 내가, 혜성 그룹 직원이 되어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 고위 관료에게 뇌물을 주고 있다니.’
혜성 그룹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이런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물론 입사하고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다짜고짜 소련에 보낼 때는 조금 수상하다고 여기긴 했었지만 말이다.
“하하하, 약속은 확실히 지켰구려!”
“감히 누구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까지는 문제없이 이동시키겠소. 그 뒤는 사우스 코리아가 알아서 할 문제고.”
윤상덕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이미 정부와의 합의는 다 끝낸 상태였다.
애초에 마케예프 설계국 과학자들이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윤상덕이 신경 쓸 일이 아니기도 했고.
‘그나저나 북괴 놈들이 이번 일을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텐데, 괜히 불상사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북한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최초로 보고한 게 바로 그였다.
마케예프 설계국장이 대놓고 노스 코리아를 거론한 탓에 북한의 개입을 알아차린 것이다.
‘혜성에서 경호를 강화해 준다고 하니, 그걸 믿는 수밖에 없겠지.’
북한의 보복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막을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희생하겠다는 쪽이었다.
그만큼 애국심이 남다른 자였기에 북한의 보복을 걱정하면서도 자신이 맡은 바 임무를 끝까지 해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
“예, 말씀하십시오.”
“정말, 직원들에게 5천 달러씩 챙겨 줄 거요?”
윤상덕은 조소를 지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마케예프 설계국장의 모습을 보니 조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천 달러가 상여급을 제외한 금액이란 것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
소련 과학자들에게 제시한 5천 달러는 분명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혜성 반도체의 연구원 중에는 원화로 천만 원 이상씩 받는 사람도 허다하였다.
아마 소련 과학자들 역시도 성과급을 포함하면 반도체 연구원들만큼 받게 될 터.
그러니 윤상덕으로선 마케예프 설계국장의 모습이 우습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성과가 좋으면 두 배 이상도 챙겨 줄 수 있으니, 월급에 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한국이 부자 나라가 되었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구려.”
글쎄.
한국이 부자 나라가 되었다기보다는, 혜성이 대기업 중의 대기업이 된 게 아닐까?
뭐, 마케예프 설계국장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소련 과학자를 포섭하라 했을 땐 처음엔 걱정이 많았는데, 지나고 보니 이것보다 쉬운 일이 없는 거 같단 말이지.’
한때 초강대국의 최고 과학자들조차 혜성 그룹의 평범한 직원들보다 월급이 낮았다.
자동차나 전자기기 같은 건 정말 큰마음을 먹고 사야 할 정도였다.
이러니 소련 과학자를 유혹하는 게 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혜성에서는 월급도 많이 주는 데다, 공산품을 구하기도 훨씬 쉬웠으니까.
* * *
김정일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보고를 듣고는 와락 찌푸린 얼굴로 되물었다.
“뭐이? 남조선 간나 새끼들에게 설계자들을 뺏겼다고?”
“죄송합니다!”
쾅!
화를 참지 못한 김정일은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러자 시립해 있던 사내들이 몸을 움찔하였다.
“이 간나 새끼들!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김정일로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갖은 노력을 하였던가.
소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기회다 싶어서 사람과 자금을 보내 미사일 설계자를 ‘모셔’ 오려 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미국도 아니고 한국 때문에 기회를 날리다니.
마음 같아서는 관계자들을 싹 다 총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우,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남조선에서 갑자기 설계자를 빼가는 이유가 뭐야? 미제 눈치를 안 보기로 한 건가?”
“그, 위원장님.”
“또 뭐야?”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남조선 정부에서 설계자를 채간 게 아니라, 이한성이라는 돈주(재벌)가 채간 듯싶습니다.”
“뭐이?”
김정일은 이제 분노를 넘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 정부에 설계자가 빼앗긴 일도 그로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공산주의 종주국이라는 소련에서 한국과의 승부에 패배한 셈이 아닌가.
하지만 실상을 알고 나니, 한국 정부에 뺏긴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빤한 말하지 말라우. 돈주가 핵이라도 만들겠다는 거야?”
“혜성에서 움직인 것은 확실한 정보입니다.”
김정일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재벌이라 부르는 한국 돈주들의 영향력이 꽤 상당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은둔형 후계자라고 불리는 것과 달리, 그는 중국이니 인도네시아니 여러 나라를 순방해 본 사람이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자본가들이 사회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그가 모를 순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개 돈주가 소련의 과학자까지 대담하게 빼돌릴 줄이야.
심지어 혜성에서 빼돌린 소련의 과학자 중에는 미사일 설계자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혜성이 핵을 만들 생각으로 그들을 빼돌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핵이고 자시고 간에 혜성 그 간나 새끼들, 계속 거슬리는군.’
안 그래도 김정일은 혜성 그룹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었다.
반도체에 자동차, 심지어 이제는 전자 사업까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니 그로선 좋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성이 한국 정부에 가져다줄 천문학적인 세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 혜성 그룹의 행동을 지켜보니, 눈에 거슬리는 수준을 넘어섰다.
훗날 북한을 통치할 때, 큰 암초가 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권좌에 오르면 이한성, 그 돈주 놈을 처리하든가 해야겠어.’
김일성의 건강을 생각하면 그가 북한의 지존이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 자리도 내정된 상태였으니 말이다.
* * *
“회장님. 소련 과학자들이 지금 막 김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의 말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북한에서 개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까지 걱정의 끈을 놓지 못했었다.
미국이 막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조금은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소련의 과학자들은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한국에 도착하였다.
‘직접 마중을 가지 못해서 아쉽군.’
마음 같아서는 김포 공항으로 마중을 가고 싶었다.
소련 과학자의 가치를 생각하면, 그 정도 의전은 필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행차하면 너무 눈에 띄어서 문제였다.
수십 명의 외국인이 동시에 움직여도 눈에 띌 텐데, 재계 1위인 혜성 그룹 회장까지 거기에 끼어있다?
국내의 기자들뿐만이 아니라, 외신 기자들까지 특종을 외치며 달려들 것이 뻔하였다.
‘미사일도 개발해야 하는 만큼 우주과학 연구소는 최대한 은밀하게 진행하는 게 좋겠지.’
소련 과학자들이 소속될 곳이 바로 우주과학 연구소였다.
말 그대로 우주와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는 곳인데, 한편으로는 미사일 연구도 진행할 예정이었다.
김영산 대통령과의 약속 때문에라도 미사일은 무조건 개발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과학자들을 연구소로 정중하게 모셔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시설은 다 완공이 되었겠지요?”
“물론입니다. 산책할 수 있는 작은 공원부터 편의점을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이 완공된 상태입니다.”
소련 과학자들이 전부 돈만 보고 한국행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상부의 명령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한국에 왔을 텐데, 나는 이들이 스스로 원해서 한국에 남게끔 만들고 싶었다.
하여 준비한 게 각종 편의시설이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그 돈을 쓸 곳이 없다면 그것만큼 의미 없는 일이 없을 터.
그래서 큰돈을 사용하여, 산지였던 연구소 주변에 각종 편의시설을 건설하였다.
‘이 정도면 나중에 러시아가 찾아와서 과학자를 돌려달라 해도, 과학자들이 자진해서 한국에 남지 않을까?’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진봉현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우주과학 연구소와 관련된 기사가 언론에 나올 일은 없겠지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설립하기로 한 미국의 연구소 때문에라도 우주과학 연구소에 관심이 갈 일은 없을 겁니다.”
노사와 이야기 나눴던 대로, 나는 한국에서 뿐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여러 국적의 인재를 흡수하기 위함인데, 한국에서 새로 설립한 우주과학 연구소가 우주와 미사일 개발에 중점을 둔다면 미국 캘리포니아에 새로 설립한 과학 연구소는 조금 더 포괄적이었다.
우주 관련 연구뿐만이 아니라, 신에너지를 비롯하여 로봇과 인공지능 등 여러 방면에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꽤 화제라지?’
미국에 설립하기로 한 연구소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었다.
일단 연구원 개인에게 지급되는 연구비부터가 세계적인 수준이었던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MIT, 캘리포니아, 스탠퍼드 등 미국의 150개 대학에 공문을 보냈는데, 그 결과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학교별로 최소 다섯 명 이상은 연구원으로 지원을 할 정도였다.
‘인도가 IT 강국이 된다고 하니, 인도 IT 인재들도 흡수하면 되겠어.’
이미 인도를 대표하는 명문 공과대학인 인도 델리 공과대학에 공문을 보낸 상황이었다.
운이 좋다면, 미국의 다른 기업에서 채가기 전에 인도의 IT 인재들을 우리가 먼저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 *
국내도 그렇고 세계도 그렇고 혜성에서 새로 만들고 있는 연구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정작 혜성 그룹 회장인 내가 집중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E-비즈니스 혁명이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내 인사에 갑자기 회장실로 불려온 임직원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나이는 대체로 젊었는데,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직원도 섞여 있었다.
“갑자기 제가 불러서 놀라셨을 분도 계실 겁니다.”
“아닙니다.”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용건을 꺼냈다.
“제가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 사업에 참여할 생각이 있는지 묻고 싶어서 불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업이란 당연히 E-비즈니스 혁명을 말한다.
즉, 인터넷과 소프트웨어, 게임 등을 총망라한 디지털 비즈니스 사업이었다.
“새로운 사업, 말씀입니까?”
“예. 저는 E-비즈니스 혁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이 아닌, 디지털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저, 회장님. 저는 소프트웨어와 전혀 무관한 직무를 하고 있는데, 제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경영지원을 담당하실 분들이니, 현재 맡고 계신 직무가 무엇이든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혜성에 IT 관련 인재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우리나라가 아직은 SW에 약세를 보이는 나라이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이들이 당장 게임이나 SW를 개발하길 원한 게 아니었다.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
나를 대신하여 개발자와 기획자를 지원해 주는 게 이들의 역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