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3조짜리 수주
대만에서의 일정을 마친 나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하였다.
내년에 있을 대규모 발주를 수주받으려면 미리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텔과의 이야기는 긍정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내가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하는 동안, 동현 그룹의 한제인 회장은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인텔, 애플, 그리고 신생 팹리스 반도체 기업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인텔의 경우는 적게나마 외주를 주기로 약속하였다.
‘역시 한제인 회장의 영업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
물론 내 도움이 크기는 했다.
중간에서 연결고리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애초에 애플이나 인텔의 경영진과 만날 수조차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한제인 회장에게 능력이 없었으면 파운드리 계약까지 끌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인텔 같은 회사가 겨우 나 하나 때문에 계약을 할 리는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애초에 인텔과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축하드립니다. 투자를 조금만 더 늘린다면 TMSC를 완전히 압도할 수 있겠습니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제가 도울 일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제인 회장과 대화를 마무리한 나는 파이잘 왕자와 만났다.
파이잘 왕자는 나를 대단히 반갑게 맞이하더니, 여기저기 자신의 인맥을 소개해 주었다.
하나같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들이었다.
“앱설루트 모회사라고요? 와우!”
“저도 앱설루트라면 RA와 R2까지 보유하고 있는데, 앱설루트의 회장님을 뵙다니, 이거 참 영광입니다!”
혜성의 이름값 때문이었을까?
다행히도 사우디아라비아 왕족들은 제법 정중한 태도로 대해 주었다.
몇몇은 파이잘 왕자처럼 호감을 내비칠 정도였다.
‘사우디아라비아로 오길 잘했군. 여러모로 얻는 게 많아.’
이제 연말이라 한창 바빴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온 것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3조에 달하는 수주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 * *
한국대 대학생들은 동문회에 주기적으로 참석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회로 나가면 바로 체감하게 되는 것이 학연이었기 때문이다.
혜성 그룹을 다니며 남부럽지 않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박기룡 역시도 동문회에 자주 참석하였다.
비록 다른 그룹에 비하면 학연, 지연 등의 연고주의가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혜성 그룹도 명색이 재계 2위 아니, 이제는 확정적으로 재계 1위가 될 기업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명문대 출신이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학연끼리 파벌을 형성하는 일이 많아졌다.
박기룡도 대리가 되면서 점점 인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만약 재계 10위였던 시절에 입사했다면 능력만으로도 한성의 눈에 들어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한성이 아무리 인재를 보는 눈이 남다르다고 해도 수만 명이나 되는 직원들을 전부 살필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하여 그도 시간이 날 때마다 여러 모임에 참석하여 인맥을 넓혀 나갔다.
한국대 동문회라면 당연히 빠질 수 없는 모임이었다.
“오, 기룡이 왔어?”
“아무리 주인공이라고 너무 늦은 거 아니야?”
“늦을 수도 있지. 대리님이잖아. 대리님.”
“아, 부럽다. 박기룡, 벌써 대리야?”
“그러게. 누구는 아직 말단인데.”
박기룡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관심을 느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직도 이런 상황은 익숙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의 그는 그저 공부만 잘하는 학생이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대학교 다닐 때는 학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데모 한 번 제대로 나가지 못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익숙해져야겠지.’
그는 무려 혜성 그룹, 그것도 혜성 그룹에서 주력 계열사로 인정받는 혜성 반도체의 대리였다.
어디를 가든 당연히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박기룡이, 요즘 회사 생활은 어때?”
“똑같지. 너희랑 크게 다를 건 없을걸?”
“다를 게 없기는! 혜성은 야근도 거의 없고, 토요일엔 오전 근무만 하고 끝나면서, 그런 소리를 하냐?”
“그보다 기룡이 넌 결혼 안 하냐? 너 정도 되면 여기저기서 선 들어올 거 같은데.”
“기룡이라면 급할 게 없지. 모난 게 없는데, 천천히 해도 누가 뭐라 하겠어?”
박기룡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사방에서 말을 걸어왔다.
누구 한 명에게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혜성 반도체에서 이번에 또 성과급 잔치 벌인다던데, 기룡이 너도 장난 아니게 벌겠다?”
안 그래도 관심이 폭발적이었는데, 누군가 성과급 이야기까지 꺼내자 박기룡은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수령하지는 않았는데, 작년보단 조금 더 많이 준다고 이야기하더라고.”
“와. 작년에도 장난 아니었다던데, 작년보다 더 준다고?”
“진짜 부럽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혜성 다닐걸.”
“혜성이 네가 다니고 싶다 해서 다닐 수 있는 회사냐?”
“내가 뭐 어때서! 나도 인마, 한국대 나온 인재다, 이 말이야!”
“하하하!”
작년보다 많은 성과급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자, 다들 부럽다는 얼굴로 박기룡을 쳐다봤다.
어지간한 기업의 1년 연봉에 가까운 것이 혜성 그룹의 성과급이었으니 부러워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하지만 한 사람.
미래 전자에 다니는 이창운이 마치 따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그 성과급이 얼마 정도 되는데? 300은 넘어?”
이창운의 질문에 박기룡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도 혜성 그룹에 처음 입사했을 때는 월급과 성과급으로 얼마를 받는지 자세하게 알려줬었다.
혜성맨으로서 혜성 그룹에 다니면 혜택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월급이나 성과급을 자세하게 밝히는 것은 자제하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혜성 그룹의 월급과 성과급은 다른 기업과 비교하면 액수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부러워하는 수준을 넘어, 그를 질투하게 할 것이 뻔한 액수였으니 박기룡으로서도 자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만데? 좀 말해 줘라.”
“맞아! 혜성 그룹이 성과급으로 얼마나 뿌리기에 그토록 유명한지 우리도 좀 들어보자!”
이창운을 시작으로 다른 동기들까지 혜성 반도체의 성과급이 얼마나 대는지를 물었다.
이 모임 자체가 정보를 교환하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기에 박기룡으로서도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정확한 액수를 대지는 않고 적당하게 둘러댔다.
“그냥 직장인 월급보다 좀 많은 수준이야.”
“직장인 월급? 이야. 그러면 너는 월급 두 번 받는 거나 다름없네?”
“기룡이가 말하는 직장인 월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를걸?”
“그래서 얼마 정도라는 건데?”
“아마 4백만 원 정도 받지 않았을까?”
“에이, 설마 그러려고. 4백만 원이면 거의 내 연봉의 절반인데?”
“야, 기룡이 처음 입사했을 때도 2백만 원인가 3백만 원 받았었어. 지금은 대리고 혜성 전자에서 반도체로 옮겼으니 당연히 더 받겠지.”
“신입 때도 2백만 원을 받았다고? 와, 진짜 혜성 장난 아니구나.”
“혜성이 괜히 혜성일까?”
박기룡이 적당하게 둘러댔음에도 저들끼리 이런저런 추측을 하였다.
그리고 그 추측은 의외로 정확도가 높았다.
언론에서 제법 상세하게 다루었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혜성 그룹의 성과급 규모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말 안 하길 잘했네.’
어느 정도 맞췄다지만, 말 그대로 어느 정도일 뿐이었다.
박기룡이 실질적으로 받은 성과급은 무려 6백만 원.
동기가 예상했던 최대 금액보다 무려 2백만 원을 더 벌었다.
심지어 월급까지 합치면 이번 달에만 거의 천만 원에 가까운 돈을 벌었다.
혜성 그룹이 반도체에 6천억을 투자하면서 일이 확 늘어났고, 그로 인해 특별수당까지 챙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천만 원이면 웬만한 대기업 직원의 연봉과 엇비슷한 액수였다.
“혜성이라 해서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별거 없네.”
“4백만 원인데도 별거 없다고?”
“그래 봤자 세금 떼고 뭐 떼고 이러면 3백도 안 남을걸?”
가장 먼저 성과급을 물어봤던, 이창운이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면 창운이가 다니는 미래 전자도 월급이 장난 아니던데. 어떤 사람은 연봉이 거의 5천이 넘는다나?”
“나도 그 이야기 들었어. 미래 그룹이 반도체 사업을 키우려고 인재를 마구 끌어들이고 있다며?”
박기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동기들의 말대로 미래 그룹에서 미래 전자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기는 했다.
그에 따라 연구원들의 월급도 크게 올랐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혜성 반도체나 은성 전자 등에서 영입한 S급 인재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연구원은 그렇게까지 월등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아마 대부분은 월 백만 원에서 최대 2백만 원 정도 받는 수준일 것이다.
‘그리고 이창운도 S급 인재라 부를 정도는 아닐 텐데?’
관계가 나빠서 그런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이창운의 가치는 A급 정도.
연차도 3년 정도니 월급을 아무리 많아 봐야 150만 원 정도에 불과할 가능성이 컸다.
“아니, 미래 그룹과는 상관없어. 나, 퇴사했거든.”
의문 어린 표정을 짓던 박기룡은 이창운의 답변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창운이 잘 다니고 있던 미래 전자에서 퇴사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미래 전자에서 퇴사했다고? 왜?”
“대만의 반도체 기업이 나를 스카웃 했거든. 월에 천만 원씩 준다는데, 솔직히 안 갈 수는 없잖아?”
“헉! 천만 원?”
“미쳤다!”
박기룡에게 향했던 관심은 순식간에 이창운에게로 옮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월 천만 원을 받는다고 하지 않은가?
혜성에서 아무리 성과급을 많이 챙겨준다고 해도 한 달에 몇백 받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창운은 매달 천만 원씩 받는다고 하니, 당연히 이창운에게로 관심이 향할 수밖에 없었다.
스카웃 되는 과정이 궁금할 수밖에 없기도 했고 말이다.
“대만에서 어떻게 찾아온 거야?”
“어떻게 찾아오기는. 내 실력을 알아보고 온 거지.”
“진짜, 부럽다. 월 천만 원이면 삼사 개월만 일해도 강남에 집 한 채는 거뜬히 사겠는데?”
“삼사 개월에 집 한 채면, 일 년에 4채란 거야? 와!”
“실수령액은 조금 다르긴 할 텐데, 그 정도는 되겠지.”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듯,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는 이창운을 보며 박기룡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대만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구나.’
소문은 그도 많이 들었다.
크게 관심은 없었기에 그저 한 귀로 흘려듣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막상 동기가 대만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자 관심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생각했던 것보다 월급으로 주는 돈이 컸기 때문이었다.
‘천만 원이라면 확실히 고민해 볼 만한 일이기는 해.’
기껏해야 2년도 못 갈 파리 인생이기는 했다.
아마 1년만 지나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해고할 것이 분명하리라.
한국으로 돌아오면 어떤 기업에서도 고용하지 않을 것도 문제였고.
하지만 그 1년 동안에 월 천만 원씩만 벌어도 무려 1억이란 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였다.
1억이면 동기의 말처럼 강남 아파트도 몇 채 살 수 있을 돈이니, 혼자라면 평생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미래 전자에 다녔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야.’
미래 전자에 다닌다면 그 역시도 대만으로 가는 선택을 했을지도 몰랐다.
1년만 고생해서 강남에 땅을 살 수만 있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혜성 반도체를 다니는 상태인 지금으로선 고민해 볼 가치도 없었다.
월 천만 원?
지금도 1년에 두 번에서 최대 세 번까지는 월 천만 원에 가깝게 벌고 있었다.
미래에는 당연히 이보다 더 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혜성 반도체는 현재 세계 1위를 노리는 중이다.
그룹으로 따지면 재계 1위를 기정사실화한 상태였고.
박기룡은 혜성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기에, 월 천만 원 아니, 설령 월 2천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아도 혜성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