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인터넷의 시대를 대비해야 할 때다
이라크 전쟁은 예정대로 다국적군의 지상군 투입과 함께 막을 내렸다.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운 미군의 공세에 이라크군은 42개 사단 중, 41개 사단이 붕괴하였으며, 대략 20만 명 정도의 사망자가 나왔다.
반면 다국적군의 피해는 400명이 안 됐고, 이 중에서 미군의 전사자는 150명에 불과하였다.
전쟁사에 실로 보기 드문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 전쟁으로 세계는 미국을 다시 보게 되었다.
원래도 압도적인 국력을 자랑하던 미국이지만,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은 세계와 맞붙어도 이길 거 같은 역량을 보여 주었다.
당연하겠지만, 이 같은 압도적인 승리에 미국인들은 미친 듯이 열광하였다.
소련이 붕괴 조짐을 보이면서 냉전도 이미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이런 상황에서 초강대국의 면모를 보이며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으니, 미국인들로서는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같은 열광은 자연스럽게 조지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빌 클린턴 주지사가 우려하던 것처럼 조지 부시 대통령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국민적 지지를 받게 된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지금쯤이면 난리가 났겠군.’
다국적군이 참여한 전쟁인데, 한국이라고 조용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하운철 부회장이나 진봉현 비서실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한국이 걸프전과 관련해서 소란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치권에서도 김영산 대통령의 결정을 재평가하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앞으로 나를 많이 의존하겠는데?’
지금까지도 내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김영산 대통령이었다.
걸프전이 정확하게 내가 예측했던 대로 끝난 만큼, 더욱더 나의 조언을 바라게 될 거 같았다.
적어도 국제 외교와 관련해서는 나의 말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을까 싶었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내가 미국에 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인맥을 관리하기 위함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이유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유가 선물이었다.
이라크는 중동에 있었고 중동에서의 전쟁은 유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쿠웨이트의 유전이 파괴되었을 때, 유가가 큰 폭으로 상승했던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미국에 와서 주안점을 둔 게 바로 유가 선물이었다.
이라크가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는 유가 상승에 베팅했다면, 올 1월부터는 유가 하락에 베팅한 것이었다.
‘모두가 전쟁이 끝날 때 유가가 내려갈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틀렸지.’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유가가 대폭으로 내려갔다.
1월 초까지만 해도 배럴당 35달러가 넘었다면, 중순부터는 23~28달러대에서 15~19달러대까지 하락한 것이다.
미국의 비축유 방출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출 확대가 나은 결과였다.
“이제 결산해 봅시다.”
내 말에 HS 인베스트먼트의 신은규 대표가 그답지 않게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총수익부터 말씀드리자면, 90억 달러입니다.”
“……!”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많은 금액이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다가 이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화로 6조가 넘는 돈이군요.”
“예, 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6조 4천억이 넘는 돈입니다.”
“6조 4천억이라.”
실로 엄청난 돈이었다.
한때 세계 제일의 전자 메이커라던 필립스를 두 개나 인수할 수 있는 돈이 아니던가.
한국이 걸프전에 지원하기로 한 금액의 20배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한 나라에서도 모으기 힘든 금액이라는 의미였다.
“이 돈을 한국에 가져가면 어떤 기업이든 인수할 수 있겠군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경영권만 인수한다는 전제조건으로 혜성 전자도 인수할 수 있었으니까.
‘4조를 기부한다 했는데, 이렇게 쉽게 4조를 넘어 6조란 돈을 벌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알게 할 생각도 없었다.
뭐, 영원히 비밀로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90억 달러 전부를 한국에 가져간다면 미국 정부의 제재를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겠죠. 아무리 미국이 경제 대국이라 해도 90억 달러가 적은 돈은 아니니까.”
그나마 미국이 조 단위는 우습게 여기는 경제 대국이라 유가 선물로 90억 달러의 수익을 벌었음에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누군가는 잃었다는 뜻인데, 후진국이었으면 어떤 식으로든 제재가 가해졌을 터.
하지만 미국이 관대함을 보이는 것도 유가 선물로 벌어들인 돈을 미국에서 사용할 때의 이야기였다.
만약 한국이나 다른 나라로 90억 달러 전부를 옮기려고 한다?
일단 세금부터 엄청나게 뜯어갈 것이고, 나뿐만이 아니라 혜성 그룹 전체에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내가 이 정도의 수익으로 만족한 거지만.’
마음 같아서는 6조 정도가 아니라 10조, 아니, 수십 조를 벌고 싶었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 그렇게 버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괜한 관심을 끌게 될 것이기에 6조로 만족하였다.
물론 이 6조도 내 예상보다 조금 더 많이 번 액수였지만 말이다.
“일단 이 돈은 IT 관련 회사에 투자하는 데 써야겠습니다.”
“IT에만 투자할 생각입니까?”
“예. IT의 가치가 저평가되고 있는 시점이니, 지금이 IT에 자본을 투자할 때입니다.”
신은규 대표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아마 그가 보기엔 지금도 IT 붐이 일어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주가만 봐도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IT 붐은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하였다.
‘무엇보다 인터넷의 시대를 대비해야겠지.’
아직 나도 인터넷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저, 인터넷이라는 세상이 ‘또 하나의 세계’라 불릴 정도로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게 될 것이란 사실만 알 뿐이었다.
물론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였다.
어차피 IT 관계자들도 인터넷을 모르는 경우가 있을 정도니까.
때가 되면 노사가 인수해야 하거나 지분 투자해야 할 기업들을 알려 줄 테니, 그곳들에 자금을 사용하면 될 거 같았다.
아니면 혜성에서 직접 포탈 사업을 펼쳐도 되는 일이고.
“그리고 한화로 3천억 정도는 미국 사회에 기부할 계획입니다.”
“4억 달러가량을 기부하신단 말씀입니까?”
놀란 표정의 그를 보며 나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이면, 미국의 권력자들도 나를 주목하고 있을 거야. 언제 어떻게 시비가 걸려올지 모르니, 미국 여론을 최대한 아군으로 만들어둘 필요가 있어.’
일본의 로비 때문에 혜성을 적대하는 공화당 인사들이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런 때, 90억 달러를 독식한다면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미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혜성의 이미지를 더욱더 긍정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기부는 꼭 필요한 행위라는 뜻이었다.
* * *
유니버시티 고등학교.
작년 9월에 미국으로 유학 온 김규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는 왜 미국으로 보내서.’
경제가 발전하면서 하나둘 자식들을 해외 유학 보내고 있는 한국의 상류층이었다.
김규서도 상류층 자제로서 미국으로 유학을 왔는데, 미국에서의 생활은 한국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젠장, 한국에서는 인기 많았던 나인데, 여기선 왜 이러는 거야.’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어여쁜 백인 여자친구와 사귀며 행복한 고등학교 생활을 즐길 것을 기대했었다.
나름대로 얼굴에 자신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런 기대감을 품었었는데, 어여쁜 미국 여자친구는커녕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언어에서부터 막혔다.
김규서는 영어를 듣기와 읽기라면 어느 정도 했었지만, ‘말하기’는 전혀 교육이 안 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와 대화하는 미국인들은 크게 비웃거나 인상을 찡그리기를 반복하였다.
그의 발음이 미국인이 듣기에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잔뜩 기가 죽은 채로 생활하던 김규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유니버시티 고등학교에는 그의 이상형이 있었다.
금발 머리의 공주같이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졸업하기 전까지 꼭 그녀에게 고백하고 싶은 김규서였기에, 이대로 외톨이 신세를 이어가면 좋을 게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발음을 고치고 만다!’
다짐한 그날부터 워크맨 플레이를 항상 들고 다녔다.
워크맨 플레이를 들고 다니며, 수업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혼잣말을 반복하였는데, 스스로 발음을 교정한 것이다.
그렇게 한두 달을 반복하니 원어민만큼은 아니지만, 발음이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인 친구는 많이 생기지 않았다.
같은 유학생이나, 한인들과만 친분이 생겼을 뿐이었다.
‘스테파니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영어를 잘했다면 모를까, 너무 어수룩한 이미지를 많이 보여 줬다.
이미 그의 인식은 안 좋아질 때로 안 좋아진 상태.
발음이 조금 나아진 정도로 인기가 많아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네 이름이 뭐였지? 아, 그냥 편하게 킴이라고 부른다?”
그때였다.
미식축구부의 주장인 올리버가 갑자기 그에게 말을 걸었다.
김규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190㎝의 거구인 올리버였다.
덩치만 봐도 한국에서 싸움 잘한다는 고등학생들, 한 트럭을 데려와도 상대가 안 될 거 같았다.
그런 올리버가 갑자기 그에게 말을 걸었으니, 김규서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으, 응.”
“그럼 혜성이란 기업이 어떤 기업인지 알아?”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내자 김규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국인에게 두유 노 혜성 소리를 듣다니.
물론 김규서는 혜성 그룹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에 한 번도 두유 노 혜성이란 말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당연히 알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기업인데.”
“한국에서도 기부를 많이 하고 그러냐?”
“어. 엄청 많이 해. 작년에는 혜성의 회장이 자신의 재산 절반을 기부한다고 약속했었어.”
“절반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고?”
놀란 표정을 짓는 올리버의 모습에 김규서는 이상하게 뿌듯함을 느꼈다.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혜성 그룹인데, 같은 한국인이란 이유로 괜히 자부심을 느끼는 거 같았다.
혜성이라면 자부심을 느끼는 게 이상할 것이 없기도 했지만.
“근데 혜성 그룹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낸 거야?”
“우리 형이 운동하다가 다리를 다쳤는데, 이번에 혜성에서 지원금을 준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관심이 가더라.”
“아, 그래?”
“아무튼, 너 앞으로 나랑 친하게 지내자.”
“어?”
뜬금없는 올리버의 말에 김규서는 눈을 부릅떴다.
“한국 사람이랑 한번 친하게 지내고 싶어져서 말이야. 왜? 싫어?”
“아, 아니, 나야 좋지.”
“그리고 너, 스테파니 좋아하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다 티 내고 다닌 주제에 뭘 어떻게 알아? 아무튼, 잘됐네. 내가 스테파니 친구랑 사귀고 있거든? 나랑 자주 다니다 보면 스테파니랑 같이 놀 일도 생길 거야.”
“저, 정말?”
“네가 지금처럼 바보 같은 모습만 안 보여주면 스테파니랑 사귀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 말을 듣고 김규서는 속으로 황당함을 느꼈다.
‘아니, 무슨 이런 식으로 기회가 찾아오지?’
분명 기쁜 일이지만, 그보다 황당함이 컸다.
열심히 노력해서 발음을 교정했건만, 전혀 상관없는 일로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됐건 기회가 생겼으니 기뻐할 일이었다.
‘올리버랑 친해져서 스테파니랑 사귀게 된다면 앞으로 나도 혜성맨이 되든가 해야겠어!’
혜성엔 관심도 없던 그지만, 황당한 이유로 혜성의 열렬한 팬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