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과연 누구의 편을 들까?
“확실히, 혜성의 지지를 받는다면 김현이 대통령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
“각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잖아? 대선 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혜성의 지원이었다고 말이야.”
“애초에 혜성의 직원이 25만 정도 되지 않아? 가족까지 합치면 대충, 100만이라는 건데, 와아!”
“뭐 직원이야 10만 명은 외국인이니 미래 그룹에 비하면 부족하긴 하지. 그래도 무시 못 할 숫자인 건 분명하지만 말이야.”
김현의 측근들도 김현과 같은 생각인지, 혜성 그룹을 끌어들이는 것에 찬성을 표하였다.
어떤 기업보다 자금력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혜성 그룹이었다.
중앙조사연구소도 김현이 어디선가 자금을 끌어와서 재정이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돈이야 자고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더군다나 혜성 그룹의 영향력이나 직원 수를 생각하면 선거에서도 대단히 큰 영향을 줄 게 분명하리라.
“다만 혜성이 김현을 지지할지가 문제야. 이한성 회장은 지금 김태중 국무총리와 이종석 의원을 밀어준다는 소문이 있거든.”
전산실을 담당하는 박중태의 말에 김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 체급이 두 사람에 비해 밀린다는 거야?”
“아, 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니고.”
“혜성 그룹이 아무리 커졌다고 해도 일개 기업에 불과해. 일개 기업이 감히 나를 거부할 리가 있겠어?”
김현은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의 부친이 대통령 선거에 승리한 이후, 많은 사람이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은 기업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빅 4 그룹에서도 그를 정중하게 대할 정도였다.
‘제아무리 혜성이 돈 많고 영향력이 강해도 한국에서 편안히 사업을 하려면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다.’
이런 그의 기대는 며칠 뒤,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다.
“이한성 회장이 이번 주는 안 되고 다음에 시간 나면 연락을 주겠다는데?”
혜성 그룹 비서실의 답변을 듣고 김현은 이를 갈았다.
“내가 만나자고 했는데 이딴 식으로 나오다니. 누구 덕에 혜성이 커질 수 있었는지 모르는 건가?”
김현은 혜성이 지금의 성세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 덕이 크다고 생각하였다.
대통령이 뒤에서 든든하게 밀어주지 않았으면 혜성이 이 정도로 커질 일은 없었을 것이리라.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음, 한 달 만에 귀국해서 바쁜 것이 아닐까?”
“맞아. 그런 걸 거야. 현아,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설마 혜성이라고 너의 힘을 모르지는 않겠지.”
그 같은 이야기를 듣자, 김현은 애써 이해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바빴다고 해도 건방진 것은 건방진 거야. 직접 만났을 때도 이리 나온다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 * *
늘 그랬지만, 귀국하고 나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가장 먼저 대통령께 전화를 주었는데 김영산 대통령은 굉장히 반가운 기색으로 나의 전화를 받아 주었다.
대통령은 필립스 전자를 인수하였으니, 일본을 꺾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본인 일처럼 기뻐하였다.
구자성 명예 회장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미국에서 일본의 로비는 혜성 그룹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모든 한국 기업들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는데, 구자성 명예 회장은 국내에선 선의의 경쟁을, 외국에서는 든든한 동맹이 되자고 이야기하였다.
‘은성과의 동맹이라면 손해 볼 것은 없지.’
정우 그룹의 권오중 회장도 나를 찾아왔다.
그는 필립스 전자를 인수한 일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대규모 수주받은 일을 더 많이 이야기하였는데, 결국은 자화자찬이었다.
자신이 파이잘 왕자를 소개해 준 덕분에 수주받을 수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그가 파이잘 왕자를 소개해 준 것은 어디까지나 내기의 결과였었지만 말이다.
‘상장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군.’
기자회견 때 잠시 언급했던 시장 공개.
이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곧 주력 계열사 하나를 상장하기는 해야 할 거 같아.’
노사의 조언을 듣고 상장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해봤다.
솔직하게 말하면 돈 때문에 지금 당장 상장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돈이야 지금도 구할 방법이 많았다.
유가 선물도 곧 시작할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상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신뢰성’이었다.
회사를 상장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기업이라고 볼 수 있었다.
특히 외국에서 상장 여부를 많이 확인하였는데, 미국인들은 매출이 얼마냐를 묻지 않고 시가총액이 얼마냐를 주로 물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외국에서 더 큰 사업을 할 텐데, 혜성 반도체와 혜성 자동차, 혜성 전자 등 수출을 주로 하는 기업일수록 상장을 필요할 거 같았다.
‘상장하면 미국 정치인들 상대하기 좋겠군. 공식적인 나의 재산이 미국 웬만한 부자들보다 많게 집계될 테니 말이야.’
간혹 한국인이라고,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미국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막대한 돈 앞에서는 자세를 낮추곤 하는데, 상장을 통해 내 재산이 공식적으로 밝혀진다면 적어도 내 앞에서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만큼 필요 없는 관심도 많이 받게 되겠지만 말이다.
“회장님, 김현 씨가 방문했습니다.”
상념에 빠져 있던 나는 이소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4시였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힘이 장사라는 소문이 있던데, 겉모습은 평범한 거 같았다.
하지만 악수를 해보니, 확실히 악력이 강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김현입니다.”
“예, 혜성 그룹 회장 이한성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조금 더 일찍 뵙고 싶었는데, 늦어져서 아쉽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이번에 네덜란드 기업을 인수했다면서요?”
“감사합니다.”
“정말 돈이 많으신 거 같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러자 김현이 은근하게 물었다.
“상장 계획이 있으시다 들었는데, 언제쯤 상장하실 계획입니까?”
“아직은 결정된 바가 없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좀 알려 주시지요.”
“…….”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 맞습니다.”
내 말에 김현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말했다.
“곤란하시다면 더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니 말입니다.”
“예.”
“근데, 이한성 회장님,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갑자기 나이는 또 왜 묻는 걸까.
“올해로 서른네 살입니다.”
“역시 젊으시군요.”
31세의 그가 나보고 젊다는 말을 하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교 활동을 안 하시는 겁니까?”
“사교 활동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른 게 있겠습니까. 모임 말하는 겁니다. 사교 모임.”
“저도 가끔씩 모임에 나가고 있기는 합니다.”
“글쎄요. 제가 어디 모임 있을 때마다 이 회장님을 찾았었는데, 찾을 때마다 이 회장님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가끔 마포에도 놀러 오세요. 마포에 재미있는 모임 많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오시라니까요? 재계 모임이라고 해봐야 노인들밖에 없을 거 아니에요.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려야지요.”
“시간이 날지 안 날지 모르겠습니다.”
“월말에도 모임이 있을 거 같은데, 그때 저랑 가시죠.”
김현은 어떻게든 나를 모임에 초대하려는 거 같았다.
그가 주최하는 모임이라고 해봐야 실속이 없는 모임일 게 뻔한데 말이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안 날 거 같습니다.”
“그건 제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요?”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 아들이라고 조금 상대해 주니까, 주제를 모르고 막말하는 거 같았다.
“김현 씨가 뭐라고 제가 김현 씨가 원하는 답변을 해야 합니까? 제가 시간 안 난다고 했으면 그런 줄 아시고 더 말씀하지 마시죠.”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은데,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물러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거, 이 회장님 혜성이 커졌다고 너무 시건방지게 행동하는 거 아닙니까?”
그가 노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라 불리며 여기저기서 대접만 받았다 보니,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나로서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시건방지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물러나라고 했을 텐데요.”
“이 회장님. 제가 오늘 있었던 일을 제 아버지께 전하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 말을 듣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같잖은 협박도 오랜만에 듣는 거 같았다.
“지금 저를 비웃었습니까?”
“김현 씨. 당신이 대통령님 아들이라고 뭐라도 된 줄 아십니까?”
“뭐, 뭐요?”
“대통령님한테 저에 관해 안 좋게 말씀하신다고 협박하셨죠? 그래, 한번 해 보세요. 과연 대통령님이 누구의 편을 들지 궁금하군요.”
과연 김영산 대통령은 누구의 편을 들까?
사실 나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제 아들이니 김현의 편을 들어도 이상할 거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김영산 대통령이 누구의 편을 들든,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무리 김현 편을 든다 해도 고작 이런 일로 혜성 그룹과 사생결단을 내려 하지는 않을 테니까.
‘애초에 김영산 대통령이 그렇게 분별력 없는 사람은 아니긴 하지.’
만에 하나, 김영산 대통령이 분별력 없게 행동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혜성은 5공의 가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기업이었다.
임기라고는 이제 겨우 2년 정도밖에 안 남은 김영산 대통령이 두려울 리는 없었다.
“재벌 따위가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그러고도 혜성이 무사할 거 같아?”
“누가 보면 김현 씨가 거창한 직책이라도 갖고 있는 줄 알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무직인 걸로 아는데.”
중앙조사연구소니 뭐니 연구소를 차렸다지만, 실제 소장은 따로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김현은 현재 야인 신분으로 있었던 것이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고!”
김현은 이를 바득바득 갈더니, 그 말을 남기고는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는 그런 김현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김영산 아들과 만났다고?)
“예, 망나니가 따로 없더군요.”
(그놈과 말다툼했다던데, 내가 들은 게 맞아?)
노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보고 자신이 주최하는 모임에 오라는데, 시간 안 된다고 거절하니까 화를 내더군요.”
(웃기는 놈이로군. 감히 혜성 그룹 회장에게 그딴 식으로 대하다니 말이야.)
“그래도 조금 귀찮아질 거 같기는 합니다.”
(그렇겠지. 자존심 강한 놈이니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지 않겠어?)
뭐 크게 걱정은 안 됐다.
혜성 그룹이 그런 놈에 휘둘릴 급은 아니니까.
따르릉! 따르릉!
그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이한성 회장님. 저 고영태 비서실장입니다.
전화를 받으니 고영태 비서실장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