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대만도 경계해야 할 때지
4천억이면 엄청난 돈이었다.
기화 자동차 정도 되는 기업도 인수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국내에는 미래 그룹에서 인수할 만한 자동차 기업이 더는 남아 있지 않지만,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동차에 문외한인 노사조차 알고 있는 해외 자동차 브랜드도 충분히 인수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이었기 때문이다.
‘꼭 자동차에만 돈을 쓰라는 법은 없지.’
이미 미래 그룹은 자동차에 엄청난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상태였다.
프리미엄 브랜드도 이미 미국에 진출하였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음에도 투자를 계속 늘리고 있었다.
그렇다 해서 소형차 부문의 투자를 줄인 것도 아니었다.
혜성 그룹이 기화 자동차를 인수해서 그런지, 소형차 부문을 더욱더 공격적으로 영업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미국 사업에서 기화 자동차의 최대 난관은 미래 자동차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혜성 그룹이 경계해야 할 것은 미래 자동차뿐만이 아니었다.
미래 전자도 무서운 속도로 혜성 전자와 혜성 반도체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반도체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4천억을 4M D램에 투자할 가능성도 적지는 않겠어.’
어쩌면 반도체와 자동차 모두에 투자할 수도 있었다.
한국에서 혜성 다음으로 사내 유보금이 풍부한 미래 그룹이라면, 두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진정한 자금력 승부를 보겠군.’
나는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매출이야 미래 그룹에 밀릴 수는 있지만, 영업이익은 이미 미래 그룹을 넘어선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반도체 사업은 이미 한참 앞서 나가고 있기도 하니, 미래 전자에 밀릴 일은 절대 없으리라.
* * *
11월 9일.
마침내 냉전의 괴물이라 불리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이 사실이 한국에 알려지자 서독 교민들이 그러했듯, 한국 사람들은 크게 열광하였다.
“통일도 시간문제겠어!”
“이미 20만 명이 넘는 동독 사람들이 서독으로 빠져나갔다더군!”
“서독의 반응은 어떻다던가?”
“말해 뭐 해! 같은 민족인데 당연히 환영하지 않았겠어?”
사람들은 독일이 곧 통일할 것을 예상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는데 통일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생각이었다.
당연히 한국 사람들은 이런 독일의 모습을 보며 희망에 찰 수밖에 없었다.
“독일 시민들도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는데, 우리라고 38선 장벽을 무너뜨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어?”
“옳소! 애초에 우리가 분단되고 싶어서 분단된 건가? 외세에 의해 강제로 쪼개진 거잖아! 민족이 원하고 있으니 다시 통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통일.
작년까지만 해도 현실성 없는 이야기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올해가 되면서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가 시작되자, 마냥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게 결정적이었다.
사람들은 독일도 곧 통일한다는데, 한국이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환영 동독인’ 흥분의 도가니.>
<우리의 남북 장벽도 이젠 허물자!>
이런 사람들의 기대에 언론들도 동참하였다.
심지어 어떤 언론사는 당장이라도 38선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때 남북관계에도 진전이 있었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에서 남북적십자 제5차 실무대표접촉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더욱더 통일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네는 통일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나?”
김영산 대통령이 고영태 비서실장에게 불쑥 그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고영태 비서실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였다.
“임기 내에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북한이 하는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모습에 김영산 대통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안타깝게도 고영태 비서실장의 말처럼, 근시일 내에 통일을 이루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북한의 관영 언론은 연일 사회주의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었고, 북한 군부는 무리하면서까지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령 통일을 할 수 있다 해도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서독처럼 북한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독일이 통일될 것이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서독의 경제력이 동독의 경제력을 압도하기 때문이었다.
세수입만 해도 다섯 배 이상 차이가 났다.
1인당 GDP 역시 두 배 이상 차이가 났고 말이다.
남북한의 경제력도 70년대에 비해 격차가 많이 벌어졌다고 알려졌지만, 아직 독일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보수적 성향인 김영산 대통령처럼 남한에 의한 흡수 통일을 원한다면 더 압도적인 격차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기업들이 조금 더 힘을 내야 한다는 뜻이군.”
“북한의 경제 성장률은 기껏해야 2% 정도로 알려져 있으니, 지금의 성장세만 이어간다면 차기 정부에서는 통일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안 돼도 8년 안에는 통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니, 한국인으로선 기분 좋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김영산 대통령은 아쉽기만 할 따름이었다.
자신의 임기 때 통일을 이룰 수 없으니 말이다.
* * *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니, 온 나라가 어수선해졌군요. 하하.”
은성 그룹의 구혁재 회장이 오랜만에 사옥을 찾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미래 그룹도 굉장히 어수선하다는데, 혹시 들으셨습니까?”
“예. 왕주형 명예 회장의 고향이 북쪽이라 그런지, 미래 그룹에서 통일을 기대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당분간 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회장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슬쩍 내 생각을 묻는 구혁재 회장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 역시 통일은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예 당분간이란 수식어도 제외했다.
노사를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난 미래에도 통일은 요원했단 사실을.
‘미래가 바뀌었으니,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뭐 크게 기대할 필요는 없지.’
아무리 미래가 바뀐다 해도 과연 한반도 통일까지 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물론 가능하다면 나도 평화 통일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미래 그룹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왕재구 회장이 많이 분노한 거 같습니다.”
“대한 중공업 때문에 그렇답니까?”
“예. 왕재구 회장은 이한성 회장님께 농락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왕재구 회장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일부로 농락할 생각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미래 그룹을 농락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중도 포기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인수 조건도 까다롭고,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부실기업이란 판단이 서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 변명하듯 그 같이 말했다.
은성 그룹도 대한 중공업 인수를 희망하던 기업 중의 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자금력 승부하는 것이 두려워 일찍이 인수를 포기했던 사람이지.’
만약에 내가 대한 중공업을 인수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은성 그룹도 대한 중공업 인수를 끝까지 밀고 갔을 수도 있을 터.
이러니 구혁재 회장에게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저에게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오히려 결과가 이렇게 나와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적어도 미래 그룹에서 중공업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는 결과보단, 다시 공기업 체제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은 결과 아니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혁재 회장이 아무리 왕재구 회장과 돈독한 사이라지만, 그는 이해득실을 명확하게 따지는 성격이었다.
미래 그룹의 성공이 은성 그룹에 해가 간다면 얼마든지 방해할 수 있는 인물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대한 중공업의 입찰 경쟁이 흐지부지된 것 역시 그로서는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구 회장님께서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저로서는 마음이 편합니다.”
“저를 신경써 주시는 것은 좋은데, 미래 그룹의 왕 회장부터 진정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구혁재 회장은 나와 왕재구 회장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긴, 빅 4의 은성 그룹 회장인 데다 왕재구 회장과의 사이도 각별하니 그가 그런 역할을 맡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근데 나는 미래 그룹과 화해할 생각이 없는데 말이지.’
내가 재계 1위를 노리는 순간부터 이미 미래 그룹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있었던 대한 중공업과 관련된 신경전 또한 통과의례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물론 이런 본심을 그대로 밝힐 필요는 없었다.
미래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다만, 왕 회장이 과연 마음을 풀 생각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첨예하게 부딪치는 사업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자동차 사업, 전자 사업에 이어 최근에는 중공업과 반도체 그리고 건설 사업까지 추가되었다.
내 성격이 어떻건 간에, 두 기업은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단 뜻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미래도 반도체에 공격적으로 투자를 늘린다고 하니, 이 회장님께서도 꽤 신경이 쓰이겠습니다.”
“글쎄요. 반도체에 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의외입니다. 미래 그룹의 인재 빼가기 전략이 워낙 논란이 되고 있어서 당연히 이 회장님께서도 민감하게 받아들이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미래 전자가 혜성 반도체의 인재를 노리는 것이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애초에 미래 전자에서 제시할 수 있는 연봉은 우리 혜성에서 지급하는 연봉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아서 별로 걱정되지는 않습니다.”
업계 최고의 연봉을 지급하는 것이 혜성 그룹이었다.
아무리 미래 그룹에서 업계 평균보다 많은 돈을 제시한다 해도, 혜성 그룹의 직원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성과급까지 포함한다면 미래 그룹에 가는 것보다 혜성 그룹에 남는 것이 훨씬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복지나 다른 어떤 것을 봐도 혜성 그룹이 훨씬 우위에 있었고 말이다.
사실 미래 그룹보다 다른 곳이 더 문제였다.
“저는 오히려 중국을 더 경계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구혁재 회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유중국을 말하는 거군요.”
“예, 맞습니다.”
내가 있는 한, 미래 전자가 혜성 반도체를 쫓아올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중국 즉, 대만이라면 달랐다.
D램 반도체야 절대 넘어설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컸지만, 시스템 반도체는 절대 안심할 수가 없었다.
‘대만에는 TMSC가 있다!’
노사가 말해준 미래만 떠올려도 대만은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업계 평균 연봉의 7배를 준다니. 정말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거 같습니다.”
구혁재 회장도 대만에 당한 것이 많은지, 혀를 차며 그 같이 말했다.
하긴, 그 역시 기술력 하나는 남부럽지 않은 은성 그룹 회장이었으니, 대만의 인재 빼앗기 전략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미래에도 중국이 문제더니, 지금도 중국이 문제구나.)
노사가 불쑥 나타나 그 같이 말하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노사가 말하는 미래의 중국은 현재 중공이라 불리는 나라고 지금 인력 빼가기를 시도하는 나라는 대만이란 나라였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로서는 둘 다 비슷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