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독점하는 게 어때서?
“김 의원과의 만남은 어떻게 되었느냐?”
“김성철 의원도 혜성 그룹을 밀어주기로 작정한 거 같습니다.”
왕주형 명예 회장의 물음에 아들인 왕재구 회장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빌어먹을! 김 의원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받아 처먹은 게 얼마인데?”
여당 의원 대부분이 서해안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혜성 그룹을 밀어주기로 합의한 사실은 이미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 그룹과 돈독한 관계인 의원들까지 혜성 그룹의 편을 설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군산 신항을 비롯하여 장산도의 공사 수주까지 전부 혜성 건설이 따낼 거 같은데,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서해안 고속도로 건설도 혜성 건설이 전부 채갔다지?”
“예. 예정된 26건의 신규 사업 중에 거의 절반 가까이는 혜성 건설로 넘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절반이라니.
고속도로 건설의 수주 규모가 조 단위라는 것을 생각하면, 혜성 건설은 아무리 못해도 5천억 이상의 수주를 따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계 10대 기업 중에서 의외로 건설사 순위가 낮은 것이 혜성 그룹이었다.
그런데 혜성 건설에서 이렇게 매출이 터져 나온다면 미래 그룹으로선 재계 1위의 자리를 혜성 그룹에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된다.
안 그래도 매출 차이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혜성 그룹이 저리 날뛰고 있는데, 다른 재벌들은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군.”
혜성 그룹이 폭주하기 시작하자, 미래 그룹은 뒤늦게 혜성 그룹을 견제하려고 움직였다.
고고하게만 지내던 그들이 다른 재벌 총수들과 모임을 가지며 반 혜성 동맹을 결성하려고 하였는데, 이상할 정도로 반응이 약했다.
심지어 혜성 그룹이 샤롯 제과에 이어 기화 자동차까지 합병한 상황에서도 재벌 총수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주식에 눈이 멀어서 경쟁자가 커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미래 그룹은 오직 힘으로 재계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올랐다.
그런데 혜성 그룹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계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는데, 그게 바로 사모펀드였다.
혜성 그룹 회장인 한성이 직접 사모펀드를 운영하여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재벌 총수들의 투자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혜성 그룹을 적대해야 할 재벌 총수들이 오히려 혜성 그룹을 두둔하고 나서는 상황에 이르렀다.
재벌 총수들이 자신의 비자금을 키우기 위해 그룹의 손해를 무시하는 만행을 저지른 셈이었다.
“사모펀드도 그렇고, 재계의 어른인 이한철 명예 회장까지 나서서 여론을 진작시키고 있으니, 아무래도 다른 총수들의 반응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쯧!”
“차라리 언론을 동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혜성 건설의 특혜수주 의혹을 언론에 폭로하자는 것이냐?”
“이한성 회장은 어떤 재벌 총수들보다 브랜드 이미지를 중요시한다고 하니, 언론의 반응이 안 좋아지면 수주 공사 몇 건 정도는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나쁘지 않은 의견이었다.
어떤 기업보다도 많은 수주를 따낼 것으로 예상되는 혜성 건설이었다.
예전부터 김영산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으니, 특혜수주 의혹이 한번 터져 나온다면 순식간에 불거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왕주형 명예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정부와의 사이가 안 좋은데, 그런 짓을 하면 정부가 우리를 어떻게 볼 거 같으냐?”
언론을 이용하여 혜성 그룹을 공격하는 것은 좋았다.
그런데 혜성 그룹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특히 수주 관련해서는 언론을 동원하지 않는 것이 일종에 불문율이었다.
파보면 특혜수주를 받지 않는 대기업이 한 곳도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당과도 완전히 사이가 멀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혜성 건설이 서해안 개발 프로젝트의 주역이 되는 것을 지켜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왕재구 회장이 생각만 해도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대에서 재계 2위로 추락하는 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서해안 개발 프로젝트 같은 대형 국책 사업에서 미래 그룹만 소외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무엇입니까?”
“혜성 그룹과 협상을 하는 거다.”
“이한성 회장과 협상하란 말입니까?”
“적대 관계라고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사실을 내가 알려주지 않았었느냐.”
“하지만 그자와 협상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수주를 포기하게 만들려면 저희가 무언가를 주어야 할 텐데, 계열사를 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계열사는 줄 수 없지. 하지만 민영화가 예정된 공기업은 줄 수 있다.”
왕재구 회장은 눈을 크게 떴다.
곧 민영화될 공기업은 하나뿐이었다.
“대한 중공업을 혜성 그룹에 넘기자는 말씀입니까?”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이한성 그놈도 우리와 협상할 마음이 들 거다.”
대한 중공업은 중공업 시장 점유율이 무려 15%에 달하는 기업이었다.
하여 대한 중공업 민영화가 거론되었을 당시, 은성과 미래 그룹, 정우 그룹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은 전부 후보 명단에 떠올랐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후보 명단은 두 개의 기업밖에 안 남게 되었는데, 인수 조건이 날이 갈수록 까다로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기업이 바로 혜성 그룹과 미래 그룹이었다.
미래 그룹의 경우, 대한 중공업을 인수한다면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어서게 된다.
더군다나 엔진과 설비, 보일러 위주의 그룹 내 기계공업 분야에, 대형 기계설비를 추가하여 종합 플랜트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왕재구 회장은 대한 중공업을 반드시 인수할 생각이었는데, 왕주형 명예회장이 대한 중공업을 혜성 그룹에 넘기라는 말을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그러면?”
“혜성 그룹이 대한 중공업을 인수한다면 중공업 시장도 안심할 수가 없게 됩니다.”
혜성 그룹도 쌍호 중공업을 인수하여 작게나마 중공업 시장에 진출한 상태였다.
지금이야 시장 점유율이 미미하기 그지없어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지만, 혜성 엔진이 대한 중공업을 인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숨에 시장 점유율 20% 이상의 기업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중공업은 엄청난 투자가 필요한 사업이다. 하지만 혜성 그룹은 지금 자동차를 비롯하여 반도체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지. 오히려 혜성 그룹이 중공업에 돈을 쓰게 만든다면 전략적인 측면에서 나쁘지만은 않아.”
“음…….”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너는 미래 그룹의 왕이다. 왕으로서 나라를 어찌 더 키울지만 고민하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왕주형 명예회장의 지시에 왕재구 회장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왕이라 칭했지만, 사실 그는 일개 바지사장에 불과하였다.
아버지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빌어먹을. 이한성, 그놈이 중공업 시장을 먹는 것을 오히려 도와줘야 한다니.’
미래 건설을 위한 선택이라지만, 왕재구 회장으로서는 실로 불쾌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10월도 얼마 안 남았군.’
시간이 정신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특히 올해는 어느 때보다 시간이 빨리 간 것처럼 느껴졌는데, 사업뿐만이 아니라 정치까지 신경을 써서 더 그런 거 같았다.
‘앞으로는 이보다 바빠지겠지?’
지금도 바빠 죽겠는데, 이보다 더 바빠진다니.
내가 아무리 일 중독자라지만, 과연 그때도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나저나 베를린 장벽 붕괴도 얼마 남지 않았군.’
베를린 장벽 붕괴.
지구 정반대 편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나와 완전히 관계가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독일의 이웃 국가인 폴란드부터가 이미 한국과 수교하면서 혜성 그룹도 공장 진출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베를린 장벽 붕괴가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사실도 나에게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고 말이다.
“회장님, 미래 그룹의 왕재구 회장이 도착했습니다.”
혼자 상념에 빠져있는데, 이소희가 그 같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님을 환대할 준비를 하였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은 상대라지만, 먼 길을 왔는데 예의 없게 상석에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뭐, 그렇다고 크게 환대해 줄 생각도 없지만.’
미래 그룹이 한 일을 생각하면 왕재구 회장과의 만남도 썩 긍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가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었다면, 아예 접견을 거부하지 않았을까.
인제 와서 그런 거 생각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말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예.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왕재구 회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갑자기 저를 찾아온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왜 찾아왔냐는 말이었다.
그러자 왕재구 회장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말문을 열었다.
“회장님과 몇 가지 이야기 나눌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반도체 이야기를 하려고 오셨습니까?”
미래 전자도 반도체 산업에 진출한 지 오래였다.
일성 그룹처럼 시스템 반도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혜성 반도체만 하고 있던 D램 반도체도 생산하고 있었는데, 벌써 4M D램 양산에 도전 중이었다.
그야말로 국내에서는 은성 다음으로 위협이 되는 기업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닙니다. 반도체에 관해서야 서로 할 이야기가 뭐 있겠습니까?”
“시스템 반도체에 관해서는 할 이야기가 있죠.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듯, 동현 반도체에 파운드리 생산을 맡기면 적은 투자 비용으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에서도 그래서 동현 반도체에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말로는 생각해보겠다고 하는데 표정을 보면 절대 동현 반도체에 맡길 거 같지 않았다.
하긴, 동현 반도체의 대주주가 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미래 그룹으로선 절대 동현 반도체에 파운드리 생산을 맡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반도체가 아니라면 무슨 용건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
“수주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수주? 서해안 개발 프로젝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대충 눈치챘으면서 의뭉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왕재구 회장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였다.
“예. 저희가 노리는 지역마다 혜성 건설이 수주를 채가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이상하게 하십니다. 수주를 채가다니, 마치 혜성 그룹이 미래 그룹의 것을 빼앗고 있다는 식으로 들립니다?”
“아니었습니까?”
“왕재구 회장님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는 그저 유감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겠군요.”
솔직한 말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미래 그룹이라고 깨끗하게 사업해온 것도 아닌데, 저리 말하는 것은 그저 억지에 불과하였다.
내게는 패배자의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런 내 생각이 왕재구 회장에겐 그대로 전해진 것인지, 그가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하기야 말투부터가 ‘어쩌라고?’인데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할 것이다.
“저는 혜성 그룹과 사생결단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 역시 외국의 여러 기업과 경쟁하기도 바쁜 판국에 국내의 일에 지나치게 얽매일 생각이 없습니다.”
“정말 이렇게 나오실 겁니까?”
“이해가 안 가는군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서해안 개발 프로젝트의 공사를 독점하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같은 왕재구 회장의 말에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