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결국 유찰되는 법이지
나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어렵게 따낸 관급 공사를 뭣 하러 포기하란 말인가.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해?’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왕재구 회장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혜성이 양보하지 않는다면, 대한 중공업은 포기하셔야 할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한 중공업은 미래가 가져갈 것이니 말입니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회유책이기도 했다.
조금 양보해 주면, 대한 중공업을 넘겨줄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 말은 저희 쪽에서 공사 몇 건 정도 양보하면, 대한 중공업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고개를 끄덕였다고 내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혜성 그룹을 상대로 입찰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못 할 건 없다고 봅니다만?”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보시죠.”
같잖다는 듯 조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왕재구 회장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못 할 거 같습니까?”
“자금력으로 승부하면 누가 이길지 너무 명백한데, 구태여 도전하시겠다면 피하지 않겠습니다.”
“이익!”
왕재구 회장은 나를 강하게 노려보았지만, 나는 그저 무심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자 왕재구 회장은 애써 분노를 삭이며 말했다.
“괜히 이 회장의 시간만 뺏은 꼴이 되어 버렸군요.”
“다음에는 조금 더 건설적인 대화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끝까지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었다.
어차피 적이니, 인정사정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한 중공업이 혜성 그룹으로 넘어갈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오늘 일을 후회하지 않길 바랍니다.”
자존심 때문인지, 애써 차분한 기색으로 말을 하고는 그대로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는 왕재구 회장이었다.
‘기껏 한다는 제안이 그딴 거라니.’
제 딴에는 큰 각오를 하고서 사옥까지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선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겨우 대한 중공업 하나 가지고 수주 공사를 양보해달라니.
애초에 제 것도 아닌 것을 두고 협상하려는 그 태도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도 미래 그룹이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매출 차이도 기껏해야 2조 정도 날까 싶었다.
이제는 두 기업의 차이도 그리 크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왕재구 회장은 여전히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 같아서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왕재구 회장과의 대화는 잘 되셨습니까?”
“비서실장님이 생각하기엔 어떨 거 같습니까?”
“왕재구 회장이 콧김을 뿜어내며 나간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대화가 순조롭게 끝나지는 않았을 거 같습니다.”
“예. 맞습니다. 미래 그룹에서 아주 황당한 제안을 하더군요.”
나는 진봉현 비서실장에게 왕재구 회장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진봉현 비서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왕재구 회장 쪽에서 이치에 맞지 않는 제안을 한 거 같기는 합니다.”
“제가 무슨 대한 중공업에 목숨을 건 사람도 아닌데, 나 참.”
“그런데 왕재구 회장과 대화가 그렇게 끝났으니, 대한 중공업을 인수하려면 더 많은 자금을 써야겠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왕재구 회장도 자존심이 있으면 대한 중공업 입찰 경쟁에서 어떻게든 설욕하고 싶을 것이다.
그 말은 즉, 대한 중공업을 인수하려면 최소 4천억 이상의 자금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기존에도 3천억 이상의 가치로 평가받던 기업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대한 중공업을 인수할 생각을 가졌을 때의 이야기지.’
사람들은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나는 지금껏 대한 중공업과 관련해서 어떤 입장도 밝힌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왕재구 회장을 포함하여 재계 전체가 대한 중공업 입찰에 뛰어드는 것을 기정사실로 두었다.
심지어 내 최측근인 진봉현 비서실장조차 말이다.
“글쎄요.”
“예?”
“저는 딱히 대한 중공업을 인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정말입니까?”
“까다로운 인수 조건 때문에 다른 기업에서도 포기하고 있는데, 왜 저라고 끝까지 고집할 거로 생각하십니까?”
“그야…… 회장님은 지금껏 많은 기업을 인수하였고, 자금력도 풍부하시니 대한 중공업 정도 되는 기업이라면 반드시 인수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이유로 그 같은 추측을 했을 것이다.
돈 많고 사업 확장 욕도 엄청난데, 대한 중공업을 인수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만약 노사가 없었으면 나도 어쩌면 무리해서라도 대한 중공업을 인수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에겐 노사가 있었다.
그리고 노사가 조언하기를, 대한 중공업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한다.
하여 나는 구태여 대한 중공업을 인수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누구도 대한 중공업을 인수하지 못하게 막았을 뿐이다.
물론 미래 그룹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미래 그룹 하나만 남았다면 입찰 경쟁이 성사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입찰 경쟁사가 없으면 결국 유찰되는 법이지.’
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왕재구 회장이 대한 중공업에 아무리 공을 들여봤자, 허사가 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으니 나로선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11월 7일 오후 2시.
산업은행 회의실에서 대한 중공업 공개 입찰이 시행되었다.
보통 대리인을 보내기 마련이었으나, 왕재구 회장은 친히 산업은행으로 왕림하였다.
그만큼 그가 대한 중공업 인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였다.
“4,600억이면 충분할 거 같아?”
팔짱을 끼고 있던 왕재구 회장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김종국 미래 중공업 사장에게 물었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입찰에 미래 건설에서 쓰기로 한 금액이 무려 4,600억이었다.
미래 자동차의 투자도 미루고 힘들게 모은 자금이었으니, 그로서는 대단히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혜성 그룹도 웬만해서는 4천억 이상을 쓰지 않을 겁니다.”
“김 사장도 알겠지만, 혜성 그룹은 돈이 많아. 이한성, 그놈이 우리 아버지보다 돈이 더 많다는 말이다.”
왕재구 회장이 긴장한 이유도 이것이다.
혜성 그룹의 자금력은 실로 천문학적인 수준.
반도체며 자동차며 언론에서도 보도할 정도로 열심히 투자를 늘리고 있었지만, 한성의 개인 자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웬만한 대기업의 사내 유보금보다 많다고 알려진 한성의 개인 자금이 말이다.
그렇다 보니 왕재구 회장으로선 4,600억이란 거금을 동원했으면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혜성 그룹이 4,600억 이상의 자금을 동원하면 오히려 혜성 그룹의 손해입니다. 우리 그룹이야 대한 중공업을 인수할 경우, 시장의 50%를 지배하게 되어 손해가 아니지만, 혜성 그룹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음, 그렇겠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혜성 그룹이 어떤 선택을 했든, 이 승부는 우리의 승리로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김종국 사장의 말에 왕재구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다독이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아직도 나를 후계자 대하듯 대하는군. 누가 뭐래도 미래 그룹의 회장은 나인데 말이야.’
하지만 어찌 되었건 김종국 사장의 말을 들으니, 긴장이 풀리기는 했다.
이번 입찰 경쟁은 결국 미래 그룹의 승리나 마찬가지였다.
4,600억으로 인수한다면 당연히 미래 그룹의 승리였고 혜성 그룹에서 많은 금액을 지른다면 그만큼 혜성 그룹의 자금을 쓰게 만드는 셈이니, 그 또한 미래 그룹의 승리라고 볼 수 있었다.
기껏해야 시장 점유율 20%를 차지하겠다고 4,600억이나 쓰는 것은 혜성 그룹의 입장에선 엄청난 손해였으니 말이다.
여유를 되찾은 왕재구 회장은 팔짱을 끼고는 시계를 봤다.
“시간이 다 된 거 아닌가?”
“예. 아무래도 이한성 회장은 지각하려는 모양입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 어른이 기다리는데 지각을 해?”
“원래부터 예의를 모르던 자 아닙니까. 너무 마음 쓸 필요 없습니다.”
“쯧!”
김종국 사장이 타이르듯 하는 말에 왕재구 회장은 혀를 차고는 다시 차분하게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자, 그의 인내심은 한계를 맞이하였다.
쾅!
“도대체 혜성 그룹 회장은 언제 오는 거야!”
그러자 입찰 진행자인 산업은행의 신 부장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했다.
“혜성 그룹 쪽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는데, 절차가 조금 지연이 될 거 같습니다.”
“아직도 소식이 없다는 말이요?”
“예.”
“빌어먹을. 내 시간을 이리 헛되이 보내게 하다니!”
“회장님께서 만약 절차가 지연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입찰은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신 부장의 말에 왕재구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입찰을 마무리한다는 말은 뭔 뜻이오?”
“유찰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차를 지연하는 것에 동의하겠소.”
대한 중공업이 유찰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왕재구 회장은 애써 인내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다시 몇 분을 기다려도 혜성 그룹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시간대면 차가 막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늦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종국 사장의 말을 듣자, 왕재구 회장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한성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이러다 안 오는 거 아니야?”
“예?”
“이한성 그놈이 우리를 물 먹인 거 아니냐는 말이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등록 신청까지 했으면서 입찰에 불참하면 상공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정부와 여당이 그놈의 뒤에 있는데 상공부가 두렵겠어?”
“…….”
왕재구 회장의 의심이 합당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김종국 사장은 더 부정하지 않고 시계를 봤다.
어느덧 30분이 지나 있었다.
제아무리 차가 막힌다 해도 이렇게까지 늦게 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혜성 그룹의 사옥은 이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혜성 그룹에서는 불참을 선언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왕재구 회장의 추측은 정확하였다.
뒤늦게 혜성 그룹에서 불참을 선언한 것이다.
“이한성 이 빌어먹을 놈 같으니! 이번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왕재구 회장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미래 그룹의 회장인 그가 무려 40분을 기다렸다.
하지만 40분을 기다린 것보다, 혜성 그룹의 수작에 놀아났다는 사실이 더 열 받았다.
4,600억이라는 거금을 몇 주 동안 묶어놨다는 것도 미래 그룹에 적지 않은 손해를 안겨주었고 말이다.
* * *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대한 중공업 유찰!>
경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야 신경도 쓰지 않을 기사 제목이었다.
하지만 재계의 인사들은 달랐다.
그 가치가 아무리 못해도 수천억으로 알려진 기업이 대한 중공업이었다.
어떤 대기업에 가도 단숨에 주력 계열사가 될 거대 기업이었으니, 대한 중공업의 행방은 재계 전체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대한 중공업의 행방은 공기업 체제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정해졌다.
제2차 입찰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재계의 반응이 미적지근한 것을 보고 공기업 체제로 이어가려는 거 같았다.
‘왕재구 회장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쉽군.’
산업은행 회의실의 바깥까지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질러 댔다지?
내 이름도 엄청나게 불러댔다는데,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왕재구 회장의 성격상 주먹이라도 날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저나 미래 그룹이 대한 중공업 인수에 4천억 이상 쓰려고 했다는데, 이 자금이 어디로 향할지 관심을 가져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