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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투자천재-239화 (239/300)

239화 어디를 인수한다고?

하락세를 넘어 거의 공중분해 직전인 필립스와 달리, 혜성은 한창 성장하고 있으니 사실 그것이 가장 부러웠다.

‘필립스의 전자 사업부를 인수한다면 혜성 전자도 무시무시해지겠군.’

지금의 혜성 전자는 세계 시장에서 거의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역사라고는 겨우 몇 년인 기업이니, 존재감을 발휘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혜성의 사내 유보금이 그렇게 여유 있답니까?”

“아시겠지만, 혜성에는 반도체 말고도 많은 계열사가 있습니다. 자동차에 건설까지 있다는데, 여기서 상당한 영업이익이 나온다는 소문입니다.”

“자동차 사업도 하고 있습니까? 허.”

“미국에서 몇 년 전부터 유명세를 타고 있는 앱설루트란 브랜드가 혜성 자동차의 브랜드라고 합니다.”

그 말에 얀 티머 회장은 눈을 크게 떴다.

그저 반도체에서만 두각을 드러내는 기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설마 앱설루트라는 고급차 브랜드가 혜성의 것이었을 줄이야!

‘이거 진지하게 임해야겠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혜성이란 기업의 자금력이 상당하게 느껴졌다.

일본 기업도 아니고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기업이라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부디 대화가 잘 풀렸으면 좋겠군.’

* * *

필립스는 내가 인수 의사를 타진하자,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주었다.

회사를 매각하려 했는데도 관심을 드러내는 기업이 없었다더니, 그만큼 조급한 상황인 거 같았다.

‘시간을 끌면 더 가격을 낮출 수 있을 거 같군.’

나는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지금의 상황은 누가 봐도 내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득 볼 사람은 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노사의 조언을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알기로 필립스가 무너지는 것은 2000년대야. 지금이 1990년이니, 아직은 무너지기 전이라는 말이지.)

“필립스가 위기를 극복할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아마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은행이나 다른 투자자의 도움을 받아서 위기를 극복했을 거야.)

필립스가 위기에서 극복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바로 인수 의사를 타진해야겠군요.”

(그러는 게 좋을 거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일본 기업들이 방해하고 나서면 곤란해지는 것은 너이니 말이야.)

생각해 보니 그렇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나 도요타도 혜성을 견제하기 시작했는데, 소니나 마쓰시타 같은 일본 전자 기업들이 언제까지 혜성을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특히나 필립스처럼 세계적인 전자 기업을 인수한다면, 소니라 해도 경각심을 드러낼 게 분명하였다.

“알겠습니다. 더 끌지 않고 바로 인수 협상을 진행하겠습니다.”

(인수가는 이전에 말했던 것과 같으냐?)

“예. 아직은 실사를 하지 않은 상태이니, 그때와 똑같이 3조에서 4조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3조면 적은 돈이 아닌데, 자금은 어디서 모으려고?)

“은행에서 빌리는 게 가장 무난할 거 같습니다.”

(시장에 기업 공개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상장이라.

안 그래도 정부에서 혜성 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을 상장해달라고 은근하게 권유하고 있었다.

나로선 현금이 급하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노사까지 상장을 거론하니 조금 고민되었다.

“시장에 기업 공개한다고 해서 조 단위의 목돈을 벌 수 있겠습니까?”

혜성 그룹이야 혜성 해운, 혜성 건설 등을 제외하면 상장한 기업이 거의 없어서 제대로 비교할 수가 없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상장 기업들의 주가를 살펴보면 굉장히 저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은성 전자나 미래 건설의 시가총액이 3조가 채 안 되니 말이다.

(나는 혜성 전자라면 10조 이상도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혜성 반도체라면 그 이상도 가능할 것이고 말이야.)

“은성 전자보다 시장 점유율이 낮은데 10조가 가능하겠습니까?”

(혜성이란 이름값은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흠.”

(더군다나 혜성은 상장 기업이 별로 없지 않으냐? 재계 1위인데도 상장 기업이 별로 없으니, 그 얼마 없는 상장 기업이 특수를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긴, 상장 기업을 인수한 것 말고는 내가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혜성 계열사는 단 한 번도 상장한 적이 없었다.

언론에서도 ‘혜성은 언제쯤 상장을 할까?’ 하는 주제로 기사를 자주 보도하니, 시장의 기대감은 상당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노사가 이렇게 말씀하시니 기대가 되긴 하는군. 과연 시장은 혜성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평가할까?’

10년 뒤의 소프트뱅크처럼 200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건 IT 버블이라는 특수 상황이어서 가능한 시가총액이었다.

아마 혜성 반도체도 10년 뒤에 상장한다면 100조 이상은 거뜬할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때 세계 최대의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래. 어차피 필립스를 인수한다고 해서 바로 자금을 모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 차근히 생각해 봐라.)

“예, 알겠습니다.”

* * *

노사와 대화를 나눈 나는 곧바로 네덜란드행 비행기를 탔다.

필립스 본사를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제라르드 클라이스터리라고 합니다.”

확실히 필립스가 나를 귀한 손님으로 생각하는 거 같긴 했다.

부사장이 직접 마중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혜성 그룹 회장 이한성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희 직원들입니다.”

나는 직원들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혜성 전자의 임원들과 법무, 재무 담당 직원들이었다.

다 합해서 다섯 명이었으니, 실사단이라고 하기엔 조촐하였지만, 아직 인수 협상을 진행하기도 전이었으니 이 정도 숫자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회장님, 혹시 저희 회사를 간단하게 소개해도 되겠습니까?”

“필립스라면 저도 웬만한 것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어떻게든 필립스 전자의 가치를 높이고 싶었던 것인지, 제라르드 클라이스터리는 프레젠테이션까지 준비하였다.

물론 그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결국, 과거가 대단했다는 말만 반복해서 하는군.’

백 년이나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과거의 영광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영광이 없다면 백 년이나 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 그리고 미래였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확실히 준비를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아무리 필립스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셔도,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 거 같습니다.”

“이, 일본 제품에 밀린 것은 어디까지나 가격 경쟁에서 밀린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가격뿐만이 아니라, 마케팅과 디자인에도 문제가 많아 보이던데.”

“…….”

“무엇보다 연구개발비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시장을 선도하려면 기술에서 압도해야 하는 법입니다. 오늘날의 필립스를 있게 한 것도 다름 아닌 끊임없는 기술개발이었습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도대체 10억 달러 이상의 연구개발비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의문입니다.”

필립스의 고질적인 문제는 기술 우선주의였다.

물론 전자 사업에 있어서 기술력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필립스는 지나칠 정도로 기술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심지어 그렇게 투자한 기술이 상용화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유사한 프로젝트를 복수의 연구팀이 수행하는 때도 많았고.

한마디로 ‘돈’ 안되는 연구만 실컷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전부 필요 없는 기술만 연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CD-I라고 내년 출시 예정인 CD 매체가 있습니다. 이 CD-I는 PC처럼 사용자와 대화형으로 작동할 수 있는데, 교육과 오락용 장치로 저희 쪽에서는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내가 흥미를 보이니 그가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설명을 들어보니 CD-I는 실패할 게 뻔해 보이는 제품이었다.

일종에 비디오 게임기라는 말인데, 정작 게임에는 어떤 투자도 하지 않는단다.

스펙 좋고 유용한 기능이 많은 제품을 만들면 소비자가 알아서 사줄 거란 기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클라이스터리 씨는 이 제품이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경영진에서는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경영진의 생각을 물은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모르겠다는 답변은 결국, 실패할 거라는 답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제라르드 클라이스터리 부사장에게 말했다.

“클라이스터리 씨. 저는 사실 클라이스터리 씨에 관해 많은 것을 조사했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예. 아주 탐이 나는 인재시더군요. 저희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될 정도로 말입니다.”

“음…… 이 자리는 저를 스카웃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가 아닐 텐데요.”

“회사도 인수하고, 클라이스터리 씨도 영입하면 될 일 아닙니까?”

제라르드 클라이스터리 부사장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터.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유럽 총책임자의 자리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른 회사로 가지 마시고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인수가 결정 나면 그 뒤로 제 거취를 고민해 보겠습니다.”

이 정도의 답변을 들었으니 나는 만족하기로 하였다.

‘노사께서 인정하는 인재니, 무조건 영입해야지.’

나는 인재를 영입하는 것엔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고 제라르드 클라이스터리 부사장 정도면 인재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으니, 무슨 수를 써서도 영입할 생각이었다.

뭐, 표정을 보아하니, 어지간해서는 우리 기업으로 올 거 같았지만 말이다.

* * *

일본 기업들은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혜성 그룹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고급차 시장을 뺏긴 도요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혜성 반도체가 세계 3위까지 오르자, 반도체 업체들도 하나같이 혜성 그룹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자 기업들, 그중에서 소니의 경우 혜성 그룹을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혜성 그룹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 소니였다.

“우리가 누굴 견제할 땐가? 지금 온 미국이 우리를 경계하고 있는데 말이야.”

“애초에 은성 전자라면 모를까, 혜성 전자가 뭐라고?”

“한국 기업이 우리 기술을 따라잡기엔 백 년도 이르지.”

자동차나 반도체 쪽으로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을 거듭하는 혜성 그룹이었지만, 가전 쪽으로는 크게 소식이 없었다.

물론 동남아, 인도, 중동, 동유럽 등에선 공격적인 영업을 펼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소니 경영진이 보기에 미국, 서유럽만이 세계의 중심이고 나머지는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혜성 전자에서 아무리 공격적인 영업을 펼친다 해도 미국에서의 시장 점유율에 변화가 없다면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기술력도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혜성에서 필립스를 인수한다는데?”

“뭐? 필립스를?”

하지만 그런 소니도 더는 방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비록 과거의 영광이라고는 하나, 여전히 가전 쪽으로는 세계 제일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필립스를 혜성에서 인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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