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대표님만큼 적임자가 없습니다
혜성 반도체 대표, 김정연.
“대표님. 회장님의 전화입니다.”
“회장님?”
김정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직원들이라면 모두가 존경하고 찬양하는 한성이란 존재는 그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일까?
전화를 받는 것뿐인데, 괜히 긴장됐다.
-전략회의에서 나왔던 시나리오에 관한 보고서는 준비해 두셨습니까?
한성은 수시로 전화하고 수시로 점검하였다.
아예 그의 집무실을 찾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면 김정연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몇몇 재벌 총수들이 그러는 것처럼, 야구빠따를 휘두르는 그런 막 나가는 회장이 아니라지만, 한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두렵게 하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가장 두려운 점은 한성의 눈과 귀가 어디에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혜성 그룹의 많은 임원이 한성의 어마어마한 정보력으로 문책을 당하거나 아예 해임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김정연은 비리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였다.
물론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비리를 저지를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곧 결론이 나올 거 같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예!”
전화가 끊기고 김정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대하겠다는 말도 무섭기 그지없었다.
기대에 조금만 못 미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내가 이 자리를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군.’
다행히도 지금껏 혜성 반도체는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왔다.
그래서 다른 계열사 대표가 수시로 바뀌는 동안, 혜성 반도체는 단 한 번도 임원진이 교체되는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김정연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국제 정서에 따라 혜성 반도체의 성장세가 언제 고꾸라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경력직이나 박사 출신 등, 능력 있는 임원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기에, 사내 경쟁도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김정연도 커리어는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임원들을 회의실로 부르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의 소집에 임원들이 신속하게 회의실로 향하였다.
‘임원들의 엉덩이가 이리도 가벼운 기업은 혜성밖에 없을 거야.’
다른 기업이었으면 임원들 기다리는 데 한 시간은 족히 소요되었을 것이다.
특히나 전무 이상이면 누가 더 늦게 오나 경쟁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혜성 반도체의 임원들은 달랐다.
혜성 반도체 임원들은 신입사원들만큼이나 빠릿빠릿하기 그지없었다.
연봉이 센 만큼, 회사에서 거는 기대에 따라야 했던 것이다.
* * *
“일본과 충돌이 벌어진다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포토 레지스트와 같은 반도체 생산에 꼭 필요한 소재를 공급하는 게 제한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보고서를 읽고 있던 나는 김정연 대표가 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사실 미국에서의 로비보다 이게 더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로비야 매출에 조금 지장이 생기는 정도지만, 핵심 소재를 공급받지 못하면 아예 반도체 자체를 생산하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포토 레지스트는 몇 달 정도 보관할 수 있다고 했죠?”
“최대 석 달이 한계입니다.”
“석 달이 한계면 쌓아두고 버티는 것도 불가능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 외에 다른 소재들도 장기간 보관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국내에선 아예 공급받지 못하는 겁니까?”
“금오석유화학에서 사업다각화의 일환으로 포토 레지스트 연구개발에 착수하긴 했지만, 개발이 끝나는 것은 아직 머나먼 이야기일 거 같습니다. 다른 소재들도 90% 이상 일본에서 공급받아야 합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혜성은 일본의 의존도가 낮은 기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다른 계열사야 일본의 견제를 받아도 큰 타격이 없지만, 핵심 계열사인 혜성 반도체만큼은 예외였던 것이다.
“해결 방안은 있습니까?”
“가장 좋은 해결 방안은 역시 국산화일 거 같습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김영산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일본과 충돌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일본부터가 빠르게 성장하는 한국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노사께서는 미래의 한국이 샌드위치 신세가 된다고 하였었지.’
거세게 추격하는 중국과 집요하게 견제하는 일본.
그 사이에서 아등바등하는 것이 미래의 한국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내가 우려하는 것처럼, 반도체의 주요 소재, 부품으로 한국 기업들을 압박한다고 하였다.
결국, 일본 때문에라도 반도체의 주요 소재와 부품은 전부 국산화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국산화를 하고 싶다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포토 레지스트만 해도 엄청난 기술력이 필요하였다.
더군다나 반도체 기술이 초미세 공정으로 진입한다면 포토 레지스트 또한 더더욱 진보된 기술을 필요로 할 터.
박사급 기술 인력을 수십 명 고용한다 해도 몇 년은 족히 걸릴 일이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렸던, 금오석유화학과 공동으로 연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동 연구라.”
나는 회의적이었다.
노사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기업이 금오석유화학이었다.
그래서 나도 금오 그룹을 건설과 택배, 타이어, 항공 등의 기업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핵심 소재를 생산하는 일본 기업들과의 관계를 진전하거나 아니면 계약으로 묶어놓는 것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일본 정부가 규제에 나선다면 아무리 기업들과 관계가 좋다 해도 결국 공급에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음…….”
“차라리 일본의 기술 인력을 영입하여 국산화를 앞당기는 것이 나을 거 같군요.”
대만이나 중국에 인재가 유출될 것을 걱정만 할 것이 아니었다.
우리 역시도 다른 나라의 인재를 영입해오면 될 일.
그리고 현재 우수한 인력은 일본에 많이 있었다.
특히 반도체 쪽이라면, 인재 면에서는 세계 제일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예? 일본 인재들이 받는 연봉을 생각하면 영입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돈만 많이 주면 못할 게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4년 전에 연봉 백만 달러짜리 이탈리아 디자이너를 고용한 것을?”
일찍이 나는 디자인을 중요시하였었다.
제조업으로 출발한 기업이 아니다 보니, 다른 기업에 비해 기술력이 다소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외의 디자이너들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큰돈을 주고 영입하였는데, 반도체 인재라고 다르게 취급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곧 일본의 불황이 시작되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일본의 불황이 시작된다면 인재를 영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연봉이 반절 이상으로 깎이는 경우도 허다할 테니.
‘길어야 1년인가.’
일본 경제가 붕괴하면 그때는 대만이 한국에 와서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인재를 마구잡이로 빨아들여야 할 거 같았다.
* * *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김정연 대표에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신다면 더 좋은 해결책을 구상해 오겠습니다.”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계속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는 김정연 대표였다.
“이 문제는 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대표님의 조언으로 방향이 정해졌으니, 기존에 맡고 계신 일에만 신경 쓰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김정연 대표님. 대표님은 자신감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지금까지 잘해오셨지 않습니까.”
내 말에 김정연 대표는 얼굴을 붉히며 감사 인사를 하였다.
홍익인간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유독 붉게 느껴졌다.
별거 아닌 나의 한마디에 감동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그룹도 인재가 많기는 많은 거 같군.’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재계 1위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연봉만 따져도 혜성 그룹에 인재가 구름처럼 모이는 것이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많게는 업계의 두 배 가까이 연봉을 주는 곳이 혜성 그룹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나는 잠시 행복한 고민도 해보았다.
‘그룹 안에서 부회장을 뽑는다면 누가 좋을까?’
김정연 대표도 나쁘지는 않았다.
혜성 반도체를 세계 3위까지 오른 것은 결국 김정연 대표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흔들림 없이 혜성 반도체를 이끌어주고 일성과 인텔 등 여러 인재를 적재적소로 활용해준 덕에 지금의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공격성’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뭐랄까.
김정연 대표는 내가 시키는 일은 곧잘 한다지만, 자신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나는 혜성 그룹 부회장에게 다른 그룹의 부회장들보다 훨씬 더 많은 권한을 줄 생각이었기에 이런 김정연 대표의 소극적인 성격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공격성으로 따진다면, 이재현 대표가 제격이긴 한데.’
일성 전자가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잘나가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중소기업을 차린 것이 혜성 전자의 이재현 대표였다.
내 영입 제안을 받고 혜성 전자의 대표가 된 이후로도 그는 적극성을 잃지 않았다.
지금 혜성 전자가 소련, 폴란드, 헝가리 같은 공산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에 공격적으로 진출하는 것도 이재현 대표의 의지라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외골수적인 성격이라는 점이 문제군.’
컴퓨터, 가전 등 전자 쪽 사업에만 특화된 사람이었다.
자동차나 건설 같은 사업에는 완전히 문외한이었고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부회장으로 두기에 성과가 애매하다는 점도 걸렸다.
혜성 전자가 가전 부문에서 업계 2위까지 올라갔다지만, 매출로 보나 국내 순위로 보나 혜성 반도체와 혜성 자동차에 밀리는 것은 사실이니까.
‘종태 형이 나이가 조금만 더 있었으면 부회장을 맡기는 건데.’
어느덧 혜성 모직의 대표가 된 종태 형.
내 외사촌이라는 배경을 제외해도 능력 하나는 혜성 그룹 안에서 손꼽힌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작디작은 혜성 모직이란 기업을 혜성 건설보다 매출이 큰, 연 1조 이상의 기업으로 일구어내지 않았던가.
물론 내가 토대를 만들긴 했지만, 부침이 많았음에도 꾸준하게 성장세를 이어간 것만으로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종태 형은 이제 겨우 30대 중후반이었으니, 나이 문제가 걸렸다.
뭐, 내가 기용하자면 기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만, 나는 이왕이면 내가 젊은 회장이니 부회장만큼은 나이가 있는 쪽이 나을 거 같았다.
임원들도 당연히 나이를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김동윤, 김한선 같은 인재도 부회장 후보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10년 뒤, 20년 뒤의 혜성을 책임지기엔 충분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혜성을 책임지기엔 역부족일 테니까.
‘아무래도 그분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겠군.’
지금의 혜성을 책임질 인재를 내부 인사 중에서 고르자면, 딱 한 명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혜성 자동차 대표였던 하운철이었다.
* * *
말년을 즐기던 하운철의 저택에 한성이 방문하자, 하운철은 한성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혜성 자동차 대표직에서 사임하고 거의 처음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졌다.
“잘 찾아오셨습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을 오랜만에 보니 참 기분이 좋습니다. 허허. 앞으로도 자주 찾아오시지요. 저는 시간이 아주 많습니다.”
“제가 찾아갈 필요 없이, 하운철 대표님께서 아예 회사로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하운철은 순간 흠칫하였다.
회사로 오라니?
농담일 게 뻔한 말인지만, 괜히 불안하게 느껴졌다.
“허허, 다 늙은 제가 강남까지 어떻게 가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이제 대표가 아니니, 호칭을 다르게 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대표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부회장은 어떻습니까?”
불안감이 현실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하운철은 애써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도 잘하십니다. 부회장이라니요. 허허.”
“그룹 부회장이 오랫동안 비어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하운철 대표님만큼 적임자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