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누구를 만났다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상장한 이후에도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며 규모를 확장해 가고 있었다.
개인용 운영 체제의 전통 강자인 디지털 리서치와의 경쟁은 사실상 승리로 끝이 난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
적어도 운영 체제 안에서는 점유율 80% 이상을 장악했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모든 상용 운영체제를 비롯하여 오피스와 비오피스 SW까지 사업을 확장해 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소프트웨어의 절대자가 되기 위해 진화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이크로소프트라고 경쟁 기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 잡스가 이렇게 무서운 상대가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마이크로소프트의 황제, 빌 게이츠는 혀를 찼다.
그에게는 디지털 리서치를 비롯하여 많은 경쟁 상대가 있었지만, 그는 그중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를 스티브 잡스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빌 게이츠는 스티브 잡스의 도전장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아무리 스티브 잡스가 하드웨어 쪽에서 명성이 높다지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
소프트웨어, 그중에서 운영 체제만 따진다면 스티브 잡스는 초짜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노벨사를 인수한 넥스트사는 승승장구하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특히 넷웨어 3가 문제야.’
얼마 전 스티브 잡스가 직접 발표한 Netware 3.0은 모든 면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MS-DOS 4.0을 압도하였다.
메모리 관리 시스템부터 크게 향상되었는데, 고위 메모리 영역과 상위 메모리 영역에 운영 체제 기능과 장치 드라이버를 할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덕에 1MB도 안 되는 기본 메모리를 더욱더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이밖에 랩톨을 위한 Battery MAX 전원 관리 시스템부터, 캐싱 소프트웨어, 원격 파일 전송 도구까지.
만약 Netware 3.0가 출시하기만 한다면 MS-DOS 4.0의 시장 점유율은 큰 폭으로 하락할 것이 분명하였다.
“넥스트에서 오피스 개발 업체인 인프라웨어를 인수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넥스트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준비하고 있는 오피스 시장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아주 돈이 넘쳐나는군.”
“아무래도 넥스트사의 투자자들이 또다시 스티브에게 투자해준 듯합니다.”
“후우. 스티브가 이렇게까지 클 줄 알았으면, 진즉에 견제할 걸 그랬어.”
오피스 시장까지 위협받다니.
실로 뼈아픈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스티브 잡스의 자금력을 생각하면, 디지털 리서치와 경쟁할 때처럼 단기간에 경쟁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서 더 문제였다.
“넥스트사의 대주주가 혜성이라고 했었지?”
“예, 그렇습니다.”
빌 게이츠는 혜성 그룹을 떠올리며 턱 끝을 쓰다듬었다.
‘자동차에 반도체까지 생산하는 기업이라.’
원래는 관심도 없었던 기업이었다.
일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만 잠시 관심을 보이고 말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빌 게이츠는 혜성이란 기업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최대 경쟁자인 스티브 잡스의 주요 투자자 중의 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1, 2위를 다툰다고 하니, 그 자금력은 엄청난 수준이겠어.’
한국이 작은 나라라고 해도 한 나라에서 1, 2위를 다툰다고 하면 무시 못 할 수준일 게 분명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혜성 그룹에서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무리 잘나간다 해도 결국 컴퓨터 기업에 을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년 출시로 예정된 윈도 3.0이 출시된다면 그때는 역으로 마이크로소프트가 갑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마이크로소프트는 혜성 그룹의 존재가 더욱더 성가시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혜성 반도체라면 컴퓨터 기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방법이 없을까?’
빌 게이츠는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혜성 그룹을 마이크로소프트의 편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혜성 그룹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면 얻는 이익은 엄청날 것이 분명하였다.
경영권에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스티브 잡스조차 혜성 그룹의 대규모 투자를 받은 상태였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혜성 그룹이 스티브 잡스의 경영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빌 게이츠라고 자금력이 넉넉하다고만 볼 수는 없었기에, 자신의 경영권을 침해하지 않는 투자자가 생긴다면 나쁠 것이 없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스티브 잡스에게 갈 자금을 마이크로소프트로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사가 위협적인 것은 스티브 잡스라는 개인의 명성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혜성 그룹에서 지원해주는 그 막대한 자금이었다.
그런데 혜성 그룹과 우호적인 관계가 돼서 그 자금 지원을 미연에 차단한다면?
앞으로의 경쟁에서 확연한 우세를 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차피 스티브 잡스라면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혜성 그룹 이외의 자금은 최대한 배제할 것이 분명할 테니 말이다.
“혜성 그룹 회장이 지금 미국에 있다고 했지?”
“예. 곧 귀국한다고 듣기는 들었는데, 아직은 캘리포니아에 남아 있을 겁니다.”
“서둘러서 연락해야겠군.”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부딪쳐볼 생각이었다.
혜성 그룹 회장 정도의 인물이라면 만나봐야 손해 될 것은 없을 테니 말이다.
* **
레오 매카시와의 인맥은 확실히 유용하였다.
노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레오 매카시를 교두보로 삼아서 여러 정치인과 인맥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미국 정치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혜성 그룹에 관심이 많은 거 같단 말이지.’
정확히는 캘리포니아 정치인들이 혜성 그룹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혜성 반도체부터가 미국에 상당한 투자를 했고, 앞으로 자동차 사업도 미국에 투자를 많이 할 거라는 추측 때문에 그러는 거 같았다.
다만 아쉽게도 노사가 이야기했던 ‘유력 정치인’과의 만남은 없었다.
대통령이 될 빌 클린턴과의 접점도 전혀 만들지 못했고 말이다.
하지만 첫 시도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민주당 정치인들과 친해졌고, 캘리포니아 정치인들이 혜성 그룹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슬슬 돌아가야겠어.’
미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데, 의외의 인물이 만남을 요청하였다.
내가 만나려고 했던 빌 클린턴과 동명이인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였다.
‘머지않아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될 인물과의 만남이라. 확실히 미국에 오길 잘한 거 같군.’
전혀 기대하지 않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스티브 잡스의 경쟁자라지만, 나까지 빌 게이츠와의 만남을 피할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혜성 그룹 회장 이한성이라고 합니다.”
“저는 마이크로소프트 CEO 빌 게이츠입니다. 빌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만남에 응하니, 다음 날 바로 나를 찾아온 빌 게이츠였다.
“여기가 HS 인베스트먼트라고 들었습니다.”
“예. 제 개인의 미국 자산을 관리하는 기업입니다.”
“혜성 그룹이 아닌, 회장님 개인의 자산이었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빌 게이츠가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HS 인베스트먼트의 자산이 상당하다고 들었는데……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세계 부호 순위에 든, 빌 앞에서 내세울 정도는 아닙니다.”
“제 자산이야, 회사에 묶여 있는 자산이고 회장님의 자산은 언제든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다.
하지만 그 회사에 묶여 있는 자산이 10조를 넘어 100조에 가까워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마 몇 년만 지나도 빌 게이츠가 동원할 수 있는 현금 자산은 지금의 나를 한참 능가해 있을 것이다.
물론 미래의 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용건을 묻자, 그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적어도 소프트웨어 시장에서는 절대적인 지위에 있다고 자부합니다. 아무리 강한 경쟁자가 등장해도,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면 높아졌지 떨어질 일은 없을 겁니다.”
“예?”
“회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마이크로소프트의 미래를?”
“저 역시 마이크로소프트의 미래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넥스트사의 기세가 매서워서 점유율이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빌 게이츠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나는 의례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미래를 높게 평가하되, 아직 절대적인 지위에 있지는 않다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답변과는 다르게, 내심 나는 빌 게이츠보다 더 마이크로소프트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노사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미래를 알게 된 나였으니까.
하지만 빌 게이츠가 의미 모를 행동을 하고 있는데, 구태여 마이크로소프트를 필요 이상으로 높게 쳐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의례적인 칭찬으로도 충분할 것이리라.
“넥스트의 기세가 무서운 것은 어디까지나 회장님의 조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조력 말씀입니까? 하지만 제가 넥스트에 해준 거라고는 자금을 지원해 준 것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만.”
“스티브에게는 자금을 지원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 아니겠습니까? 자존심이 강한 스티브의 성격상 자금을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니 말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빌 게이츠가 이렇게까지 나를 치켜세우다니.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을 유추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스티브 잡스를 계속 거론하는 것만 봐도 그는 나를 꾀어내려는 속셈이 있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빌 게이츠가 대뜸 이 같은 말을 하였다.
“회장님, 우리 마이크로소프트에 투자하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 * *
보름 만에 귀국하니 그동안 쌓인 어마어마한 양의 업무가 나를 기다렸다.
‘역시 부회장을 뽑기는 해야 할 거 같은데 말이지.’
부회장이 공석이니 나만 고생하는 거 같았다.
지금도 이런데 나중에 권오중 회장처럼 세계 경영이라도 하게 되면 얼마나 업무가 많아질지 벌써부터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미국의 인맥에 유능한 경영인 좀 소개해달라고 해야겠어.’
마침 미국에 인맥이 생긴 참이었다.
한국의 경영인을 부회장으로 임명하는 것도 좋지만, 아직 혜성 그룹 내부에는 마땅한 인재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기업에서 일했던 인물을 그룹의 부회장으로 임명하는 것도 껄끄러운 일이었고.
그러니 미국의 명성 있는 경영인을 모셔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미국 인사라면 혜성 그룹 내부에서도 큰 반발이 없을 테니 말이다.
(일 다 끝나면 아버지께 감사 인사를 전해드려라.)
그러던 중, 노사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미국에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여러 재벌을 만나고 다녔다. 너를 향한 재벌들의 적대감을 최대한 희석해 보겠다고 말이야.)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5공 때부터 그랬지만, 이한철 명예 회장의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치인들이 지금까지 혜성 그룹을 크게 건들지 않았던 것도 사실상 이한철 명예회장의 공이었단 걸 생각하면 나로선 그저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예, 직접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노사는 내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미국의 일에 관해 물었다.
내가 이것저것 설명해주자, 노사가 넥스트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넥스트의 기세가 무섭군. 새로 출시하는 넷웨어 3에 도입되는 기술은 아무리 못해도 1~2년은 앞당긴 거 같은데?)
“그렇습니까?”
(마이크로소프트로서는 골치 아플 수밖에 없겠어. 다른 기업도 아니고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사라면 순식간에 점유율이 뺏겨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니 말이야.)
“안 그래도 넥스트 때문에, 빌 게이츠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빌 게이츠가 너를 찾아왔다고?)
“예. 저에게 투자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내가 덤덤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노사가 오랜만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