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소련의 인재를 포섭하다
(그럼 고민할 필요가 있느냐?)
“예?”
(네가 통일을 원한다면 통일이 되게끔 움직이면 되는 일 아니야.)
“그래도 사업가로서 이해득실을 따져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내가 살던 시대에도 통일은 하지 못했었으니, 나에게 그런 걸 물어봐도 제대로 된 답변을 해 줄 수가 없다.)
“그렇습니까?”
(단지, 혜성 그룹이 영원토록 한국의 기업으로 남을 거라면, 북한을 통일하는 게 훨씬 낫긴 하지. 북한 리크스는 늘 한국의 골칫거리였으니까.)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혜성도 곧 소니처럼 글로벌 기업 취급을 받게 되겠지만, 그래도 결국 혜성은 한국 기업으로 남을 것이다.
내 국적부터가 한국이고 한국 기업으로 남는 것이 가장 이익일 테니까.
‘그러면 결국 평화 통일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으려나?’
노사가 말했던 것처럼, 북한 리스크는 늘 한국의 골칫거리였다.
김일성이 한마디 할 때마다 주가가 요동치는 게 한국의 주식 시장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지하자원과 인구가 매력적이기도 해.’
어쩌면 혜성도 다른 기업이 그러하듯, 인건비가 낮은 국가로 공장을 이전해야 할 날들이 올 수 있었다.
혜성 반도체처럼 고부가가치산업이 아니고서는 나날이 높아지는 한국의 인건비를 감당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실제로 혜성 모직의 경우 이미 공장 이전 문제가 내 결재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아마 10년 안에 혜성 모직을 시작으로 혜성 자동차나 혜성 전자 등의 제조업들도 동남아로 공장을 이전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북한과 통일을 한다면?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북한 노동자들에게 한국의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가 여부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근데 과연 제가 통일을 지지한다고 해서 역사가 바뀔 가능성이 있을까요?”
내가 통일에 찬성한다고 치자.
그런데 과연 그게 의미가 있을까?
제아무리 혜성이 대기업이라 해도 일개 기업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원 역사에서도 통일할 수 있는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었다. 김일성이가 조금 늦게 죽었다면, 통일되었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었을 정도지.)
“그렇습니까?”
(네가 통일을 바란다면 방법은 많으니까,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봐.)
“예, 알겠습니다.”
아쉽게도 노사에게 명쾌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노사가 귀신이긴 했어도, 신은 아니었으니까.
‘통일이 되면 참 좋을 거 같기는 한데, 실패했을 때의 타격을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뭐하고, 참 어려운 일이군.’
일단 노사의 말처럼 천천히 고민을 해봐야 할 거 같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 결정을 내려봐야 뭐가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 * *
요즘 들어 통일 문제를 고민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북쪽의 소식에 계속 관심이 갔다.
물론 북쪽이라고 해서 북한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이 아닌, 소련의 소식을 말하는 것인데, 예상했던 대로 부정적인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올해 안에 소련이 붕괴하겠군.’
나비효과가 없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리고 사실 소련과 관련해서는 나비효과가 발생할 일도 거의 없었다.
내가 소련의 역사를 바꿀 만한 행동을 한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회장님, 최상국 소련 지부장의 전화입니다.”
그러던 중, 소련 지부를 담당하는 최상국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눈을 빛내며 전화를 받았다.
“이한성 회장입니다.”
-회장님,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저야,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지부장님은 잘 계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어수선한 상황인데도, 다행히 저희 지부는 무탈합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했으면, 심하게 자책했을 텐데 말이다.
-사실 제가 전화를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회장님이 따로 지시하셨던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하기 위함입니다.
최상국의 그 같은 말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가 그에게 따로 지시 내렸던 일이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소련의 과학자를 포섭하는 것.
“혹시 어디 쪽을 포섭하셨습니까?”
-코스베르스크 설계국은 거의 포섭이 완료되었고, 마케예프 설계국 쪽은 아직 포섭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한쪽은 로켓 엔진을 전문적으로 하는 설계국이었고 다른 한쪽은 미사일 개발을 전문적으로 하는 설계국이었다.
물론 나로서는 둘 중 어디든 좋았다.
두 설계국의 과학자들은 각 분야에서 실로 최고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인재였으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 회장님의 결재가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마케예프 설계국 쪽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움직임을 감지했습니다.
“갑자기 웬 북한입니까?”
-아무래도 북한도 저희처럼 소련의 인재를 노리는 거 같습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소련의 과학자를 포섭하는 과정에서 귀찮은 일이 한 번쯤 벌어질 것은 예상했지만, 그게 북한일 줄은 몰랐다.
‘북한이 핵을 만든다더니, 벌써 이렇게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노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북한에서 핵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은 구소련 과학자들이 있어서라고 말이다.
하지만 구소련 과학자를 끌어들인 정확한 시점은 몰랐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 아닌가 싶었다.
“북한이 움직였으면 안전 문제를 더 신경 써야겠군요.”
-그럼 포섭 작전은 계속 감행합니까?
“물론입니다.”
북한 때문에 미사일 만들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르게 보면 북한의 핵 개발을 방해할 기회이기도 했고.
“천만 달러를 추가로 보내겠습니다. 코스베르스크 설계국의 과학자건, 마케예프 설계국의 과학자건, 반드시 포섭해서 한국으로 보내 주십시오.”
자금력 승부라면 북한에 질 리가 없었다.
천만 달러가 부족하다?
두 배, 아니, 세 배도 더 보낼 수 있다.
과학자들의 월급도 당연히 북한보다는 우리가 훨씬 챙겨 줄 것이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마케예프 설계국도 계속 포섭 작전을 진행하겠습니다.
“예, 부디 몸조심해 주십시오.”
-회장님도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통화가 끝나자, 나는 바로 고영태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그래도 소련 과학자를 데려오는 일로 청와대와 이야기를 나눠야 했었는데, 명분이 하나 더 생겼으니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어쩐 일로 먼저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제가 소련에서 사업하다가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북한과 관련된 정보라, 공유해야 할 거 같아, 전화를 드렸습니다.”
-북한과 관련된 정보라면?
나는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
“북한에서 핵을 만들려는 거 같습니다.”
-핵이요? 북한이야 원래부터 핵을 만들려고 했던 자들 아닙니까?
“제가 소련에 인맥이 있는데, 북한이 소련의 핵 미사일 설계자와 최고급 미사실 기술 도안 등을 입수하려 하고 있다 합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예상대로 고영태 비서실장은 크게 놀란 반응이었다.
하긴, 나야 노사에게 이미 들어서 무덤덤하게만 느껴졌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었던 고영태 비서실장으로선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혜성 그룹의 회장인 제가 장담하는 정보입니다.”
-그렇다면 확실한 정보겠군요.
내가 장담한다고 하니, 더 의문을 드러내지 않는 고영태 비서실장이었다.
나는 그의 반응에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희 쪽에서 선수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선수를 친다는 말씀은, 북한이 노리는 과학자를 우리가 먼저 채가겠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예. 북한에서 핵을 만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으음.
고영태 비서실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굉장히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모처럼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는데, 설마 이런 소식을 걸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 말이다.
-기업에서 소련 과학자를, 그것도 미사일과 로켓 관련 과학자를 끌어들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소련과 정식으로 수교까지 했는데, 소련 과학자를 포섭한다고 문제될 게 있을까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저는 어디까지나 나라를 위해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만약 청와대에서 반대한다면 저는 여기서 손을 떼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대통령님께 말씀을 드릴 테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럼 대통령님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고영태 비서실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김영산 대통령의 전화가 걸려왔다.
예상대로 김영산 대통령은 긍정적인 답변을 해 주었다.
-국가에서 최대한 지원하겠습니다. 이한성 회장님께서는 반드시 소련의 과학자를 한국으로 끌어 들여 주십시오.
아마 정부에서 내가 단순히 북한의 핵 개발 방지를 위해서 이 일에 개입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분은 너무도 확실했다.
북한을 견제해야 하는 한국 정부로서는 혜성이 소련 과학자를 영입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 * *
소련에는 약 20개의 미사일 개발팀이 있었다.
유리 베사라보프가 소속된 팀도 그중에 하나였는데, 현재 유리 베사라보프의 팀은 큰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아니, 우리가 노예야? 노스 코리아로 팔려나간다더니, 갑자기 이번에는 웬 사우스 코리아야?”
“같은 공산권 국가도 아니고, 사우스 코리아라니!”
“사우스 코리아를 갈 거였으면, 애초에 미국을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거긴 돈이라도 많이 줄 거 아니야.”
“빌어먹을, 양키 놈들은 우리가 스파이일 거 같아서 못 들여보낸다잖아.”
“미사일 발사 분야의 두뇌 중의 두뇌인 우리가 스파이라고? 진짜 양키 놈들의 망상은 심해도 지나칠 정도로 심하단 말이지.”
소련 미사일 발사 분야 두뇌진에서 가장 중추에 가까운 게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붕괴 조짐이 보이면서 그들의 처우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일단 월급부터가 대폭 줄어들었다.
달러로 치면 그들의 월급은 고작해야 500달러에 불과하였다.
미사일 발사 분야의 두뇌진인 그들이 미국의 일반 노동자보다 버는 돈이 적다는 뜻이었다.
물론 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 월급으로도 부족함 없이 지냈을 것이다.
교통비도 무척이나 쌌고, 아파트 월세나 물가가 전반적으로 저렴했으니 말이다.
빵이야 워낙 값이 싸서 농촌 지역에서는 아예 가축 사료로 쓸 정도였으니.
하지만 1989년부터 물가가 큰 폭으로 상승하였고 500달러로는 저축이란 꿈도 못 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유리 베사라보프의 미사일 팀은 해산 위기에 처하기까지 하였는데, 뜬금없이 북한 미사일 개발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북한 파견이 결정되었다.
사실은 북한의 뇌물을 받은 마케예프 설계국의 고위진이 그들을 북한으로 팔아 버린 것이다.
‘근데 이제는 노스 코리아도 아니고 사우스 코리아란 말인가?’
설계자들이 불평을 토로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리 베사라보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석 설계자로서 나름대로 간부라 할 수 있는 그지만, 그 역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국장에게 따져봐야겠어.’
결심을 내린 유리 베사라보프는 지체하지 않고 국장실로 향하였다.
“무슨 일이야?”
“지금 저희 팀이 난리가 났습니다. 노스 코리아는 그렇다 쳐도, 사우스 코리아는 웬말이란 말입니까?”
“그거 이야기하려고 여기 온 거야?”
“직원들의 사기가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쯧. 군말하지 말고 가. 노스 코리아보다 사우스 코리아가 돈을 더 잘 챙겨 준다고 해서 보내는 거니까.”
“예? 아니,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그렇지.”
“매달 5천달러 이상 챙겨 준다는데? 그래도 불만이냐?”
“……!”
유리 베사라보프는 입을 떡 벌렸다.
5천달러라니.
지금 그가 받는 돈의 열 배에 가까운 월급이지 않은가.
‘이러면 사우스 코리아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어차피 국내 상황도 불안정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설계국의 경우 설계자들을 아예 해고하는 경우도 허다했기에, 이런 때 외국으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하물며 돈까지 선진국 이상으로 챙겨 준다면야 두말할 것도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