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또 인수해야지
‘그나저나 소니라.’
소니.
한국에서는 워크맨의 신화로 유명한 기업이었다.
하지만 혜성 그룹을 경영하다 보니, 소니는 단순히 워크맨 하나로 평가받을 기업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전 사업은 물론이고, 영화 사업에 음반 사업 등 여러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거의 모든 사업에서 세계 순위 안에 들었고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예전처럼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는 않네.’
매출이야 여전히 소니 쪽이 위였다.
하지만 많아 봐야 10조 정도 차이였다.
예전에는 두 기업의 매출이 수십 배 정도 차이 났다면, 혜성 그룹이 재계 1위가 된 시점부터는 매출의 차이가 2배도 채 나지 않았다.
물론 세계적인 인지도나 영향력 같은 것은 여전히 소니가 압도적이겠지만 말이다.
‘자동차는 도요타, 가전은 소니, 반도체는 도시바를 꺾으면 되는 건가?’
혜성 그룹의 주력 계열사는 혜성 자동차, 혜성 전자, 혜성 반도체 이렇게 세 기업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세 개의 사업은 모두 일본이 세계 1위였다.
결국 혜성 그룹은 일본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반도체야 2년 안에 꺾을 수 있을 거 같고, 자동차와 가전이 문제로군.’
가전은 아직 국내에서도 1위를 못한 상태였다.
아니, 따지고 보면 혜성 자동차도 1위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기화 자동차는 엄연히 혜성 자동차와는 별개의 기업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보니, 언제쯤 자동차와 가전 사업에서 일본을 추월할 수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일단 가전부터 먼저 세계 1위로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소니와의 간격을 좁힐 수가 있을까.’
노사가 이야기해준 대로 미래가 흘러간다면, 10년 뒤에는 소니를 추월할 수 있을 거 같기는 했다.
하지만 나에게 10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다.
‘마침 올해부터 투자를 늘리기로 했으니,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다면 소니와의 간격을 좁힐 수는 있겠지.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우리 혜성 전자의 기술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야. 일성 전자나 은성 전자는커녕 미래 전자에도 밀리고 있으니까.’
마케팅과 디자인으로 시장 점유율이 일성 전자보다 근소하게 우위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기술력은 일성 전자가 혜성 전자를 압도하였다.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를 흡수하였던 혜성 반도체와 다르게, 무로부터 출발했던 혜성 전자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역시 기업을 인수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나?’
인수합병을 자제하고 싶었는데, 또 생각이 바뀌었다.
혜성 그룹이 이렇게까지 클 수 있었던 배경은 결국 인수합병이었는데, 구태여 인수합병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하운철 부회장에게 약속했던 대로 언젠가 포르쉐를 인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 * *
“필립스는 어떻겠습니까?”
HS 인베스트먼트의 신은규 대표가 불쑥 그 같은 말을 꺼냈다.
내가 그에게 가전 쪽으로 인수할 기업을 찾고 있다고 했었는데, 필립스가 제격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필립스라. 가전 쪽으로는 한때 세계 1위였던 기업 아닙니까? 유럽에서는 지금도 전자 메이커 쪽으로는 1위라 들었는데.”
“소니 등 일본 전자 기업들이 활약하기 전에는 분명 필립스가 가전 1등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기술력은 여전히 독보적인 수준에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기야 그렇겠죠. 한때 필립스의 모토가 ‘필립스가 당신을 위해 발명한다(Philips Invent for You)’ 아니었습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이 모토도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소비자들이 원한 것은 그저 사용하기 편리하고 단순한 물건인데, 소비자가 원하지도 않은 것을 발명해놓고 감사하라는 식의 모토였으니까.
아마 필립스가 소니를 비롯한 일본 전자 기업에 밀렸던 것도 소비자들 위에 군림하려는 이 같은 태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필립스가 아무리 쇠퇴했다지만, 제가 알기로 직원 수만 30만 명에 가까운 기업인데, 전자 사업을 저희에게 매각하려 하겠습니까?”
필립스는 GE나 한국의 재벌 기업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즉, 문어발이란 뜻인데, 전자 외에도 음반, 반도체, 방산, 의료 등 여러 사업을 하는 중이었다.
“현재 필립스의 주가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하고 있습니다.”
“위기가 심각하긴 한가 봅니다.”
“예. 올해의 경상적자만 수십억 달러에 이를 거라는 예측이 나왔습니다.”
“허어. 수십억 달러요? 세계적인 기업이라서 그런지, 적자 규모도 세계적이군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회사를 얼마나 방만하게 경영하기에 적자가 수십억 달러나 되는지 모르겠다.
‘한국 돈으로 조 단위의 적자라. 이 정도면 회사가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겠는데?’
신은규 대표가 괜히 필립스를 추천해준 것이 아닌 듯싶었다.
물론 필립스는 매출액이 30조가 넘는 기업이니, 바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만약 필립스 전자를 인수한다면, 어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적어도 45억 달러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45억 달러라…….”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45억 달러라면 한국 돈으로는 대략 3조 2천억 정도 되는 돈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엄두도 못 낼 정도의 거액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여전히 큰돈이라는 것은 같았다.
단지 지금은 무리하자면 3조 정도를 끌어모으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최소가 3조이니 어쩌면 4조까지도 동원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필립스 전자의 가치가 3조 이상일까?’
음반 회사인 폴리그램을 비롯한 필립스의 모든 계열사를 인수할 수 있다면 당연히 3조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신은규 대표가 이야기한 45억 달러는 어디까지나 필립스의 가전제품 부서 하나만을 인수했을 때의 가격이었다.
아마 다른 사업까지 인수하려면 3조는커녕 그 세 배를 줘도 불가능할 것이다.
폴리그램 하나만 해도 3조가 우스울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필립스 전자라면, 기술력 하나는 은성 전자도 압도하는 기업이지.’
연구개발(R&D) 투자비만 해도 업계 최고였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기술력과 특허를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 상품성이 있는 기술은 많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인수 의사를 타진해 보죠.”
“필립스 전자만 인수하실 생각입니까?”
“전자 말고 인수할 게 더 있겠습니까?”
“반도체도 있기는 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립스 반도체도 아마 유럽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반도체 회사일 것이다.
매출액만 15억 달러가 넘는다나?
하지만 구태여 반도체까지 욕심부리지는 않기로 하였다.
이미 혜성 반도체에 수천억의 투자를 한 상태인데, 필립스 반도체를 인수하면 결국 중복 투자를 하는 셈이었으니까.
“필립스 전자만으로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필립스의 얀 티머 회장에게 인수 의사를 타진해 보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과연 어떤 답변이 돌아올까?
당장 공중분해 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라, 매각을 결정할 거 같기는 해도 사람 일은 또 모르는 일이었다.
황당한 이유일 수 있지만, 일본과 같은 동양 회사란 이유로 혜성 그룹에 매각하는 것을 반대할지도 몰랐다.
‘이왕이면 인수 제의를 받아줬으면 좋겠는데.’
혜성 전자의 기술력을 몇 단계 진일보할 기회였다.
더군다나 유럽의 영업망까지 얻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시장 점유율도 단숨에 5위 안에 들게 될 것이고 말이다.
* * *
런던의 엑셀시아 호텔 회의실.
얀 티머 회장이 세 명의 세계적 경영석학 앞에서 필립스의 실정을 설명하였다.
“현재 필립스는 저렴한 가격과 깔끔한 디자인으로 무장한 일본 제품들에 의해 시장을 완전히 뺏긴 상태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회사의 실정을 설명하는 얀 티머 회장의 표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필립스 회장으로 취임한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가 회장으로 취임하기 무섭게, 필립스는 창사 이래 최대의 적자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필립스의 회장으로서 참담한 심정을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부디 여러분, 이 필립스라는 백 년 묵은 ‘공룡’의 수술을 맡아 주십시오. 여러분의 조언이 아니라면 이 공룡은 이대로 역사 속에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종업원 수만 29만 명이나 되는 기업이 필립스였다.
소속되어 있는 석사, 박사들도 수백 명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얀 티머 회장은 세 명의 경영석학에게 깍듯이 대하였다.
그만큼 필립스의 상황은 심각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술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울 겁니다. 필립스는 물론, 네덜란드의 자랑이나 다름없는 기업들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의 김휘찬 교수가 하는 말에 얀 티머 회장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 명의 경영석학들은 잠시 숙덕거리더니, 얀 티머 회장에게 시간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필립스 같은 거대 기업의 수술을 이 자리에서 바로 진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열흘이 지나, 세 명의 경영석학이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전자 사업을 포기하라니.”
얀 티머 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조언도 겸허히 수용할 생각이었지만, 전자 사업을 포기하라는 조언은 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부터가 필립스 회장이 되기 전, 전자 사업을 담당하였던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밖에도 구조조정과 생산기지 통폐합, 자산 매각 등 여러 조언이 있었다.
하지만 얀 티머 회장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조언은 바로 자산 매각, 이중에서 전자 사업의 매각이었다.
‘폴리그램과 전자 사업, 둘 중 하나를 무조건 포기해야 한다면, 확실히 전자 사업을 포기하는 것이 낫긴 하다.’
반도체와 전자 사업에 발생하는 적자가 수십억 달러였다.
일본 기업에 시장을 빼앗긴 상태였으니, 앞으로도 적자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터.
경영석학의 조언대로 전자 사업을 포기하는 것이 최선의 수일 수도 있었다.
‘그래. 필립스를 살리려면 못 할 게 무엇이 있으랴!’
며칠간 고민한 끝에 그는 결국, 이 같은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런 그의 결단에도 불구하고 필립스 전자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이 한 곳도 없었다.
이미 필립스 전자에서 사상 최대의 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때 세계 최고였고, 지금도 유럽 최대의 전자 메이커가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룡의 몰락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은 실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필립스는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 것인가?’
하지만 그때, 처음으로 필립스 전자에 관심을 드러내는 기업이 생겨났다.
“혜성 기업이라고요?”
“예. 반도체로 유명한 코리아의 기업입니다.”
“한국이라.”
혜성 그룹은 얀 티머 회장으로선 모를 수가 없는 기업이었다.
‘TV, VCR, 오디오 뭐 하나 제대로 만드는 것이 없는 기업인데, 정작 반도체는 세계 3위라지?’
반도체 하나만큼은 부러운 기업이었다.
매출액만 따져도 필립스 반도체의 세 배 이상 되는 기업이었으니까.
아니, 반도체 말고도 부러운 점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