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218화 (218/300)

218화 수천조짜리 기업

모처럼 미국에 왔는데 아무도 안 만나고 귀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내 사람 즉, 신은규 대표를 비롯하여 혜성 자동차의 미국 법인과 이베스 호텔 본사의 임직원들을 만났다.

혜성 자동차의 미국 법인이야 성과급으로 크게 치하해주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고충이나 애로사항을 귀담아들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고충이랄 것은 크게 없었다.

신은규 대표가 맡은 HS 인베스트먼트만 해도 애로사항이랄 게 내가 지목한 종목이 아닐 경우, 손해가 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거의 유일한 애로사항일 정도였다.

“그래도 수익률 자체는 나쁘지 않군요.”

“예. 회장님께서 찍어주신 종목이 워낙 주가 상승률이 가파르기도 했고, 엘리트 직원을 많이 영입해서 수익률이 크게 오르고 있습니다.”

HS 인베스트먼트의 자본도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

일본에서 벌어들인 자금을 일부 회수했기 때문이었는데, 내년에 있을 걸프 전쟁 때 HS 인베스트먼트의 자금으로 재미를 볼 수 있을 거 같았다.

이베스 호텔 역시도 애로사항이랄 게 크게 없었다.

후발 주자의 견제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내가 봤을 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어차피 일본 법인 한 곳만 잘 키워도 세계 최대의 비즈니스 호텔이 되는 건 문제 없겠지.’

한국에서도 유지은이 직접 대표를 도맡아서 이베스 호텔을 시작했지만,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유지은이 못미더워서 그런 게 아니라, 이미 최고의 인재가 일본 법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베스 호텔의 일본 법인은 일본 버블 경제를 타고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 기세가 3년만 이어진다면 일본 모든 도시에 이베스 호텔의 점포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리라.

“자금이 부족하면 자금을, 인력이 부족하면 인력을 지원해주겠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게 있으면 언제든 HS 인베스트먼트의 신 대표에게 전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이베스 호텔의 경영진과 상담을 한 이후에는 스티브 잡스와 퀄컴의 제이콥스 등을 만났다.

“하하, HS-88을 그런 식으로 미국에 상륙시킬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미스터 리는 정말 대단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가장 먼저 HS-88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그로선 꽤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작년에 간신히 출시하였던 HS-88을 이토록 일찍 미국에 진출시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을 테니.

“이왕 앱설루트를 홍보할 겸, 마찬가지로 홍보가 필요한 HS-88을 이용해 봤습니다.”

“그야말로 하나의 돌을 던져 두세 마리의 새를 잡은 셈이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미스터 리가 말하는 운이란 게 저로선 늘 부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넥스트 사의 성장세도 엄청나기 그지없는데, 내 앞에서는 유독 겸손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여 주는 스티브 잡스였다.

정작 업계의 최강자인 빌 게이츠를 상대로는 당당함을 넘어 오만하게 느껴지는 태도를 보여 주면서 말이다.

“스티브에게도 언젠가 휴대폰을 만들 기회가 생길 겁니다.”

“제가 휴대폰을 말입니까?”

“언젠가 애플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반쯤은 떠본 건데, 스티브 잡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의 본심을 말했다.

“허. 미스터 리는 저를 너무 잘 알아서 탈입니다. 그런데 애플로 돌아간다고 제가 휴대폰을 개발할지 어떻게 아신 겁니까?”

“스티브라면 휴대폰 사업의 미래 전망을 꿰뚫어 보고 계실 것이라 생각해서 말입니다.”

“이거 참, 미스터 리에게는 거짓말할 생각을 하면 안 될 거 같습니다!”

“저에게 거짓말할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하하, 그건 아니고 제가 휴대폰 사업을 시작하면 혜성과는 경쟁자가 되는 셈 아닙니까? 그때를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경쟁자가 될지, 아니면 주요 협력 관계가 될지, 그거는 두고 보면 알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미래에도 스티브와 좋은 관계가 될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저 역시, 머나먼 미래에 혜성과 사업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가 된다 해도, 선의의 경쟁을 펼치게끔 노력하겠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선의의 경쟁 운운하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 그만큼 나를 우호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뭐, 그래도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

애초에 나비효과를 생각하면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가 될 수 있을지도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물론 애플이 노사가 이야기한 것처럼 시가총액 수천조짜리의 거대 기업이 될지도 두고 봐야 할 것이고.

“앱설루트의 매출 성장세가 엄청난 보이더군요. 저로서는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그랬듯, 퀄컴의 제이콥스도 혜성의 성장에 감탄하기 바빴다.

“CDMA의 시대가 온다면 퀄컴도 엄청난 속도로 성장을 거듭하게 될 겁니다.”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는데, TDMA가 만만치 않아서 문제입니다.”

“TDMA의 장점은 사용자가 많다는 거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저희 혜성을 시작으로 한국은 CDMA을 선택했으니, 곧 CDMA의 시대가 올 겁니다.”

한국이 선택했다고 CDMA의 시대가 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었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으니, 자신 있게 이야기해도 됐다.

아니, 미래를 몰라도 CDMA과 TDMA 중에서 누가 이길지는 명약관화하였다.

CDMA가 활용 효율도 압도적으로 높고 보안성까지 좋았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퀄컴의 제이콥스와도 만남을 가지며 기존 인맥을 관리하였다.

물론 나는 정치 인맥 즉, 레오 매카시 부지사와의 인맥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로비 회사를 통해 그와의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다행히 레오 매카시 부지사도 내가 마음에 든 것인지 처음 만남 이후 수시로 나를 불러냈다.

한 번은 그의 가족 모임에 초대되기도 하였다.

“어서 오세요.”

“와, 기업 회장님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엄청 젊고 핸섬하시다. 그런데 영어 가능하시죠?”

레오 매카시 부지사에게 단단히 주의를 받은 건지, 그의 가족들도 나를 크게 환영해 주었다.

특히나 레오 매카시의 딸인 애리아나가 나에게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가능합니다.”

“아버지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어떤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혜성이 굉장히 큰 기업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규모가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어려울 거 같고, 여러 사업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반도체부터, 가전제품과 호텔 사업, 그리고 자동차 사업까지 말입니다.”

“우와, 정말 여러 사업을 하시네요? 마치 GE 기업을 보는 거 같아요.”

“그렇습니까?”

“자동차 사업이라면 그거죠. 앱설루트? 주변에서 그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독일 차만큼 튼튼하면서 디자인은 더 예쁘다고 말이에요.”

“예. 앱설루트 말고 일반 승용차 브랜드도 곧 출시할 예정입니다.”

“정말요?”

처음에는 핸섬하단 이야기를 해서 내 개인사에 관심을 가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애리아나는 사업에 관한 질문을 주로 던졌다.

“하하,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제 딸아이가 워낙에 돈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정확히는 사업에 관심이 많아요. 언젠가 기업을 경영해 볼 생각이거든요.”

레오 매카시의 말에 애리아나가 덧붙이듯 말했다.

“혹시 여자가 기업에 관심이 많은 게 이상하게 느껴지나요?”

“아니요. 여성이 기업을 경영한다고 이상하게 볼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제 와이프도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우와. 어떤 사업을 하는데요?”

“이베스 호텔이라고, 미국의 비즈니스 호텔 체인점이 있는데 그 기업의 한국 법인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법인 대표라니, 대단한 분이시네요!”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어지간히 기업가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왠지 지은 씨와 잘 맞을 거 같은데?’

나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니, 유지은에게 소개해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레오 매카시와의 관계도 더 끈끈해질 테니 말이다.

* * *

이한철 명예 회장은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미래 그룹의 왕주형 명예 회장처럼 상왕 노릇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달랐다.

한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채로 경영에는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경험이 없는 한성이 걱정돼서 이런저런 조언을 했었지만, 그것도 처음만 그랬을 뿐, 이후로는 은퇴 생활을 즐기기에 바빴다.

‘후우. 이것도 못 할 짓이 되어버렸군.’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은퇴 생활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혜성 그룹이 커지면 커질수록 혜성 그룹의 창업주인 이한철 명예회장에게로 사람이 모였기 때문이었다.

빅 4가 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혜성 그룹을 경영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했다.

미래 그룹을 위협하고 있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기업인은 기업인대로 그에게 달라붙었다.

거물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는 정치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출만 12조가 넘는 기업이 미래 그룹이었다.

혜성 그룹은 그런 미래 그룹을 위협하고 있으니, 정치인이고 기업인이고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때에 전경련 회장직이라. 잘된 일이라고 봐야겠지?’

전경련 회장직은 과거의 혜성 그룹이라면 꿈도 못 꿀 자리였다.

빅 4 기업이 돌아가면서 맡는 자리로 인식이 잡혔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혜성 그룹도 어느덧 빅 4가 되었고, 이제는 재계 2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멀게만 느껴졌던 전경련 회장직도 이제 손에 잡힐 위치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3월부터 그가 전경련의 차기 회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더니, 7월이 되자 그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이한철 명예 회장님께서 차기 회장이 되신다고 하니, 저로서는 정말 든든하기 그지없습니다.”

현 전경련 회장이자, 은성 그룹의 구자성 명예 회장이 그의 상념을 깨웠다.

“과연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이한성 회장처럼 겸손한 말씀을 하십니다.”

“구자성 회장님께서 저를 잘 가르쳐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혜성 그룹의 창업주이신 이한철 회장님을 가르치겠습니까.”

빅 4인 은성 그룹 창업주가 ‘감히’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까지 겸손하게 굴다니.

오래 살다 보니 정말 별의별 일을 다 겪는 거 같았다.

하지만 이한철 명예회장은 우쭐거리지 않고 되레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배울 게 많습니다. 구자성 회장님께서 꼭 좀 저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허,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이한철 명예 회장의 처신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구자성 회장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비쳤다.

구자성 회장을 제 편으로 만든 이한철 명예 회장은 그 뒤로도 바쁘게 쏘다녔다.

‘한성이가 너무 공격적으로 기업을 확장해서 그런지, 혜성을 적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전경련 회장이 되었으니, 내가 나서서 이들을 포용해야 해.’

사업에선 천재였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조금 서투른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아들이었다.

심지어 재계 모임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경이적인 주식 수익률을 기반으로 제 편을 늘려가고 있는 한성이지만, 재벌 전체의 투자를 대신해줄 것이 아닌 이상, 그런 방법도 한계는 있었다.

그렇기에 이한철 명예회장이 나서야만 했다.

범 미래 그룹이 아니더라도 혜성 그룹을 적대하는 기업들은 절대 적은 수가 아니었고, 한성이 이들을 포섭하는 것보다 혜성 그룹의 창업주이자 전경련의 회장이 될 그가 직접 나서는 게 그림이 좋았던 것이다.

‘아직도 나의 역할이 남아있다는 걸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싫증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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