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세계 제일의 전자 메이커
2주간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마침내 인수가는 48억 달러로 결정되었다.
‘신은규 대표의 추측이 정확했군.’
인베스트먼트 대표로 오래 있었더니, 감이 제법 대단한 거 같았다.
“사실 저는 이전까지 혜성이란 기업에 대해 잘 몰랐었습니다.”
얀 티머 회장이 불쑥 그 같은 말을 꺼냈다.
“그렇습니까?”
“그저, 반도체 사업에 뒤늦게 도전하는 동양 기업으로 알고 있었지요. 그러다 이번에 혜성을 조사하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어떤 면에서 놀라셨습니까?”
“회사의 규모가 상상 이상으로 크더군요. 사업 영역도 굉장히 넓었고 말이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사실 지금의 혜성은 세계적인 기업들과 비교해도, 꿀리는 기업이 아니었다.
단지 인지도가 낮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눈앞의 얀 티머 회장처럼, 외국인들은 혜성 그룹의 규모를 알게 되면 매우 놀라는 모습을 보인다.
미국 정치인들이 특히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 한국 기업이라고 알게 모르게 낮잡아보다가 매출만 수십억 달러가 넘는다는 말을 들으면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조금 아쉽단 말이지. 하루빨리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져야 할 텐데.’
지금처럼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도 즐겁다면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일 때나 즐거운 일이었다.
매번 설명하는 것도 상당히 귀찮기 그지없었다.
상대에게 얕잡아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말이다.
“특히 놀랐던 점은 혜성의 무시무시한 성장력이었습니다.”
“혜성이 다른 기업에 비해 빠른 성장세를 보이긴 했습니다.”
“필립스 전자는 근 10년 동안 성장동력을 잃은 채, 뒤로 물러나기만을 반복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혜성이란 새로운 주인을 만났으니,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 같아, 기대됩니다.”
“얀 티머 회장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부디, 일본 기업들을 이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얀 티머 회장만 일본에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사람으로서의 반일 감정도 반일 감정이지만, 사업하면서 일본과 자주 마찰을 겪었다 보니, 나 역시 일본에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니, 얀 티머 회장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일본은 반드시 이겨야 할 상대였다.
“맡겨 주십시오. 일본과 싸우는 일을 가장 잘하는 것이 우리 한국인입니다.”
내 말에 그는 반색한 얼굴로 나의 손을 붙잡았다.
어지간히 일본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 * *
“회장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대강당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라르드 클라이스터리 부사장의 뒤를 따라가니, 큰 공간이 나왔다.
그가 이야기한 대강당이었는데, 필립스 전자 소속의 종업원 수백 명이 강당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 동양 기업이 우리 회사를 인수했다던데…….”
“동양이라면 일본?”
“아니, 일본은 아닐걸.”
“제기랄, 필립스가 어째서 이렇게 된 거냐. 동양 기업 따위에 인수당하다니.”
“어, 저 사람이 우리 기업을 인수한 동양인 아니야?”
“젊은데? 20대처럼 보여.”
“그러게. 키도 큰 것이, 내가 알던 동양인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걸?”
“외모가 뭔 상관이야? 저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가 관건이지.”
직원들도 나를 발견한 것인지, 웅성거리기 바빴다.
하지만 나는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강단 위로 올라갔다.
“반갑습니다. 혜성 그룹 회장 이한성입니다.”
한국에서도 직원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는 일이 많았었다.
연말 성과급을 줄 때는 항상 내가 축하사를 하며, 직원들에게 봉투를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기분이 색달랐다.
강단 앞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직원들의 머리 색깔부터가 다채로워서 그런 거 같았다.
‘외국인 직원이 10만 명이라.’
필립스 전자를 인수함으로써 이제 혜성 그룹의 종업원 수도 미래 그룹보다 많아졌다.
혜성 그룹의 종업원 수도 이제 20만을 넘어선 것이다.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하군.’
물론 뿌듯한 것은 뿌듯한 것이고, 냉철한 사업가로서 숫자에 현혹될 생각은 없었다.
필립스 전자는 애초에 종업원 수가 지나치게 많았기에 조금 구조조정을 할 계획이었다.
“저는 필립스 전자를 보며 느꼈습니다. 필립스 전자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개혁뿐이라는 사실을.”
“…….”
다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필립스 전자 종업원들이, 내가 ‘개혁’이란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을 짓기 시작하였다.
“올해 필립스 전자는 10억 달러의 적자를 냈습니다. 벌써 10억 달러입니다. 전문가들이 예측하기로, 올해 40억 달러가 넘는 적자를 낼 거 같다고 합니다.”
얀 티머 회장이 괜히 필립스 전자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노사가 이야기한 것처럼,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필립스 전자는 절대 회생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40억 달러조차 최소 예상치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필립스 전자가 저의 손에 들어온 이상, 저는 이 상황을 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하는 사업은 과감하게 정리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더욱더 굳어지는 직원들의 표정을 보며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허리케인 같은 위력의 개혁이 거듭 이어질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를 약속드리겠습니다. 혜성의 품 안으로 들어온 이상, 필립스 전자는 다시 세계 제일이란 영광의 자리를 되찾을 겁니다.”
내가 그리 말하자, 의례적인 박수 소리가 나왔다.
짝짝짝!
만약 한국에서 이와 같은 연설을 하였다면 아주 열성적인 박수가 나왔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뭐, 나의 명성이 제로에 가까우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업계 최고의 연봉과 복지가 주어진다면 저들도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을까?’
지금이야 그저 동양인 졸부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필립스 전자, 아니, 이제는 혜성 전자로 합병한 전 필립스 전자가 다시 세계 제일의 자리를 되찾는다면 나를 보는 시선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에 걸맞춰 연봉과 복지가 늘어난다면 혜성 그룹 직원들이 그러하듯 나를 향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게 될 것이고 말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내 장기 플랜대로라면, 혜성 전자만으로도 10년 안에 소니를 꺾을 것이다.
그런데 한때 세계 최고였고 지금도 유럽 최대 전자 메이커인 필립스 전자까지 내 손 안에 들어왔다?
세계 1위가 되기까지 10년은커녕 5년도 안 걸릴 것이리라.
* * *
“허리케인 같은 위력의 개혁을 실시하실 것이라 하셨는데, 정확히 어떤 개혁을 계획하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제라르드 클라이스터리 부사장이 불쑥 묻자, 나는 태연하게 대꾸하였다.
“직원들 앞에서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을 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명확하게 세워진 계획은 없습니다.”
“당황스러운 답변이군요.”
“가장 먼저 부사장님의 조언을 듣고 계획을 세울 생각이었습니다. 필립스에서 15년 이상의 경력을 쌓은 부사장님 같은 전문가 없이 개혁을 진행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내 말에 제라르드 클라이스터리 부사장이 반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식의 발언이었으니, 그로선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으리라.
“부사장님은 필립스 전자를 어떤 식으로 개혁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단 인원 감축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필립스 임원 출신이라서 걱정했는데, 역시 그도 구조조정을 필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이런 객관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그를 영입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원은 얼마나 감축해야 합니까?”
“적어도 1만 명 이상은 감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만 명이라.”
10만 명 중에 1만이면 무려 10%였다.
“반발이 상당하겠군요.”
하지만 반발이 커도 꼭 해야 할 일이었다.
필립스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쓸데없이 방만한 운영도 한몫했으니 말이다.
“또한 연구개발부서도 정비해야 합니다.”
“연구개발 투자를 줄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정확히는 상품성이 떨어지는 연구개발을 중단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면 과감하게 다른 나라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현재 필립스 전자는 기술 우선주의에 매몰되어 연구개발 투자가 비대해진 상태.
제라르드 클라이스터리 부사장의 조언처럼 연구개발부서에도 과감히 메스를 들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가장 시급한 것은 일본과 같은 ‘저스트 인 타임’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재고를 없애자는 거군요.”
“예. 지금까지의 필립스 전자는 지나치게 멀리 보고 사업을 해왔습니다. 세계는 빠르게 바뀌어 가는데 필립스 전자는 늘 일본 기업보다 한발 느렸었죠. 더는 이래서 안 된다고 봅니다. 제품 개발 기간을 1년에서 6개월로 최대한 단축하고, 발 빠른 마케팅을 펼쳐서 재고를 소진해야 합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듯, 청산유수였다.
아마 내 영입 제안을 받은 뒤부터 지금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던 거 같았다.
‘역시 노사가 추천한 인재답군.’
원래는 유럽 총괄로만 둘 생각이었는데,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싶었다.
만약 그가 혜성에서도 능력을 보여 준다면 유럽뿐만이 아니라, 해외 전체를 총괄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 * *
혜성 전자에서 필립스 전자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한국을 강타하였다.
“필립스? 내가 아는 그 필립스를 인수했다는 거야?”
“전자 쪽으로 꽤 알아주는 기업이지 않나?”
“꽤 알아주기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라 불리던 회사였어!”
“그 정도라고?”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6년 전에, 미래 그룹과 일성 그룹의 매출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매출을 올렸을걸?”
“아무리 6년 전이라지만, 필립스란 기업도 정말 엄청난 기업이었군!”
한국 사람들도 필립스란 기업을 한 번쯤 들어봤다.
그도 그럴 것이 필립스는 한국에도 법인을 세운 기업이었다.
필립스 제품을 사용하는 한국 사람도 적지 않으니, 당연히 필립스를 알아보는 사람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미쳤군! 혜성이 정말 미쳤어!”
“인수가가 얼마인지 들었어? 무려 3조 5천억이래!”
“헉!”
“아니, 혜성은 무슨 돈이 있어서 3조 넘는 돈을 썼데?”
“그러게 말이야. 3조라니. 그 정도 돈이면 우리나라에서 인수하지 못할 회사가 없겠어.”
“이거, 전자 쪽에서도 혜성이 독주하려나?”
“필립스를 인수한 시점에서 이미 혜성이 시장을 장악한 거나 다름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글쎄. 혜성은 국내 시장은 관심도 없을걸?”
“그건 그렇네. 반도체도 그렇고 자동차도 그렇고 혜성이 주력하는 시장은 세계 시장이었었지?”
“이한성 그 양반도 참 대단해. 10년 전까지만 해도 혜성은 건설로만 이름이 알려진 기업이었는데 말이야.”
“지금의 혜성을 보면 건설 사업밖에 안 하는 혜성은 상상도 안 되는데?”
“뭐가 됐든, 이한성 그 양반이 한국 사람인 게 다행이지!”
“맞아! 일본 사람이었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끔찍해?”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기도 하고, 크게 감탄하기도 하며 다양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물론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혜성이 한국 기업이고 한성이 한국 사람이란 사실에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세계 제일의 전자 기업이지 않은가.
지금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것이 필립스란 기업이었으니, 그런 기업을 인수한 혜성 그룹이 자랑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