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6,000억을 투자하겠습니다
“7배를 준다고 해봤자, 결국 토사구팽당할 운명일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쯧쯧.”
“은성 그룹에서는 어떻게 대비하고 계십니까?”
“일단은 최상급 인재에 대한 대우를 늘리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그룹에서도 최상급 인재라면 월급이 5백만 원에 가깝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게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월 4~5백을 준다 해도, 자유중국에서 몇천을 약속한다면 결국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맞는 말이다.
돈 때문에 넘어갈 인재라면, 아무리 월급을 많이 준다 해도 의미가 없었다.
대만에서는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의 월급을 제시할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인재 강탈과 관련된 문제는 공동으로 대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동 대응이라면?”
“이를테면, 자유중국에 넘어간 연구자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한국에서는 절대 취업하지 못하게 막는 겁니다.”
조금 치졸하게 느껴지는 수였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말에 동조하였다.
만약 대우가 부족했다면 당연히 우리의 잘못이겠지만, 솔직히 은성 그룹이나 혜성 그룹의 경우 연구자에 대한 대우는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능력이 뛰어난 연구자는 직장인 평균 월급의 5배 이상, 우리 그룹의 경우, 성과급까지 합하면 열 배 이상도 벌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계속 대우는 좋아지고 있기도 했고.
이런데도 만족 못 하고 대만으로 가서 우리의 기술을 넘긴다면, 그건 사실상 매국노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지금 이 문제를 확실하게 처리해야 나중에 중국이 득세할 때도 대비할 수가 있어.’
대만은 그래도 평균 월급의 7배 정도가 제시할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7배를 넘어 열 배, 아니, 그 이상도 약속하고는 했다.
한국 기업들로선 중국의 이 같은 비상식적인 공세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전경련에서 공식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끔 이한철 명예 회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혜성 그룹이 나서준다면 자유중국으로 유출되는 인재가 조금은 줄어들겠습니다. 하하.”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뭐, 조소를 짓는 노사의 표정을 보면 그렇게 쉽게 인재 유출을 막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축하 인사를 하는 게 늦었군요.”
“축하라면?”
“16K D램 개발에 성공하셨지 않습니까.”
“아.”
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나도 처음 개발 성공 소식을 들었을 때, 날아갈 거 같은 기분이었지만, 이미 시간이 지난 상황이었으니 지금은 무덤덤하기만 하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실상 일본을 완전히 따라잡은 셈 아닙니까?”
언제나 일본의 뒤를 좇기만 했던 혜성 반도체였다.
그런데 마침내 16K D램은 같은 시기에 개발을 완료하였다.
물론 일본이 몇 개월 더 빨랐지만, 연 단위로 차이 났던 과거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일본을 따라잡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추월해야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본을 추월할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구혁재 회장이 혀를 내둘렀다.
현재 D램 시장의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는 것이 일본 도시바와 NEC였다.
한국에서 그토록 찬양하는 혜성 반도체조차 세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점유율이 10%도 채 안 되는 상황.
솔직히 일본의 개발 속도를 따라잡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근데 나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일본을 완전히 추월할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니, 구혁재 회장으로선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제까지 일본에 질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허어, 이 회장님을 볼 때면 정말 감탄밖에 안 나오는 거 같습니다.”
“은성도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기술을 따라잡고 있으면서 뭐 그리 약한 소리를 하고 그러십니까.”
“이제 겨우 4K D램을 개발했는데, 무섭다니요. 솔직히 저는 혜성 반도체를 넘어서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그저, 미래 전자에만 밀리지 않게 노력할 뿐입니다.”
나약한 소리였지만, 아마 저게 그의 진심이 아닐까 싶었다.
은성 전자가 아무리 반도체 투자에 열성적이라지만, 우리는 그 이상이었으니 혜성 반도체를 따라잡을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지. 구혁재 회장이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니 말이야.’
사업에 있어서는 왕재구 회장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구혁재 회장이 아닐까 싶었다.
감정에 휘둘리는 왕재구 회장과 달리 언제나 이성적인 그였으니까.
* * *
(일단 보안부터 강화하는 게 좋겠다.)
구혁재 회장과 대화가 마무리되자, 노사가 불쑥 그 같이 말했다.
“혜성 그룹의 보안 수준은 한국 최고라고 하던데, 굳이 더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봤자 한국에서 최고 수준일 뿐이야. 세계를 기준으로 보면 혜성 그룹의 보안도 허술하기 그지없어.)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보안이 허술하단 평가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특히 혜성 반도체의 경우, 미국 전문가들까지 불러서 보안 시스템을 갖췄으니까.
하지만 구태여 노사의 말에 부정하지는 않았다.
21세기를 경험한 노사의 눈으로 보기엔 혜성 그룹의 보안은 허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보안팀을 조금 더 키워야겠군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키우는 게 좋을 거다. 반도체 같은 경우는 일본의 기술을 넘어설 날이 그리 멀지 않았으니까.)
“알겠습니다.”
돈을 더 쓰게 되겠지만, 유비무환이란 말도 있으니 최대한 대비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간신히 일본 기술을 넘어섰는데 보안이 허술하여 그 기술을 뺏긴다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내가 가끔 산업 스파이가 있나 살펴보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구혁재 회장이 말했던 것처럼 인재 유출도 최대한 막을 필요가 있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직원들을 빚으로 묶어두는 것이 가장 좋지. 아니면 스톡옵션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스톡옵션이라. 그런데, 빚이라면 어떤 빚을 말하는 겁니까?”
(회사에서 직원들의 주택을 마련해 주는 식으로 빚을 만드는 거야. 직원들이야 저리로 주택을 사서 좋고 우리는 직원들을 묶어놓을 수 있으니 좋지 않겠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충성도를 높일 수도 있고, 인재 유출을 막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가장 좋은 전략은 언제나 그렇듯, 방어가 아닌 공격이다.)
“공격이라면, 대만의 인재를 뺏으라는 말입니까?”
(정확히는 TMSC의 사장인 모리스 창을 영입하는 게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일 것이야.)
모리스 창이라면 나도 알고 있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이란 반도체 기업에서 부사장까지 지낸 인물이라나?
미국 IT에선 인지도가 상당하였는데, 대만 정부의 부름을 받아 귀국하여 지금은 공기업인 TMSC의 경영을 도맡고 있었다.
“과연 그를 영입할 수 있겠습니까? 지분이 아무리 없는 수준이라지만, 그래도 TMSC의 사장인데?”
(예전이라면 혜성이 듣보잡이었으니 힘들었겠지. 하지만 지금이라면 불가능할 건 없다고 본다. 최고의 대우만 해준다면 말이야.)
하긴, 혜성의 이름값이라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 같았다.
반도체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업에서 혜성의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한번 시도는 해보는 게 좋겠군요.”
(대만에서 돈지랄을 했으니, 너도 돈지랄을 해 봐. 모리스 창은 TMSC를 600조 이상의 기업으로 만든 사람이니, 아무리 돈을 써도 아까워할 필요는 없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피식 웃었다.
돈지랄이라.
국내를 넘어 외국에서 돈지랄을 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거 같았다.
(아, 그리고 아까 구혁재가 미래 전자 이야기를 했었지?)
“예. 미래 그룹이 반도체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면서, 저에게 경고하였었습니다.”
(경고할 만해. 왜냐하면, 미래 그룹에서 반도체에 2천억 투자할 예정이거든.)
“2천억이라.”
반도체나 자동차 중 한 곳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할 것도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반반씩 투자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지.’
2천억이면 엄청난 돈이긴 했다.
하지만 혜성 그룹의 사내 유보금은 미래 그룹의 사내 유보금보다 훨씬 넉넉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에 반도체에서만 영업이익으로 4천억 이상을 벌었다.
올해까지 합치면 무려 1조에 가까웠고 말이다.
“그럼 저희는 반도체에 6천억을 투자해야 할 거 같습니다.”
(세 배나 더 투자하겠다는 거냐?)
“왕재구 회장에게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진다는 속담을 알게 해주고 싶습니다.”
내 말에 노사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 정도로 투자를 한다면 왕재구가 아니라 그 아비인, 왕주형이라도 기가 질릴 수밖에 없겠구나.)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쩌면 원 역사의 일성 반도체보다 일찍 시장의 절대자가 될 수 있겠어.)
“원 역사의 일성은 언제 세계 1위를 차지했습니까?”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아마 1992년에 D램 메모리 매출액 전 세계 1위를 달성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일본보다 먼저 16K D램의 양산화에 성공했고 말이야.)
“1992년이라. 그럼 저는 최소 1년 이상은 단축해야겠군요.”
1년.
짧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반도체 업계에서 1년이면 엄청난 시간이었다.
만약 혜성 반도체가 일성 반도체보다 1년 일찍 16K D램의 양산과 점유율 1위를 달성한다면, 일성보다 더 압도적인 기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천억을 투자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일성이라도 이 정도의 돈은 투자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야.’
미래도 사업 하나에 6천억을 쏟아붓는 짓은 절대 못 한다.
일성이라면 아마 최대가 3천억이었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혜성 반도체는 일성보다 더 높은 성과를 달성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었다.
* * *
미래 그룹이 반도체 사업에 2천억을 새로 투자할 거란 소식이 재계를 강타하였다.
“반도체에 2천억이라니? 망하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2천억이면 망하는 게 더 어려운 거 아닐까?”
“그러니까. 2천억이 얼마나 많은 돈인데? 어쩌면 이번 투자로 미래가 혜성 반도체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몰라.”
“혜성 반도체를 넘어선다고? 지금 세계에서 5위 안에 드는 게 혜성 반도체인데?”
“모르는 일이지. 혜성 반도체도 겨우 몇 년 만에 세계 5위가 된 거잖아. 2천억씩이나 동원했는데 미래라고 못할 것이 뭐 있겠어?”
“그나저나 반도체가 돈이 되기는 하나 보네. 미래 그룹에서 저리 나설 정도라니.”
재계는 크게 술렁였다.
몇몇 사람들은 미래 전자가 곧 혜성 반도체를 추월할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2천억이면, 업계의 판도를 바꾸기에 부족함이 없는 액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래 전자의 투자 소식에 재계가 크게 술렁일 때, 마치 반격이라도 하듯 혜성 반도체도 반도체 사업에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였다.
그 액수는 무려 미래 전자의 세 배였다.
“내년에만 6천억을 투자한다고? 미쳤군!”
“혜성 그룹이 이렇게 돈이 많단 말이야? 이거, 미래 전자와 비교할 게 아니었는데?”
“미래는 무슨! 혜성 반도체는 세계를 노리고 있어. 회장부터가 일본 타도를 외치는데 미래 전자를 안중에나 두겠어?”
“하하, 왕재구 회장의 꼴만 우습게 됐군! 혜성 반도체를 꺾어내고 말 것이라고 기고만장하게 선언했는데 말이야.”
“은성에서도 천억 단위의 투자를 한다고 하니, 미래는 은성 이기기도 벅찰걸?”
반도체 사업에서 설욕을 갚으려던 왕재구 회장은 2천억씩이나 동원했음에도 오히려 비웃음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