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유출 마케팅?
(왕주형이는 완전히 정치인이 되려고 작정한 거 같다.)
“미래 그룹의 일에는 완전히 손을 뗐답니까?”
(그래. 당장은 차기 대선을 준비하는 것에 주력하는 모양새야.)
노사가 전해주는 정보를 듣고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재계 1위 자리를 뺏겼으니, 이를 악물고서 반격을 준비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왕주형 명예 회장의 성격 자체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왕주형 명예 회장은 정치 권력을 키우는 것에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왕주형 명예 회장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면, 미래 그룹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겠군요.”
미래 그룹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아예 국내의 일 자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물론, 서해안 개발 프로젝트 같은 굵직굵직한 국책사업에는 반드시 관여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너무 방심하지는 마라. 왕주형이야 그룹 경영에 손을 뗐다지만, 왕재구까지 손을 뗀 것은 아니니.)
“알겠습니다.”
왕주형 명예 회장이면 모를까, 솔직히 왕재구 회장이라면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능력 자체가 워낙에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으니까.
아직도 그룹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보기도 어려웠고.
하지만 선장이 누구든 간에, 미래 그룹은 미래 그룹이었다.
한국 최고의 인재들을 거느리고 있는 기업이었으니, 결코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중동의 정세는 어때 보이더냐?)
노사는 불쑥 중동의 정세를 물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자체는 평온했습니다.”
(이라크는?)
“노사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당장 전쟁이 날 거 같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굉장히 어수선한 상황이었습니다.”
내 말에 노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세계사는 크게 바뀐 것이 없는 거 같구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혜성이 세계의 역사, 그것도 중동의 역사를 바꿀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근데 뭔가 아쉽기도 하군. 나름대로 역사를 많이 바꾼 거 같은데, 세계사는 크게 바뀐 것이 없다니 말이야.’
미래 정보를 이용할 수 있으니, 나쁘게 볼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혜성이 아직은 세계적인 영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하였다.
세계적인 기업을 꿈꾸는 나로선, 실망스러운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일본조차도 반응이 싱겁게만 느껴진단 말이지.’
반도체만 해도 순식간에 세계 4위까지 치고 올라왔는데, 일본 기업들은 혜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치,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자신들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도요타만 혜성 반도체와 기화 자동차를 경계할 뿐이었다.
물론 그조차도 소극적이었지만 말이다.
‘올해부턴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거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노사가 물었다.
(유가 선물에 얼마 정도 동원할 생각이야?)
“1조 정도는 동원할 생각입니다.”
(흠, 1조라.)
“걱정되는 것이 있으십니까?”
(너무 눈에 띌 거 같아서 그렇다.)
사실 나도 그게 걱정이긴 했다.
혜성 그룹으로 많은 돈을 버는 거야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겠지만, 선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국내의 권력자는 물론이고 미국의 권력자들까지 내 돈을 탐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국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혜성 그룹의 힘을 믿고 그러는 거냐?)
“예. 재계 1위가 되었으니, 이제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노사는 피식 웃었다.
(너도 많이 컸구나. 정치 권력과 맞설 생각을 다하다니.)
“정치 권력에 맞설 생각은 없습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 맞서봐야 손해만 볼 뿐이죠. 하지만 제 영향력을 이용한다면, 유가 선물로 얼마를 벌든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국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그럼 미국이 문제겠구나?)
“예. 그래서 올해는 미국 위주로 활동해야 할 거 같습니다.”
(인맥을 만들려고?)
“지금은 너무 민주당 인맥만 있으니, 공화당 인맥도 조금은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좋은 생각이다. 당장은 공화당 시대이니, 공화당 의원들과 인맥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아.)
노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빌 클린턴과의 접촉은 꾸준히 시도해 봐라. 차기 대통령이 될 사람이니, 빌 클린턴과의 인맥을 얻을 수만 있다면 천금을 줘도 아깝지 않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어떨지 모르겠다.
레오 매카시 부지사의 인맥이 빌 클린턴과 연결되어 있다면 편했을 텐데, 아쉽게도 그저 안면만 있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작디작은 아칸소의 주지사이니, 레오 매카시가 아니더라도 의외로 쉽게 인맥이 연결될 수도 있어.’
정 안 되면 혜성 자동차나 기화 자동차의 공장을 아칸소에 세우는 것으로 빌 클린턴과 인맥을 잇는 것도 가능하였다.
아칸소 같은 조그만 주에선 천억 단위의 투자도 귀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올해도 참 바쁘겠어.’
사업뿐만이 아니라, 투자에 정치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뭐 작년에도 그랬으니 유난 떨 일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 * *
“이게 HS-90이라고?”
“예! 회장님께서 주문하셨던 대로, 무게 감량에 성공하였습니다. 딱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가볍습니다.”
김동윤의 말에 나는 눈에 이채를 띄며 HS-90이라 가칭한 휴대폰을 살펴보았다.
디자인부터가 이전과는 궤를 달리하였다.
훨씬 날렵해 보였고, 훨씬 세련되어 보였다.
무엇보다 ‘바’ 형태를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휴대폰이었다.
“이렇게 뚜껑을 여닫는 식인가?”
“예, 플립형 단말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플립형 단말기라.”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HS-90의 실물을 보고 직접 만지기까지 한 지금, 이 순간 나는 확신하였다.
이 휴대폰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란 사실을!
‘무게도 200g대이니, 엄청 가볍다. 주머니에 쏙 넣어도 될 정도야.’
HS-88도 광고할 때야 주머니에 넣어 다녀도 된다고 광고하였었다.
하지만 실제로 HS-88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바지가 한쪽으로 쏠릴 정도로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벽돌만큼은 아니지만, 크기가 너무 큼직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2년이 지나서 개발한 HS-90은 누가 봐도 완벽히 진화한 모습이었다.
무게는 절반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고 크기도 그에 걸맞게 줄어든 것이다.
‘어쩌면 이것으로 휴대폰의 대중화를 주도할 수 있겠는데?’
아직 휴대폰 사용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혜성에서 시장 점유율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데도 HS-88의 판매량이 백만 대가 안 될 정도였다.
심지어 일본, 미국으로 수출한 제품까지 포함한 수치였으니, 한국의 휴대폰 사용자는 많아 봐야 수십만 명일 것이다.
그리고 경제가 발전한 한국에서 휴대폰 사용자가 이토록 적은 것은 단가도 단가지만, ‘무게’가 가장 컸다.
성인 남자도 30분을 못 들 정도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HS-90은 무게가 200g대로 확 줄었다.
가격만 잘 맞춘다면, 1~2년 안에 휴대폰을 대중화하는 것도 가능할 듯싶었다.
“잘 했다. 이 정도면 모토로라를 넘어서는 것도 어렵지 않겠어.”
“회장님께서 지원해주신 덕분입니다!”
김동윤은 뿌듯한 얼굴로 그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매제라서가 아니라, 정말 한 명의 임원으로서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노키아 연구팀과의 협력이 큰 역할을 했다지만,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과시적인 성과를 보인 것은 그의 능력이 그만큼 출중하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라.”
“맡겨만 주십시오.”
“CDMA도 준비하고 있지?”
“예. 지금 개발을 시작했으니, 1993년 안에는 개발을 끝마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마 그때는 100g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동윤의 대답에 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야기 나오는 것을 보면 늦어도 1993년에서 1994년에는 CDMA의 시대가 올 거 같았다.
그러니 지금부터 미리 CDMA의 시대를 준비해야 했는데, 김동윤의 답변을 들어보니 준비는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은성이고, 일성이고 누구도 우리의 아성을 뛰어넘지는 못할 것이다.’
노키아까지 흡수한 혜성이었다.
HS-90의 실물까지 확인했으니, 1990년부터 휴대폰 사업은 혜성이 지배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 * *
김동윤의 보고를 듣고 휴대폰 사업의 성공을 확신하던 나는, 이내 안 좋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 소식이란 다름 아닌, 모토로라의 소식이었는데, 모토로라에서도 HS-90과 비슷한 형태의 휴대폰을 준비 중이란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양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우리가 늦으면, 따라쟁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을 텐데…….’
아직은 소문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노사가 말씀하시길, 모토로라기 1990년에 신제품을 출시하는 것은 확실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신제품이 HS-90과 같은 플립형 디자인이란 것도 확실하였고 말이다.
이러니 나로서는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하면 휴대폰 시장에서 2등 이미지가 굳혀질 수도 있었던 까닭이다.
“출시 일정을 앞당길 수는 없나?”
“최대한 서두르자면 반년 안에는 출시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반년은 너무 늦어. 모토로라가 3월쯤에 신제품을 출시할 거란 이야기가 있어.”
다시 김동윤을 불러 그 같이 독촉하자, 김동윤이 단호하게 말했다.
“한 달, 아니 두 달은 더 일찍 출시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입니다. 불량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날 겁니다.”
“그래?”
불량률이 늘어난다면 모토로라보다 일찍 출시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괜히 그룹 이미지만 안 좋아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
모토로라를 뛰어넘으려면 ‘세계 최초의 플립형 단말기’란 업적은 혜성이 차지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마케팅에서 수를 쓰는 수밖에 없겠어.’
개발팀을 독촉해봤자, 이 이상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는 없었다.
사실 지금도 어떤 기업보다도 개발 기간이 짧은 상태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다른 수단을 생각하였다.
“배승민 전무님.”
“예,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HS-90이라고 휴대폰이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광고를 할 때가 된 겁니까? 제가 듣기로 출시를 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마케팅을 할 생각입니다.”
“다른 방식이라면?”
“유출 마케팅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배승민 전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룹에서 마케팅을 총괄하는 그였지만, 유출 마케팅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유출 마케팅이요?”
“밀당이란 단어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 물론입니다. 연애의 기본은 밀당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저는 밀당이란 게,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에서도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유출 마케팅’이란 이름으로 말입니다.”
내 말에 배승민 전무가 눈을 빛냈다.
“HS-90의 실물 디자인을 유출하실 생각입니까?”
“눈치가 빠르십니다. 배승민 전무께서는 모르겠지만, 현재 모토로라에서도 HS-90과 비슷한 형태의 신제품 출시를 준비 중입니다. 아마 저희보다 조금 더 빠를 거 같은데, 이 유출 마케팅으로 나중에 혹여나 있을 표절 의혹을 없애고 싶습니다.”
배승민 전무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엄청난 아이디어이십니다!”
“어떻습니까? 제 생각대로 될 거 같습니까?”
“디자인이 어떠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구매층은 적더라도 휴대폰을 향한 관심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니 말입니다.”
“한국에서만 마케팅을 해봐야 의미 없습니다. 최대한 많은 국가에 우리 시제품의 사진을 유출해 주십시오.”
“맡겨만 주십시오. 유럽은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동남아에서라면 유출 마케팅의 효과를 내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믿겠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배승민 전무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출 마케팅이란 실로 파격적인 시도였지만, 내 생각대로만 된다면 결과가 나쁘지는 않을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