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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253화 (253/300)

253화 이득일까? 손해일까?

한국에 오면 이제는 무조건 청와대부터 들려야 하는 거 같았다.

나를 가장 먼저 찾는 것이 김영산 대통령이었으니까.

“이한성 회장님의 선견지명은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거 같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전쟁이 일방적으로 끝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 했을 텐데, 이게 어떻게 우연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미국도 이 정도의 승리를 거둘 줄은 예상 못 했을 겁니다.”

역시 걸프전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다.

3월 말이 되었는데도 걸프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미국은 아직도 걸프전 관련 기사가 하루에 수십 개씩 쏟아지고 있으니,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이한성 회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회장님 덕분에 미국과의 외교에서 손해를 적게 본 거 같습니다.”

“대통령님이 현명한 결단을 내리신 거지, 저의 공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겸손하시기까지 하시군요. 하하하.”

“제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김영산 대통령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의 앞에서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게 정답이었던 듯싶다.

‘나도 은근히 처세술이 좋아진 거 같군.’

혜성에 처음 입사했을 때를 제외하면 나에게 상사란 존재가 아예 없었었다.

그래서 처세술을 키울 기회가 많이 없었는데, 정·재계 거물들을 만나면서 처세술이 조금 늘어난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김영산 대통령과는 국제 정세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앞으로의 미국 행보라던가, 소련의 동향 등이 주된 화제였다.

“이한성 회장님께서는 소련의 몰락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동유럽에서 이미 조짐을 보이지 않습니까? 소련의 몰락은 전문가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급격하게 전개될 겁니다.”

정확한 시점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비효과 문제도 있고, 이 이상 그의 환심을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소련이 완전히 붕괴할 때쯤이면 김영산 대통령도 레임덕을 겪기 시작하겠지.’

그러니 김영산 대통령보다는 차기 대통령에게 정확한 시점을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이한성 회장님께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소련이 올해 바로 무너지기라도 할 거 같습니다. 하하하.”

나는 뜨끔하였다.

실제로 1991년인 올해에 소련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영산 대통령은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고 여겼는지, 피식 웃고는 화제를 전환하였다.

“소련이 무너지면 통일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를 거 같은데, 이한성 회장님께서는 통일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제가 아무래도 기업가이다 보니, 통일 관련 문제는 말씀드리는 게 주저됩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너무 민감한 질문을 던진 거 같습니다.”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미국이나 소련과 관련해서 많은 조언을 받았는데, 북한 문제까지 조언받을 수는 없는 일이겠죠.”

그나저나 통일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원 역사의 일성 그룹이 그랬던 것처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미래 그룹처럼 적극적인 태도로 통일을 옹호하는 게 좋을까?

일장일단이 있는 일이라서 선뜻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혜성 그룹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내 선택에 따라 역사가 큰 폭으로 바뀔 것이라, 그게 두렵기도 했고 말이다.

‘오랜만에 노사의 조언을 구해야겠어.’

이전이야 통일 문제를 머나먼 미래의 일로 치부하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저 북한이 테러를 저지르는 것만 적극적으로 막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소련이 무너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만큼, 통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 * *

(권오중 회장을 따라 하는 것이냐?)

“예?”

(국내에 있는 시간보다 해외에 있는 시간이 더 긴 거 같아서 한 말이다.)

노사의 말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걸프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돈은 얼마나 벌었는데?)

“한화로 6조 정도 벌었습니다.”

(엄청나게 벌었군.)

“예. 운이 좋았던 거 같습니다.”

(미국 정부 기관에서 따로 압박을 가해오지는 않았나 보지?)

“신은규 대표의 말로는, 이 정도 벌어들인 것으로 조사가 나오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월가에서는 조 단위가 우스울 지경이니 말입니다.”

(다행이구나. 그런데 돈을 어떻게 쓸지는 다 정했느냐?)

“일단 한국 돈으로 3천억 정도는 미국 사회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내 말에 노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보기에도 내 결정이 나쁘지 않았던 듯싶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직 결정 내리지 못했습니다. 워낙 큰돈이니,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거 같습니다.”

돈을 벌기 전에는 대충 계획을 짜놓긴 했었다.

하지만 막상 6조 4천억이란 돈을 벌고 나니,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그저 웅크리고 있기에는 너무나 큰돈이었기 때문이다.

(또 인수 합병할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

노사의 말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정곡이 찔렸던 탓이다.

‘눈치가 귀신 같으시단 말이지.’

노사의 추측처럼 나는 인수합병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6조 4천억이란 돈을 단순히 주식 투자나 기술 개발에 쓰는 것은 아깝게만 느껴졌던 탓이다.

(필립스 전자도 아직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주제에 또 어디를 인수하려고?)

“저희가 컴퓨터 쪽이 약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국의 컴퓨터 제조사인 NCR을 인수할까 고민 중입니다.”

NCR는 빅 블루라 불리던 IBM이 기세를 떨칠 때도 유니시스, CDC와 함께 끝까지 생존한 경쟁력 있는 기업이었다.

컴퓨터 제조사 쪽으로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들 기업이기에 인수한다면 혜성 전자는 가전과 휴대폰에 이어 컴퓨터까지 세계 순위 안에 들게 될 것이다.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모든 분야에서 세계 1위 하는 것도 문제없어 보였고 말이다.

(NCR이 AT&T가 인수하는 기업인 것을 알고 하는 말이냐?)

“아, 그렇습니까?”

(나도 자세한 금액은 모르지만, AT&T가 엄청난 금액으로 인수했다고 들었다. 필립스 전자보다 훨씬 비싼 금액일 거야.)

AT&T가 노리고 있다면 나도 굳이 NCR을 인수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NCR을 노린 이유는 어디까지나 30억 달러보다 값싸게 인수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있어서였다.

30억 달러보다 비싸게 인수해야 한다면 다른 기업을 노리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어디를 인수해야 할까?’

속으로 그런 고민을 하는데, 노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전에도 내가 말했을 텐데. 지금은 미래를 대비해야 할 때라고.)

“내실에 집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으면 되겠습니까?”

원래 나 못지않게 인수합병에 긍정적이던 노사였다.

하지만 필립스 전자 이후로는 인수합병에 부정적이었는데, 이미 혜성 그룹의 외양이 지나칠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노사가 내실에 집중하라는 조언을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내실에 집중하기도 해야겠지. 하지만 그보다는 미래에 꼭 필요한 기술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라고 한 말이다.)

“인터넷이라면 이미 E-비즈니스 혁명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사업에 쓰고 남는 돈을 인터넷 관련 주식을 매집하는 데 사용할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E-비즈니스 혁명이란, 혜성과는 별개의 기업을 출범시켜 인터넷 사업을 전담하는 사업 프로젝트를 말했다.

혜성의 덩치가 덩치다 보니, 인터넷 사업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젊고 유망한 직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회사를 꾸려 포탈 사업을 비롯하여 SW 사업을 전담할 계획이었다.

물론 혜성과 이름만 별개일 뿐, 회사 지분 구조는 혜성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미래란 그보다 훨씬 미래를 말한다.)

“그보다 훨씬 미래라면?”

(인공지능, 로봇, 신에너지, 우주 산업. 네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미래는 바로 이것들이다.)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로봇이니 인공지능이니 나로서는 그저 공상 과학에서만 나올 거 같은 이야기로 들렸다.

‘뭐, 우주 산업도 따지고 보면 공상 과학에 가깝지.’

우주로 사람을 보내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소련, 미국 같은 강대국에서만 가능한 일.

그런데 일개 기업인 혜성 그룹 보고 우주 산업을 준비하라니.

만약 내가 미래 정보를 알지 못했다면 그저 황당하게만 여겼을 것이다.

“연구소를 세우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그래. 우선 미국에 연구소를 하나 세워서 세계 각국의 인재들을 흡수해라.)

“소련의 인재 중 일부도 미국 연구소에 보내면 되겠군요.”

(소련뿐만이 아니라, 동유럽의 인재도 마찬가지다. 올해부터 소련이 붕괴하며 동구권 이공계 인재들이 길거리로 쏟아져나올 거야. 너는 반드시 그들을 흡수해야 한다.)

어렵지 않은 주문이었다.

내가 가진 자금은 무려 6조였으니까.

‘그래도 아쉽군. 나는 지금 당장 회사를 키우고 싶은데 말이야.’

미래를 대비하는 과정도 당연히 필요하였다.

하지만 6조가 있는데도 내실에 집중해야 한다니, 나로선 아쉬움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혜성 전자도 그렇고, 혜성 호텔이나 혜성 자동차 등도 그렇고.

지금 당장 그룹의 외양을 확장할 수 있는 길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 더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어. 기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가 온다는데.’

아쉬웠지만 미련을 훌훌 털어내기로 하였다.

나는 혜성 그룹의 사업이 모든 분야에서 세계 1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그보다 원하는 것은 수십 년이 지나도 지금의 성세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노사가 이야기한 여러 기술을 개발하여 언젠가 오게 될 미래를 적극적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IT 관련 주식을 살 돈을 제외하고 남은 돈을 전부 연구소에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결정했다. 괜히 외양만 키웠다가, IMF 때 훅 간 대기업들이 한두 개가 아니야. 뭐 혜성이 IMF 때 망할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너는 이제 겨우 30대이니, 길게 보는 게 중요하다.)

길게 봐라.

노사가 늘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을 들으니 새삼 마음속 깊이 와닿았다.

20대 때는 5공 시절이라 늘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정권 차원에서 압박한다면 그룹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외양을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김영산 대통령이 나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느낄 수 있듯, 더는 조급하게 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미래 그룹이나 국내의 다른 경쟁 기업도 더는 적수가 아니었고 말이다.

* * *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통일을 하는 게 저희한테 이득일까요? 아니면 손해일까요?”

원래 이걸 묻는 게 목적이었는데, 어쩌다 화제가 다른 쪽으로 넘어가서 이제야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갑자기 그걸 묻는 걸 보니, 김영산과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했나 보지?)

“예. 화제가 국제 정세여서, 소련 붕괴 이야기를 하다가 북한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노사가 불쑥 내 생각을 물었다.

(너는 이 나라가 통일되었으면 좋겠냐? 혜성 그룹 회장으로서가 아닌, 이한성이라는 개인으로서 말이다.)

“그야, 당연히 통일을 바라고 있습니다.”

(왜?)

“한민족이니,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독일처럼 말입니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통일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말이다.

‘뭐, 이왕이면 압도적인 힘으로 북한을 항복하게 하여 김일성 일가를 강제로 끌어내리는 게 이상적일 거 같지만, 그건 힘들겠지?’

아무리 한국의 국력이 강해졌다 해도, 북한을 피해 없이 흡수 통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중국이나 소련이 가만히 두고 볼지도 미지수였고.

그러니 결국 통일한다면 무력을 사용치 않고 상호 합의 하에 이루는 평화적 통일이 되어야 할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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