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격차를 최대한 벌려야 해
“이게, 혜성 반도체에서 양산하기로 한 16M D램입니까?”
나는 자그만 크기의 반도체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연구소의 개발 담당자가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어서 저희는 1세대 상용 샘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정말 어떤 나라보다도 일찍 16M D램의 양산에 성공하셨군요.”
“이게 다 회장님께서 수요 공정 회의를 도입하신 덕분입니다.”
“맞습니다. 회장님의 지원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일찍 상용화에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내 지원이 엄청났던 것은 사실이다.
작년에만 수천억을 투자했었으니 말이다.
기술 개발을 위해 새로운 제도도 거리낌 없이 도입하기도 했고.
하지만 16M D램의 양산에 성공한 것은 지금의 개발자들이 없었으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성과였다.
16M D램은 시제품을 생산하는 해외 업체도 없었다.
혜성은 설계 기술과 공정 기술은 물론이고 감광 재료나 노광 장비와 같은 자재도 자체적으로 개발해야 했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내가 돈을 많이 지원해줬다고 해도 개발자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아 개발 담당자들에게 인사하였다.
한 명, 한 명과 뜨거운 악수도 하였는데, 개발 담당자들은 하나같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가슴팍의 상여금 봉투보다도 내 악수와 칭찬 한마디가 더 감격을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 * *
세계 최초로 16M D램의 양산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이것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16M D램의 양산화가 성공했으니, 이제 새로운 연구팀을 구성하여 차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시작하면 될 거 같습니다.”
내 말에 개발 담당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64M D램의 개발을 이제 막 시작했는데, 차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시작하란 말씀입니까?”
“예. 이미 상용화가 이뤄진 16M D램에다 차차세대 D램에 요구되는 기술 사양을 적용하는 방향으로 개발을 진행한다면 차차세대 D램도 어떤 기업보다도 빠르게 양산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이제 막 일본보다 한걸음 앞서나간 상황이었다.
방심하면 언제든 일본에게 다시 선두주자의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차세대 반도체와 차차세대 반도체를 동시에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내년이 분기점이다. 내년을 기점으로 일본과의 격차를 최대한 벌려야 해.’
나의 목표는 단순히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위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16M D램의 양산화에 성공함으로써 이미 세계 1위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어진 상태.
하여 나는 잠깐 세계 1위를 하고 끝나는 게 아닌, 수십 년 이상 절대적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기업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64M D램에 이어 256M D램까지 개발을 시작해야만 했다.
두 반도체까지 어떤 기업보다 개발에 성공한다면 혜성 반도체는 적어도 일본과의 격차를 3년 이상으로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개발 담당자들은 내 지시에 안색이 흐려졌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내 지시를 받아들였다.
“64M D램과 256M D램까지 세계 최초로 개발한다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성과급이 내려질 것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돈 이야기가 나오니, 다시 안색이 밝아졌다.
아까는 상여금 없이도 임직원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인 거 같았다.
“저, 회장님.”
“예.”
“일본의 반도체 3강인 도시바·NEC·히타치에서 1M D램 생산 라인의 증설을 중단하였다는데, 우리 혜성도 64M D램의 양산 준비가 끝난 만큼, 1M D램 생산 라인을 줄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고로 내가 도입한 제도인 수요 공정 회의는 단순히 반도체 설계와 공정 기술 개발, 신기술 연구 토론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개발진뿐만이 아니라, 임원진도 토론에 참석하는 만큼, 주제가 더 포괄적이었는데, 경쟁사를 벤치마킹하는 전략도 토론의 일부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혜성 반도체의 경쟁사란 도시바, NEC, 히타치 등의 일본 반도체 업체들을 말했다.
“일본에서 1M D램 생산 라인을 줄이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묻자, 김조용 상무가 대답했다.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70년대 이후로 반도체 산업은 몇 년을 주기로 호황과 불황 사이클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이클대로라면 내년이 반도체 산업에 불황이 찾아올 시기입니다.”
“그 사이클 때문에 일본이 1M D램을 포기했다는 말이군요.”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김조용 상무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론적으로는 김조용 상무의 말이 맞았다.
반도체 산업의 선두주자인 일본업체들이 괜히 1M D램의 생산을 줄이는 것이 아닐 터.
안정적으로 선두주자의 자리를 유지하려면 우리 역시 일본업체들을 따라 하는 게 이치에 맞았다.
“저는 오히려 1M D램의 생산 라인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 하지만 회장님, 내년에는 불황이 찾아올 가능성이 큰데, 1M D램의 생산 라인을 늘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내년에는 오히려 호황이 찾아올 겁니다. 왜냐하면, 마이크로소프트와 넥스트의 치열한 경쟁으로 내년부터 컴퓨터의 인기는 더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이미 나비효과가 발생한 미래였지만, 마이크로소프트와 넥스트, 두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만큼 미래가 달라졌다는 사실도 나에게 무의미하였다.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무기들이 얼마나 엄청난 위력을 가졌는지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컴퓨터 시장에 호황이 찾아오면 컴퓨터 업체들은 대량 공급이 가능하고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1M D램을 적극적으로 사들일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1M D램의 생산을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확신 어린 목소리로 그같이 말하자,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 내 지시를 열렬히 따를 뿐이었다.
* * *
혜성에서 16M D램의 양산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당연히 큰 화제가 되었다.
국내의 언론사들은 벌써 혜성이 세계 제일의 반도체 회사가 된 것처럼 떠들썩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한성의 발언이 불을 지폈다.
“구한말 이전에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평등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부터, D램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만큼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구한말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발언이 있고 나서 기자회견장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일본과 동등한, 아니 일본을 완전히 눌렀다는 발언이나 다를 게 없었으니, 기자들이 환호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반도체는 첨단산업 아니야? 그런데 그 첨단산업에서 일본을 넘어섰다고?”
“일본뿐이겠어! 세계 1위라잖아. 세계 1위!”
“우리나라가 그렇게 기술력이 좋은 나라였던가?”
“우리나라가 기술력이 좋은 게 아니라, 혜성 그룹이 기술력이 좋은 거지. 외국에서 여러 박사들을 모시고 왔다잖아.”
“허어! 뭐가 됐건, 자랑스럽기 그지없구먼!”
한성의 발언이 있고 나서 IT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20대, 30대는 물론이고 중장년층까지 혜성 그룹을 고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경공업을 제외하고 지금껏 그 어떤 산업도 일본을 넘어서지 못했었다.
일본의 워크맨이 세계에 이름을 떨칠 동안, 한국의 제품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름을 떨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혜성에서 반도체라는 첨단산업에서 무려 세계 최초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국민들이 혜성 그룹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국내가 한성의 발언에 화제가 되고 있을 때, 세계 역시도 혜성 반도체의 업적에 경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6M D램의 양산은 무려 세계 최초였다.
세계적으로도 큰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반도체 업계는 비상이 걸렸고, 미국 IT 업계는 혜성 반도체를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혜성에서 16M D램의 양산에 성공했다는 말씀입니까?”
“예. 이미 양산 준비를 끝마쳤다고 합니다.”
“16M D램 양산은 IBM도 아직 소식이 없다 들었는데.”
“IBM은커녕 일본 업체들도 16M D램의 양산화를 끝마치기까지 최소 6개월 이상은 걸린다고 합니다.”
인텔의 경영진도 혜성의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워하였다.
사실, 히타치, 도시바, IBM 등과 거의 동등한 시점에 16M D램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상당히 놀랐었다.
혜성이 단순히 남의 뒤를 쫓기만 하는 기업이 아닌, 독자적인 기술력을 갖춘 기업임을 증명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인텔 경영진이 평가하는 혜성이란 기업은 잠재력이 유망한 동양의 반도체 기업일 뿐이었다.
일본 업체들과 경쟁할 수 있는 반도체 기업이었으나, 시장을 압도할 수 있는 그런 기업으로 보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혜성은 16M D램을 일본의 어떤 업체들보다 일찍 양산에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가능성이란 다름 아닌, 일본을 넘어선 세계 1위의 반도체 기업이었다.
“앞으로 D램은 혜성에서 매입하는 게 좋겠습니다.”
“NEC가 아닌, 혜성에서 말입니까?”
“엔화 절상 사태까지 겹치면서 가격의 변동이 큰 일본 업체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더 저렴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임원들과 회의하던 인텔 CEO는 마침내 그 같은 결정을 내렸다.
D램 메모리를 혜성에서만 공급받기로 결정 내린 것이었다.
“제 생각에는 아예 시스템 메모리도 한국 업체에다 파운드리 생산을 맡기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한국 업체라면, 동현 반도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지금까지 동현 반도체는 아무런 문제 없이 파운드리 생산을 하지 않았습니까? 공장에 중복 투자를 하느니, 우리는 설계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내친김에 시스템 메모리까지 동현 반도체에 맡기기로 결정을 내린 인텔 CEO였다.
이 역시도 혜성 반도체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혜성 반도체의 활약으로 인텔 경영진은 한국 기술력을 다시 평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동등한 조건이라면 대만의 TMSC보단 한국 업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 *
해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16M D램 양산 소식으로 세상이 떠들썩하였다.
미국에 오니, 더욱더 그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16M D램 이야기만 꺼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일본 기업도 아니고 미국 기업도 아닌, 변방 취급받던 한국 기업이 선두주자로 자리 잡았으니 놀랄 수밖에 없겠지.’
심지어 정치인인 레오 매카시 부지사, 아니 이번에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된 레오 매카시 주지사까지 16M D램 양산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혜성의 활약이 정말 놀랐습니다. 사실상 일본의 기술력을 넘어선 것이 아닙니까?”
“예. 적어도 D램 메모리만큼은 세계 제일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나는 레오 매카시 주지사의 말에 겸손함을 버리고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미국인들이 칭찬에 겸손함으로 대꾸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을 알고 태도를 달리하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