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외계인을 고문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게 HS-90의 시제품 사진입니까?”
박태인의 물음에 이상학 부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박태인은 눈을 빛내며 이상학 부장이 건네준 사진을 살펴보았다.
“와.”
보는 순간 절로 감탄이 나왔다.
한눈에 봐도 지금까지 그가 봐왔던 휴대폰과는 전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어떻습니까?”
“외관만 봐도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 달린 판 같은 건 뭡니까?”
“플립입니다. 여닫을 수가 있는데, HS-90은 세계 최초의 플립형 휴대폰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세계 최초’란 말을 좋아한다.
그것이 휴대폰 같은 첨단산업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이 사진을 기사에 올리면 내일부터 아주 시끄러워지겠는데?’
특종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박태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이상학 부장에게 HS-90의 스펙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무게만 봐도 확실히 이전 제품보다 압도적인 성능이었다.
특히 통화 품질이 좋아졌다고 자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만약 이상학 부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HS-90의 성공은 보장된 거나 다름없었다.
모토로라도 그렇고, 이전에 출시했던 휴대폰들은 대부분 통화 품질 불량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으니까.
“기자님께 한 가지 주의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HS-90과 관련된 기사가 나와도 저희는 절대 저희 제품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박태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혜성의 제품을 광고했는데, 정작 혜성 그룹이 HS-90을 자신의 제품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거라니?
몇 번을 되새겨봐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넘겨준 사진과 정보들은 박태인 기자님이 어렵게 입수한 정보이지, 우리가 공식적으로 넘겨준 정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국 HS-90과 관련된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겠다는 의미였다.
박태인은 헛웃음을 흘리며 이상학 부장에게 물었다.
“소비자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게끔 만들려는 전략입니까?”
“이유는 박태인 기자님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이상학 부장의 의미심장한 말에 박태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 됐든 박태인 기자님으로선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아무 대가 없이 특종을 얻은 셈이니 말입니다.”
그 말에 박태인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원래 같았으면, 이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돈을 꽤나 써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순수하게 기뻐하면 될 거 같았다.
‘새로운 마케팅 전략인 거 같은데,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결과를 볼 거 같군.’
당장 자신만 해도 HS-90의 출시가 기다려졌다.
사진과 스펙 정보를 들으니,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HS-90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부유한 전문직 종사자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 * *
“소한아. 너 곧 휴대폰 살 거라고 했지?”
“어.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일성폰 살까 생각 중이야.”
“지금 사지 말고 조금 더 버티고 사는 게 좋을걸?”
“야. 네가 계속 버티라고 해서 지금까지 버틴 건데, 뭘 또 버티래? 어차피 휴대폰 가격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급속도로 내려가지는 않을 거라니까?”
“가격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지금 일성폰 따위를 사면 네가 손해 볼 거 같아서 그래.”
제품 이름이 어려워서 보통은 혜성폰, 일성폰, 은성폰 이런 식으로 불리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혜성폰이었다.
국내 최초의 휴대폰이었고 성능도 월등하였으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발주자인 은성과 일성에서는 가격으로 승부를 보고 있었는데, 무려 150만 원대까지 가격을 낮춘 상태였다.
모토로라가 다이나택을 처음 출시했을 때 그 가격이 250만 원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백만 원이나 가격을 낮춘 것이다.
물론 그 성능은 혜성은커녕 몇 년 전 제품인 모토로라의 다이나택과 비교하기도 미안한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네가 일성폰을 무시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영업할 때는 쓸 만해. 우리 선배들도 일성폰 쓴다니까?”
“너, 신문 못 봤어? 혜성에서 신제품을 준비하고 있다잖아!”
“신제품? 혜성에서 새로운 휴대폰을 낸다는 거야?”
“그래!”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는 친구의 모습에 정소한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신문을 잘 챙겨보는 성격은 아니다 보니, 혜성에서 신제품을 출시한다는 소식은 그로선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뭐, 신제품 출시한다 해도 내가 어떻게 사겠어? 보나 마나 비쌀 게 뻔한데 말이야.”
“비싸기는 하겠지. 근데, 이번에는 분명히 값어치를 할 거 같아.”
“뭘 보고 그러는 거야?”
“무게가 300g도 안 된데!”
정소한은 입을 떡 벌렸다.
300g이 안 된다니.
휴대폰이란 것이 그렇게까지 가벼워질 수 있는 제품이었단 말인가?
그가 생각하는 휴대폰이란 벽돌처럼 무겁기 그지없는 사치품이었으니, 정소한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가능해? 아니, 혜성에서 처음 휴대폰을 출시한 게 겨우 2년 전인데, 2년 만에 무게를 그렇게까지 줄인다고?”
“뭐, 사실 혜성이 신제품을 출시한다는 것이 100% 확실한 정보는 아니야. 혜성에서는 자신들과 관련 없는 제품이라고 부인했거든.”
“엥? 그건 또 뭔 소리래? 혜성이 부인했으면 혜성의 제품이 아닌 거지, 왜 쓸데없는 말을 한 거야?”
“그게 또 이상해. 혜성에선 분명 아니라고 하는데, 하는 행동들을 보면 비밀로 하던 것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한다니까? 심지어 보안 쪽 책임자는 회장에게 직접 문책당했다는 소문도 있어.”
“진짜 수상한 반응이네.”
“내가 생각하기에, 혜성이 신제품을 준비하고 있는 건 맞아. 근데 아직 준비가 안 끝났는데 언론에 유출되니 화들짝 놀라고 있는 거야.”
정소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신빙성 있는 추측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네가 이야기했던 휴대폰이 곧 출시한다는 거지?”
“그래. 그니까, 괜히 일성폰이나 은성폰 같은 거 살 필요 없어. 괜히 나중에 후회만 하게 될 테니 말이야.”
“쩝. 조금 더 기다려야겠네.”
당장 휴대폰이 갖고 싶었지만, 친구의 말을 들으니 다른 기업에서 판매하는 휴대폰을 사봐야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무게 때문에라도 혜성의 신제품이 출시된다면 바로 바꿔야 할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혜성은 정말 외계인이라도 고문하고 있는 걸까?’
친구들끼리 농담 삼아 하던 이야긴데, 지금은 정말 진지하게 혜성에서 외계인을 고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조업 기업도 아니었던 혜성이,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압도적인 개발 속도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 * *
“아무래도 HS-90에 관한 소문은 사실이 맞는 듯합니다.”
“그럼 정말 혜성에서 300g도 안 되는 신제품을 만들어냈단 말입니까?”
“……예.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이호승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2년 만에 200g대까지 무게를 줄이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 사업에 출사표를 던진 이후, 반도체를 공부했을 때처럼 휴대폰에 관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였다.
그렇기에 알았다.
2년 만에 무게를 절반의 절반 가까이 줄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실상 기술력 하나는 세계 1위를 표방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점유율도 따지고 보면 모토로라 바로 다음이기도 했고.
‘정말 혜성에 외계인이라도 있는 건가.’
휴대폰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반도체 역시도 세계가 경악할 정도로 빠른 발전을 보이는 게 혜성 그룹이었다.
이호승 회장으로선 새삼스레 질리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외계인이든 뭐든, 단기간에 혜성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겠어.’
솔직히 말하면 ‘단기간’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서 도전한다 해도 혜성을 따라잡는 게 가능할지가 의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간격이 좁혀지기는커녕 벌어지고만 있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성 그룹의 이호승 회장이 혜성 그룹의 기술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은성 그룹의 구혁재 회장은 다른 것에 감탄하였다.
“정말 이 사진들이 혜성의 의도 없이, 몰래 유출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예? 그렇다면 혜성이 의도했다는 말씀입니까?”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보안을 가장 신경 쓰는 것이 혜성 그룹인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구혁재 회장은 이번에 유출된 HS-90과 관련된 정보들이 혜성에서 의도적으로 유출한 정보라고 판단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게 지독하리만치 작위적이었다.
사진부터가 어지간한 광고 사진보다도 잘 찍혔지 않은가.
유출된 과정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고 말이다.
‘모토로라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휴대폰을 준비하고 있다지? 아마 그 때문에 이런 마케팅을 선보인 거 같은데, 역시 혜성 그룹이야.’
새삼스레 감탄이 나왔다.
경쟁사를 이런 방식으로 견제를 한다니.
구혁재 회장으로선, 그야말로 상상도 못 했던 방식이었다.
‘지금쯤 가장 곤란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모토로라겠어.’
일성폰이나 은성폰도 물론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조금씩 오르고 있던 점유율이 다시 바닥을 칠 게 분명하니.
하지만 은성이고 일성이고 어차피 휴대폰 사업은 길게 보고 하는 것이었다.
당장 점유율이 떨어진다고 해서 호들갑 떨 필요 없다는 뜻.
반면에 모토로라는?
아마 지금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가 아닐까 싶었다.
* * *
구혁재 회장이 생각한 것처럼, 모토로라 경영진은 혜성 그룹에서 유출된 신제품 정보 때문에 큰 곤욕을 겪고 있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 세계에서도 혜성 그룹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새로운 형태의 휴대폰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세계 최초라는 의미가 희석해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괜히 완벽함을 도모하려다, 좋은 시기를 놓친 거 같습니다.”
사실 마이크로댁 9800X은 작년에 이미 개발을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혜성의 HS-88 때문에 출시를 미뤘었는데, 성능 자체가 HS-88을 압도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가격도 훨씬 비싼데 바 형태를 벗어난 것을 제외하면 성능을 압도하지 못하니, 모토로라 경영진으로선 출시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혜성을 완전히 짓누르면 압도적인 성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모토로라 경영진은 1년을 더 준비하였고 마침내 마이크로댁 9800X의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무게는 319g에, 통화 품질도 대폭 개선되었다.
이 정도라면 혜성의 HS-88을 압도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혜성에서는 불과 2년 만에 신제품을 내놓았다.
심지어 모토로라에서 준비하고 있는 마이크로댁 9800X과 유사한 형태의 휴대폰을 말이다.
“더군다나 무게도 우리보다 가볍다고 합니다.”
“허어, 이럴 수가.”
“혜성이 그리도 기술력이 좋은 기업이었단 말입니까?”
“반도체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드는 곳인데, 기술력이 좋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러면 출시를 서두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당연합니다. 비록 마케팅에선 밀렸지만, 혜성보다 일찍 출시하기만 한다면 모든 화제를 우리가 집어삼킬 수 있을 겁니다.”
모토로라 경영진은 그 같은 결론을 내렸다.
3월로 예정되어 있던 마이크로댁 9800X 출시를 한 달 정도 앞당기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