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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243화 (243/300)

243화 뒤늦게 깨달았네

“전화 받았습니다. 비서실장님.”

-열흘 만에 다시 전화를 드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딱딱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하였다.

‘설마 김현과의 일을 두고 나를 나무라려는 것인가?’

김현이 아무리 대통령의 아들이라 해도 나는 혜성 그룹 회장이었다.

애초에 아들 때문에 재계 1위인 혜성 그룹과 마찰이 생기는 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고.

하지만 고영태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워낙 차갑게 느껴져서 나는 ‘설마’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 씨가 이 회장님께 ‘무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영태 비서실장의 목소리 때문에 괜히 오해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원래 저런 목소리였는데 말이다.

“예. 조금 놀랐습니다. 그렇게 다짜고짜 시비를 걸 줄은 몰랐거든요.”

-이거, 이 회장님께는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이 회장님께 많이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서실장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김현, 그놈이 멍청한 짓을 한 거지, 고영태 비서실장이나 김영산 대통령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니,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잘못이기도 하니, 김영산 대통령의 잘못이 아예 없다고도 볼 수 없으려나?

애초에 김현이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김영산 대통령의 영향이 컸으니까.

‘뭐 그렇다고 이런 일로 김영산 대통령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지.’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었다.

그러니 대통령 쪽도 굳이 일을 키울 생각이 없는 것이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일을 키울 생각이 없었다.

“다만 김현 씨가 걱정이군요.”

나나 김영산 대통령이나 이런 사소한 일로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김현은?

황태자처럼 군림하다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김현이었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보복을 하려 하지 않을까?

‘그놈이 어떤 보복을 하든, 별로 두렵지는 않지만, 언론이 시끄럽게 떠들어댈 거라는 점이 신경 쓰이는군.’

김현은 정계의 황태자였다.

나는 재계 1위의 대기업 회장이었고.

당연히 두 사람의 충돌은 모든 언론이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께서 김현 씨를 강하게 꾸중한다고 하니, 이 회장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과연 어떨지.

‘그놈이 아버지 말을 그렇게 잘 들을 놈이었으면, 그렇게 망나니처럼 행동하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그 같은 생각을 하는데, 고영태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회장님. 필립스 전자의 생산공장 일부를 한국으로 옮길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혹시 사실입니까?

“그런 계획을 세우기는 했습니다.”

-혹시 이번 일로 그 계획에 변동이 생기거나 그러지는 않았겠지요?

그 말을 듣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김현과의 충돌을 청와대에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번에 옮겨질 공장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아무리 못해도 3만 명의 일자리가 생기는 일이었다.

3만 명의 일자리는 정부 입장에서도 절대 가볍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내가 생산공장 이전 계획을 변동하기라도 한다면 피해 보는 것은 정부라는 말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정부에서 사업하기 편한 환경을 조성해 준다면 굳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선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그는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회장의 말씀대로, 앞으로도 사업가들이 사업하기 편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이 회장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 * *

“역시, 대통령이 선택한 것은 저였네요.”

고영태 비서실장과의 통화가 끝이 나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노사에게 말했다.

(확실히 혜성 그룹의 위상이 높아지긴 한 거 같군.)

“애초에 김현 그놈이 시비를 걸 대상을 잘못 선택한 거 아니겠습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당하였다.

어디 장관급 인사도 아니고, 야인 신분으로 있으면서 나에게 시비를 걸다니.

혜성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있을까 싶었다.

(처음부터 시비를 걸려고 했던 것은 아닌 거 같은데, 그놈이 너를 찾아온 용건이 뭐였지?)

“자신이 모임을 주최한다면서 저를 끌어들이려고 했었습니다.”

(너는 당연히 그 제안을 거절했겠군?)

“예. 별로 득 될 게 없는 모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긴, 너와 급이 안 맞기는 하지. 어차피 김현, 그놈이 어울리는 사람들이야 새파랗게 젊은 놈들밖에 없을 테니까.)

뭐, 김현도 정계의 황태자처럼 군림하는 놈이니, 그가 주최하는 모임에 재벌 2세들도 많이 참석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노사가 말했듯, 재벌 2세들도 이제는 나와 ‘급’이 맞지 않았다.

나이가 비슷하다고 급이 맞지 않는 이들과 어울릴 필요는 없는 법.

재벌 회장들과 어울리며 고고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혜성 그룹으로서는 충분하였다.

(김현, 그놈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대로 놔둬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놈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복하려 할 텐데?)

“하지만 대통령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김현을 무작정 공격하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럼 일단 약점만 찾아내 봐.)

“약점이요?”

(내가 보기에 그놈, 정치인이 되려고 하는 거 같은데, 네가 확실한 약점을 잡고서 그 약점으로 협박한다면 그놈도 다시는 너에게 덤비지 못할 거다. 괜히 너 때문에 정치인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영산 대통령 때문에라도 김현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겠으나, 협박만 하는 것은 문제 될 게 없을 거 같았다.

‘아예 기자들을 대거 동원해서 김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뒤도 캐고,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게 막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아무튼 김현이야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니 그렇다 치고, 상장은 어떻게 하기로 했냐? 결정은 내린 거야?)

“예. 혜성 전자를 상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결국 시장 공개를 하기로 결정 내렸다.

‘필립스 전자를 인수했으니, 규모로 치면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데 언제까지 비상장 기업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겠지.’

돈과 신뢰성.

그리고 직원들의 자부심 문제도 걸려 있었다.

아무래도 외국 직원들의 경우, 혜성이란 이름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일 테니, 시가총액이란 확실한 지표가 있으면 그거로라도 자부심을 느낄 것이었다.

(잘 선택했다. 아마 시장의 평가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을 거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 예상인데, 시가총액 10조도 정말 노려볼 수 있을 거 같다.)

“10조라. 저로서는 솔직히 터무니없는 액수로만 느껴집니다.”

상장 기업 전체의 시가총액을 다 합해서 50조 하던 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공기업도 많이 상장했고, 86년부터 미친 듯이 주가 폭등을 겪으며 전체적으로 시가총액이 상승했지만, 조 단위의 시가총액은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빅 4의 주력 계열사가 1조에서 2조 정도였다.

‘뭐, 요즘은 미래나 은성에서 3조짜리 기업이 생기고 있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10조는 너무 큰데.’

시가총액이 10조가 된다면 나도 더 바랄 게 없었다.

그 정도면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의 누구도 혜성 전자를 업신여기지 못할 테니 말이다.

덤으로 신용도도 대폭 상승할 테고.

(한번 지켜봐. 상장한 것은 절대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될 테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사의 자신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혜성 전자가 아무리 비전 있는 기업이라 해도 10조를 자신한다니.

‘만약 그 정도 된다면, 남는 돈으로 유가 선물에 투자하면 되겠군.’

미국의 인맥이 늘어났으니, 조금 더 많은 돈을 투자해도 될 거 같았다.

그런데 마침 상장 계획이 있으니, 상장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유가 선물에 투자하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 * *

운전대를 잡고 있는 박중태는 뒷좌석을 힐끔 바라보았다.

뒷좌석에는 김현이 타 있었는데, 분노로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이런 개 같은! 그깟 재벌 놈이 뭐가 두렵다고 세무조사도 못 하겠다는 거야!”

결국 분을 참지 못한 김현이 버럭 소리 질렀다.

한성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김현은 혜성 그룹 사옥에서 당했던 모욕을 잊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그는 정계의 황태자나 마찬가지였다.

당 대표나 장관쯤 되는 인사가 아니라면 모두가 그에게 고개를 조아리기 바쁠 정도였다.

재계라고 그의 영향력이 안 닿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재벌들도 그의 눈치를 보기 바빴는데, 심지어 그는 재벌 회장들을 마치 아랫사람처럼 지시를 내린 적도 있었다.

주로 인사 관련 지시를 말이다.

이렇다 보니, 김현으로선 한성에게 당한 모욕을 잊을 수가 없었다.

황태자로 군림하기 시작하고 처음 겪은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혜성이 조금 커졌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대다니! 내가 반드시 이한성, 그놈으로 하여금 무릎 꿇고 사과하게 만들고 만다.’

이 같은 마음을 먹으며 가장 먼저 고영태 비서실장을 찾아간 그였다.

하지만 고영태 비서실장의 반응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책망하기 바빴다.

심지어 한성에게 사과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하였다.

고영태 비서실장의 이 같은 반응에 김현은 더욱 분개하며 장관급 인사들을 찾아갔다.

다른 고위급 인사의 힘을 빌려 혜성 그룹을 괴롭히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김현의 뜻에 따라주지 않았다.

평소 김현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바빴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김영산 대통령에게 꾸중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놈을 어떻게 해야 무릎 꿇게 할 수 있는 거지?’

답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저기 현아.”

“왜!”

“누가 우리를 미행하고 있는 거 같은데?”

박중태가 김현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김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행? 나를 미행하고 있다고?”

“검은색 뉴 코렌드 차량 보이지? 저 차가 10분 넘게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어.”

“어떤 새끼가 감히!”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현은 이를 갈고는 박중태에게 정차하라고 지시하였다.

그의 차가 멈추자 황당하게도 미행하던 차도 똑같이 뒤에서 정차하였다.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숨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려일보에서 나왔습니다! 김현 씨 맞으시죠?”

“어떤 미친 새낀가 했더니, 기자 나부랭이였어?”

“기자 나부랭이라니요. 말씀이 심하십니다.”

“미행한 주제에 어디서 개수작이야? 뒤지고 싶어?”

주먹을 들어 올린 그를 보며 박중태가 다급히 말렸다.

“야, 기자는 때리면 안 돼.”

“제기랄! 야! 또 따라오기만 해봐. 그땐 진짜 뒤질 줄 알아!”

애써 화를 참으며 다시 차에 탑승한 김현이었다.

하지만 그의 경고에도 기자는 미행을 멈추지 않았다.

“김현 씨! 중앙조사연구소에 관해 한마디만 해 주세요!”

“하다못해 이제는 기자 나부랭이까지 나를 무시하는구나.”

왠지, 한성과 얽히고 나서 되는 일이 없는 거 같았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일개 기자 따위가 그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말이다.

‘빌어먹을! 혜성이 도대체 뭐라고!’

김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절실하게 느끼는 거 같았다.

혜성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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