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재계 1위가 되다
3조짜리 수주를 얻었으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거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내년에 시작될 걸프전.
나는 걸프전을 대비하여 미리 중동의 분위기를 살피기로 하였다.
‘확실히 이라크의 분위기가 안 좋군.’
경제도 나빠졌고, 민심도 흉흉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웃의 쿠웨이트에서 계속 심기를 건드리고 있으니, 아마 지금쯤 이라크 정부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비효과는 없을 거 같다.’
노사가 말했던 대로 내년에 걸프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컸다.
다만 의외인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분위기였다.
“전쟁이요? 하하, 중동은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닙니다.”
당장 내년에 전쟁이 발발할 텐데, 아무도 전쟁 분위기를 못 느끼고 있었다.
이라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이야기했음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왕족들은 시큰둥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미국을 믿고 저러는 거겠지?’
하긴, 실제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사우디아라비아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미국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수주를 받으려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고 말이다.
“저는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봅니다.”
“이라크가 전쟁을 일으키기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빚은 점점 쌓여가는데, 유가는 올라갈 생각을 안 하니, 한 번쯤 도박수를 던져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흠.”
이 같은 분위기 속에 나는 이라크가 돌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괜히 나대는 거 같지만, 이들에게 한 번쯤 내 실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만약에 내가 이야기했던 대로 내년에 진짜 전쟁이 일어난다면?
대부분이야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겠지만, 일부 왕족들은 나를 다른 눈으로 볼 게 분명하였다.
파이잘 왕자의 경우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며, 더 많은 판돈을 나에게 걸려고 할 테지.
‘그때 유가 선물을 한다면 재미 좀 볼 수 있겠어.’
나는 내년과 내후년으로 계획한 유가 선물을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 *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어느덧 1989년도 끝이 나는군.’
한국에 도착하니, 12월 22일이었다.
1990년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혜성’ 붙으면 다 성과급 잔치? 반도체 300%, 자동차 250%, 전자 200%, 계열사는 150%!>
<반도체 하나로 빅4? 혜성 반도체, 5조 매출 달성!>
<혜성 그룹, 마침내 미래 그룹의 매출을 넘어서다!>
<1990년대는 혜성의 시대가 될 것!>
혜성은 언제나 그렇듯 화제의 중심이었다.
연말이라 더더욱 그러했는데, 연말 성과급이 워낙 커서 더 화제가 된 거 같았다.
‘올해는 정말 만족스러운 한 해였어.’
언제라고 만족스럽지 않은 해가 있겠냐마는, 올해는 특히나 의미 있는 해가 아닐까 싶다.
반도체는 일본의 기술을 따라잡았고, 혜성 자동차는 미국 시장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혜성 건설은 서해안 개발 프로젝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수주를 따내며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침내 재계 1위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989년 혜성 그룹의 총매출은 무려 15조.
미래 그룹보다 무려 1조를 더 벌었다.
영업이익으로 따지면 훨씬 차이가 크게 났는데, 혜성 그룹의 영업이익은 거의 3조 대였다.
세금이나 대출 이자 등을 제해도 내년에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2조가 넘는다는 뜻이었다.
다른 기업들은 기껏해야 백억 단위, 빅 4라면 그나마 천억 단위라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천문학적인 자금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지.”
언론에서는 1990년대가 혜성의 시대가 될 거라고 이야기하였다.
재계 1위가 되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하지만 언론이 이야기하는 혜성의 시대란 것은, 어디까지나 국내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그들이 아무리 혜성을 높게 평가해도, 혜성이 세계에서 인정받는 글로벌 기업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우선 반도체부터 세계 1위가 되어야 해.’
혜성 반도체.
점유율로 따지면 세계 3위, 4위를 오가고 있는 기업이었다.
사실 이 정도로도 엄청난 성과라고 볼 수 있었다.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이루어낸 성과였으니까.
하지만 내 목표는 1위였고, 그것도 단기간 안에 압도적인 1위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1990년.
늦어도 1991년이 목표였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충분히 현실성 있다고 생각하였다.
원 역사에서 일성이 이루어낸 성과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반도체 1위는 늦어도 2년 안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도 반드시 일본을 넘어선다.’
이건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었다.
먼 미래의 미래 자동차도 도요타를 넘어서지 못했으니.
하지만 나는 1990년대 안에 도요타를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행히도 기화 자동차가 미국에서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었기에, 도요타를 넘어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고급차 시장은 비교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우리가 우위에 있었으니 말이다.
‘반도체와 자동차만 잡아도 세계 굴지의 기업이 되기엔 부족함이 없지.’
물론 나는 두 가지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반도체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 것이 가전이었으니, 내년부터는 혜성 전자도 본격적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건설, 호텔, 백화점 등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문어발로 계열사를 늘려가지 않는 대신, 가지고 있는 계열사를 최대 규모로 확장할 생각이었다.
모든 계열사가 국내 1위를 넘어, 세계 1위를 할 수 있게끔 말이다.
* * *
혜성 그룹이 미래 그룹을 넘어선 것은 어찌 보면 예상된 결과였다.
성장력이 워낙에 독보적이었던 혜성 그룹이었으니 말이다.
반도체로 몇조 벌었다는 이야기가 매일 들려오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데도 재계에서는 혜성 그룹이 재계 1위가 된 것과 관련해서 말들이 많았다.
거의 10년 만에 미래 그룹이 재계 2위로 밀려났으니, 그 여파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은성이나 정우, 일성에 밀려서 2위가 된 것이 아닌, 10대 기업 중 말단에 불과했던 혜성 그룹에 밀려난 것이니 더더욱 그러했다.
“혜성이 언젠가 미래를 넘어설 거라곤 생각했는데, 벌써 그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반도체에서만 5조를 벌지!”
“건설도 요즘 잘 된다던데요? 내년에는 건설도 조 단위를 번다고 합니다.”
“허, 혜성은 뭐만 하면 조 단위 매출을 버는 거 같습니다.”
재계 인사들은 가장 먼저 혜성 그룹 주력 계열사의 매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론에서 워낙에 떠들어대니, 그들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반도체 하나로 5조 넘는 매출을 거뒀다는 점에서 관심이 급증하였다.
단일 회사로 5조 이상의 매출을 거둔 것은 미래 자동차나 극소수 공기업을 제외하면 혜성 반도체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혜성 그룹과 관련된 화제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언론에 자주 언급된 이야기였으니, 화제가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왕재구 회장이 참 불쌍합니다.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사실상 재계 2위로 밀려난 셈이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정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지만 않았으면 그리되지 않았을 텐데. 쯧쯧.”
“뭐, 정부와 친했다고 결과가 달라졌겠습니까? 이한성 회장이 걸물이고, 왕재구 회장이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인데.”
“적어도 서해안 개발 프로젝트에서 수주를 다른 기업만큼은 따내지 않았겠어요?”
“하하!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미래가 2위 자리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에이, 설마 거기서 더 떨어질 일이 있겠습니까?”
“정우나 은성도 매출 성장세가 엄청나다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한성 회장과 워낙 사이가 좋기도 하니, 지금 매출이 높다고 안심할 수는 없을 겁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참 재미있을 거 같기는 합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재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미래 그룹인데 말입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도 있는데, 미래 그룹이 너무 오만했었던 거 같습니다. 하하하.”
미래 그룹과 관련된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대부분의 사람은 남이 추락하는 것을 보면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도 기뻐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나 미래 그룹처럼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가 추락하는 거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재계 인사들뿐만이 아니라, 사회 여기저기서 미래 그룹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온 나라가 미래 그룹의 추락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감히 미래 그룹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다니.”
왕주형 명예 회장은 이를 갈았다.
미래 그룹이 비웃음의 대상이나,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부러움의 대상이면 부러움의 대상이었지, 결코 동정이나 비웃음을 받아본 적은 없었으니까.
‘혜성 그룹 하나 때문에 대미래 그룹이 이렇게 무시를 당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분했다.
미래 그룹은 여전히 자산 면에서나 매출 면에서나 다른 모든 기업을 압도하였다.
종업원 수도 한국에서 가장 많았고 말이다.
근데 오직 한 기업, 그와는 악연 관계인 혜성 그룹 하나 때문에 미래 그룹 전체가 무시당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반도체 그게 뭐라고 5조를 벌어?’
왕주형 명예 회장은 혜성 그룹이 기화 자동차를 인수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방심한 적이 없었다.
방심하기는커녕 기회가 올 때마다 혜성 그룹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며 어떻게든 견제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의 결과도 반도체 하나로 무의미해졌다.
5조 넘는 매출이 혜성 반도체, 한 기업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심지어 혜성 자동차도 매출 4조를 돌파했다지?’
혜성 그룹의 주력 계열사 중의 한 곳인 혜성 자동차도 무시할 수 없는 성장을 보여주었다.
연 매출 3조를 돌파한 것이 불과 2년도 안 됐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1조를 더 벌어들인 것이다.
미래 자동차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매출 성장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혜성 그룹에서 인수한 기화 자동차도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는데, 내년에는 이곳에서도 4조 이상의 매출이 나올 것으로 전문가들이 예상하였다.
자동차 사업 하나로 지금도 8조 가까이 벌고 있었고, 내년에는 그 이상 벌어들일 것이란 의미였다.
아직 도요타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미래 자동차는 압도적으로 넘어섰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혜성 그룹의 성장이 이다지도 대단한데 과연 재구 그놈이 다시 재계 1위의 자리를 탈환할 수 있을까?’
왕주형 명예회장은 냉정하게 자신의 아들을 평가해 보았다.
성격 급하고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데다, 장기적인 안목이 부족한 게 그의 아들, 왕재구 회장이었다.
재벌 2세 중에선 그나마 나은 편이라지만, 미래 그룹을 경영하기엔 여러모로 손색이 있는 경영인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에 한성은 어떨까?
왕재구 회장과 같은 재벌 2세라지만, 사실상 이병건 회장, 왕주형 명예 회장 등 미래, 일성의 창업주들과 비교되는 것이 한성이란 인물이었다.
이제는 오히려 이병건 회장이나 왕주형 명예 회장보다도 훨씬 고평가받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왕주형 명예 회장조차 이 같은 평가에 이견을 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실력은 대단하였다.
‘이한성, 그자가 혜성 그룹 회장으로 있는 한 미래가 혜성을 넘어설 일은 없겠군.’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절대 혜성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설령 그가 경영 일선에 복귀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1위의 자리를 수성하는 거라면 모를까, 이미 안정적인 기반을 쌓은 혜성 그룹을 상대로 1위 자리를 탈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역시 나는 정계로 가야 한다.’
왕주형 명예 회장은 주먹을 불끈 쥐며 그 같은 결론을 내렸다.
사업에서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정계로 가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기라도 한다면, 혜성 그룹을 넘어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