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이래도 안 온다고?
혜성 그룹이 반도체 사업에 6천억이 넘는 돈을 투자한다는 소식은 한국을 넘어 세계까지 널리 퍼졌다.
“8억 달러라니.”
모리스 창은 혀를 내둘렀다.
TMSC의 창업 당시 자본금은 기껏해야 2억 달러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혜성 그룹에서는 공장을 키우고 기술 개발비에 TMSC의 3년 전 자본금의 네 배를 투자하였다.
‘한국이란 나라는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IT 업계에서 존재감이 아예 없었는데…….’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던 당시, 반도체 업계에서 한국인을 본 적은 거의 없었었다.
애초에 그때까지만 해도 반도체란 미국과 일본의 전유물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실 모리스 창은 일성에서 처음 반도체 사업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실패를 예견하기도 했었다.
한국 같은 나라에서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을 선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일성은 보란 듯이 D램 개발에 성공하였다.
일본, 미국보다 압도적으로 빠른 개발 속도로 말이다.
그리고 일성의 뒤를 이은 혜성은 일성보다 더 경악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순식간에 세계 점유율 4위까지 치고 올라오더니, 이제는 개발 속도까지 일본의 그것을 따라잡은 것이다.
‘일성이 처음 세계를 경악하게 하더니, 일성을 집어삼킨 혜성은 이제 세계까지 집어삼키려고 하는군.’
8억 달러.
이 정도면 혜성에서 승부를 걸었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일본은 여전히 방심하는 모양이지만, 모리스 창이 보기에 혜성이 일본을 넘어설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보였다.
미국에서 일본을 견제하는 한, 혜성에게 기회는 언제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혜성의 발전 속도가 무시무시하다는 것도 그가 그 같은 판단을 내린 이유이기도 했고.
“D램 반도체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 정말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맞습니다. 다른 반도체 기업들은 벌써 은행에서 대출 약속을 철회하고 난리도 아니랍니다.”
“이게 다 사장님께서 과감한 결단을 내려주신 덕입니다.”
임원들이 하는 말을 듣고 모리스 창은 쓴웃음을 지었다.
TMSC는 사실, 처음부터 시스템 반도체를 계획하고 설립된 회사는 아니었다.
그저 대만 정부에서 반도체란 첨단산업에서 배제되는 것이 두려워 다급하게 회사를 설립했을 뿐이다.
그러다 모리스 창이 실권을 휘두르면서 시스템 반도체, 그중에 파운드리를 전문적으로 하는 것으로 방향이 정해졌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이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
자칫 D램 반도체를 선택했다면, 혜성 반도체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D램 반도체를 선택한 다른 반도체 업체들은 날이 갈수록 사정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혜성 반도체에서 8억 달러를 투자한 이상, 미래는 더 암담하면 암담했지, 지금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파운드리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모리스 창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장상이 전무가 물었다.
“동현 반도체 때문에 그러십니까?”
“예. 모두 아시겠지만, 동현 반도체의 대주주가 바로 혜성 그룹의 이한성 회장입니다.”
“으음.”
“허.”
동현 반도체.
사실상 TMSC의 최대 경쟁자였다.
파운드리 쪽으로는 사실상 업계 1위라고도 할 수 있는 기업이었는데, 한국 기업들은 물론이고, 미국의 반도체 기업들도 동현 반도체와 계약을 하고 있었다.
“이한성 회장, 그 사람은 어디 안 끼는 곳이 없는 거 같습니다.”
“한국 반도체의 살아 있는 신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반도체뿐만이 아닙니다. 자동차에 가전에, 혜성 그룹의 계열사가 굵직굵직한 것만 따져도 다섯 개가 넘는답니다.”
“다른 기업이야 그렇다 치고, 동현 반도체가 문제 아닙니까? 이한성 회장이 자신의 인맥으로 동현 반도체에 외주를 따내고 있는데, 지금 인텔과도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파운드리 사업의 주 고객은 미국 업체일 수밖에 없었다.
TMSC도 자국의 고객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미국의 고객을 끌어들이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미국 반도체 기업에서 부사장까지 지낸 모리스 창의 IT 인맥이 상당한데도 미국의 고객을 끌어들이는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다른 반도체 업체들이 혜성이란 난관에 부딪힌 것처럼, TMSC도 혜성이란 난관에 부딪힌 결과였다.
“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임원회의 중인데 손님이라니요. 정부에서 나왔습니까?”
“한국의 혜성 그룹 회장이 찾아왔습니다.”
비서의 말에 모리스 창은 눈을 부릅떴다.
한창 혜성 반도체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가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성이 TMSC의 본사로 찾아왔다고?
임원들도 당황스러웠는지 저들끼리 웅성거리기 바빴다.
“이한성 회장을 말하는 겁니까?”
“예.”
“허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혜성 그룹 회장쯤 되는 인사를 기다리게 둘 수는 없는 일.
모리스 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며 회의를 파하고는 한성을 접견하였다.
* * *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회의 중이라 조금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갑자기 찾아봬서 오히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나는 공손하게 사과하였다.
약속도 없이 찾아온 것은 누가 봐도 무례한 행동이었으니 사과하는 게 마땅한 일이었다.
“회장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말입니까?”
“그야말로 반도체 신화를 이루신 분이 아닙니까. 대만에서도 IT 종사자라면 회장님을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겁니다. 회장님을 뵐 수 있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모리스 창의 반응을 보니, 내 명성이 확실히 커지긴 한 거 같았다.
하긴, 혜성 그룹도 이제는 세계적인 기준으로 봐도 무시할 만한 규모가 아니긴 했다.
매출만 10조가 넘는 대기업이었으니까.
“저도 모리스 사장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전설을 쓰셨다고 말입니다. 경쟁사였던 IBM을 2위로 몰아냈다죠?”
“전설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TMSC의 사업도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내 말에 모리스 창은 흠칫하는 태도를 보였다.
자기 사업에 관심을 드러내니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어떻게 시스템 반도체라는 한 줄기에서 팹리스와 파운드리를 구분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뭐, 이쪽 세계에서는 동현 반도체가 조금 더 일찍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파운드리 사업이란 아이디어를 처음 만든 것은 눈앞에 있는 모리스 창이란 사실을.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니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시로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고 동현 반도체도 덕분에 쏠쏠하게 재미를 보는 중이었다.
“……팹리스와 파운드리 사업을 구분한 것은 한국이 최초인 것으로 아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를 놀리는 거 같습니다.”
“절대 그런 생각은 없었습니다. 오해는 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기만 앞설 뿐, TMSC도 자체적인 아이디어로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한 거 아닙니까? 동현 반도체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불과 1년도 안 됐으니 말입니다.”
“예, 맞습니다.”
“그래서 감탄한 것이었지,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제가 과민반응을 했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괜히 오해하게 만들어서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혹시 대만에 오신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용건을 묻는 그를 보고 나는 잠깐 뜸을 들이며 말문을 열었다.
“사업적으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주된 이유는 하나입니다.”
“뭔가요?”
“모리스 사장님. 사장님을 혜성으로 영입하기 위함입니다.”
“……!”
예상치 못한 말이어서 그런 것일까?
입을 크게 벌리며 경악 어린 표정을 짓는 모리스 창이었다.
“저를 혜성 반도체로 데려가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요. 혜성 반도체가 아닙니다.”
“그럼, 동현 반도체입니까?”
“동현 반도체는 어디까지나 제가 투자한 기업이지, 혜성 그룹의 계열사는 아닙니다.”
“어디로 저를 데려가고 싶으신 겁니까?”
“혜성 그룹 부회장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나는 그에게 실로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공석이던 그룹 부회장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모리스 창이라면 부회장을 시켜도 부족할 게 없는 인재지.’
외부 인사니, 내부의 반발도 적을 것이다.
하버드 출신에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부사장이란 커리어까지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모리스 창의 미래를 알았다.
대만에서 반도체의 아버지라 불리게 될 모리스 창의 미래를.
한국어를 못한다는 게 유일한 흠이지만, 지금처럼 영어로 대화하면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동현 반도체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배제할 수 있는 것도 그를 영입해야 할 이유 중의 하나지.’
시간이 지날수록 동현 반도체의 가치는 커지고 있었다.
내 지분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는데, 혜성 그룹이 보유한 지분과 내가 개인적으로 보유한 지분을 합치면 거의 40%에 가까울 정도였다.
황 노인처럼 우호 지분까지 합치면 사실상 절반을 넘어섰고.
그렇다 보니 나는 동현 반도체를 내 회사로 생각하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TMSC를 경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부회장이라니, 저의 무엇을 보고 그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일개 엔지니어에서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부사장까지 오른 분이 모리스 사장님 아닙니까. IBM까지 꺾었던 그 경력은, 혜성 그룹 부회장이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음…….”
즉답이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모리스 창은 망설임을 보이고 있었다.
‘혜성 그룹 부회장이란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는 것인가?’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기업도 아니고 반도체 사업을 하고 있는 TMSC의 사장인 그가 혜성 그룹이 어떤 기업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혜성 그룹이 어떤 기업인지 알면서도 망설인다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으로 보는 게 합당하리라.
“임기 5년을 보장해드리고, 연봉은 4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모리스 창이 망설이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돈 그리고, 임기 보장.
임원이란 것이 파리 목숨인 경우가 많으니 임기 보장은 어찌 보면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래서 임기 보장을 약속하였다.
심지어 2~3년이 아닌, 5년을 보장해 주었다.
그의 나이도 곧 60대라고 하니, 5년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연봉은 무려 45만 달러를 제시하였는데, 한화로 따지면 3억이 넘는 돈이었다.
혜성 그룹 인원들의 평균 연봉이 1억은커녕 6천만 원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제시한 금액은 실로 터무니없는 액수가 아닐 수 없었다.
노사가 말했던 돈지랄이라고 봐도 무방하였다.
“죄송합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습니까?”
모리스 창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나는 표정을 굳혔다.
그가 내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요. 회장님의 제안은 전부 만족스럽습니다. 오히려 제 가치를 너무 높게 평가해주시는 거 같아서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대만의 반도체 발전에 이바지하려고 귀국한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다시 외국으로 떠날 수는 없습니다.”
애국심 때문에 이런 좋은 기회를 날린다고?
재벌 중에선 그래도 애국심이 투철하다고 생각했던 나지만, 모리스 창의 답변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 좋은 조건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셔도 좋습니다. 주어진 권한이 적을 게 걱정이라면…….”
“아닙니다. 어떤 조건을 제시하든, 제 대답은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모리스 창을 영입하려는 전략은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 * *
‘이렇게 된 이상, 철저하게 밟아주는 수밖에 없겠어.’
모리스 창을 영입하지 못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전략은 하나뿐이었다.
TMSC가 시가총액 600조에 달하는 거대 기업이 되지 못하게 철저히 밟아주는 것.
그래서 TMSC가 차지할 영향력과 인지도를 동현 반도체가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내가 앞으로 밀고 가야 할 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