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도요타가 걱정해야지
“혜성이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번에 신차 출시를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차 모델을 살 때, 중고차인 R2나 RA를 가져오면 최대 50%까지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도요타 데쓰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듣기로 앱설루트 신차 모델의 출시가는 3만 달러가 넘었다.
그런데 만약 중고차를 가져와서 할인받는다면 무려 1만 5천 달러까지 할인이 되는 셈이었다.
물론 최대 50%니, 작년에 출시된 RA를 가져와야지만 그 정도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혜성 그룹에서 중고차의 가격을 높게 인정해준다는 의미였으니, 앱설루트의 고객들은 충성 고객이 될 가능성이 컸다.
“정말 미친 짓을 했군.”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또 있어?”
“신규 고객들에 대해서도 파격적인 지원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지원인데?”
“최대 24개월 무이자 할부에, 휴대폰 등을 서비스로 준다고 합니다.”
비서의 말에 도요타 데쓰로는 입을 떡 벌렸다.
기존 고객에게만 파격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혜성은 신규 고객에게도 실로 파격적인 프로모션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까지 준다고? 이런 미친!”
휴대폰이라니?
도요타 직원들도 휴대폰을 사용하는 직원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큼 휴대폰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앱설루트의 신차 모델을 구매하면 그 비싼 휴대폰을 준다고 하니, 소비자들이 얼마나 열광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미쳤군! 혜성은 미국에서의 수익을 완전히 포기하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혜성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점이 두려웠다.
엠파이어 빌딩과 여러 부동산의 투자로 혜성 그룹 회장의 자본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도요타 데쓰로였다.
도요타 경영진은 혜성 그룹이 기화 자동차를 인수했으니 자금이 다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아무리 못해도 천억 엔 단위의 자금이 남아 있을 터.
그리고 그 정도의 자금을, 그것도 현금으로 가지고 있다면 미국에서의 수익이 그리 급하지 않았다.
수익은커녕 설령 적자가 난다 해도, 혜성 그룹이라면 몇 년 동안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앱설루트가 지금의 인지도를 몇 년 동안 유지한다니. 이보다 최악의 미래가 있을까?’
아니, 몇 년이 아닐 수도 있었다.
반도체 업계의 상황은 그 역시 듣고 있었는데, 혜성 반도체의 성장세가 일본 반도체를 위협하고 있을 정도였다.
매출만 일본 엔화로 1조 엔이 넘는다는 소문이었다.
혜성 반도체의 생산 단가는 일본과 비교해서 압도적으로 낮았기에, 영업이익도 엄청날 것이 분명했고, 여기서만 천억 엔 단위의 순이익이 났다.
그 말은 혜성 그룹의 사내 유보금은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칙쇼! 이번에도 혜성을 이길 수 없단 말인가?’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그런데 왠지, 그 마지막 기회가 실패로 끝날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브래드 존스는 여유롭게 담배를 뿜어냈다.
워낙 손님이 많아서 시간은 빈말로도 여유롭다고 할 수 없었지만, 마음만큼은 어느 때보다 여유가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은 앱설루트는 폭발적인 매출 성장세를 보이었다.
브래드 존스의 경우, 모든 모델을 재고 하나 안 남기고 팔 정도였다.
‘이대로만 간다면 매장 여러 개 두는 것도 꿈이 아니겠어.’
사실 지금도 매장을 늘리는 것은 가능하였다.
하지만 브래드 존스는 앱설루트가 아닌 다른 자동차 브랜드와의 계약을 노리고 있었다.
‘기화 자동차라고 했던가?’
그리 친숙한 이름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올해 처음 들어본 이름이라고 해도 무방할 거 같았다.
그런데도 브래드 존스는 기화 자동차와의 계약을 희망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하였다.
기화 자동차의 모회사가 앱설루트의 모회사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혜성 기업은 자본력이 넘쳐나는 회사야. 이번에 법인장이 바뀌면서 진행하는 프로모션들만 봐도 혜성 기업의 자본력이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딜러사의 지원도 빵빵했고 마케팅까지 독보적이었다.
심지어 디자인이면 디자인, 성능이면 성능,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으니 딜러사 입장에서는 최상의 프랜차이즈 기업이 아닐 수 없었다.
모회사가 같으니, 아마 기화 자동차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표정이 무슨 마약이라도 하는 거 같아?”
그때였다.
담배를 피우며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도요타와 프랜차이즈를 맺은 게일 고든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마약? 현실이 이렇게 만족스러운데 내가 마약을 할 리가 없잖아?”
“하. 조금 매출이 잘 나온다고 아주 우쭐거리는군.”
“적어도 네가 팔고 있는 렉서스인지 뭔지보단 매출이 잘 나오고 있지.”
재작년까지만 해도 게일 고든이 시비를 걸었을 때, 제대로 반격하지 못했던 브래드 존스였다.
어찌 보면 동업자였지만, 워낙 규모나 매출의 차이가 크니 게일 고든이 시비를 걸어도 그저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게일 고든이 작년에 설립한 렉서스 딜러사는 사실상 망한 거나 다름없는 상태.
반면에 앱설루트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잘 나가고 있었다.
올해에는 매출 성장세가 꺾이기는커녕 더더욱 올라가고 있었고 말이다.
이러니 브래드 존스는 게일 고든에게 당당한 태도로 맞설 수 있었다.
“그래 봐야 3년 갈까?”
“글쎄? 지금 앱설루트가 하는 것을 보면 3년이 아니라 30년도 갈 거 같은데?”
“렉서스가 신차 모델을 출시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30년이나 갈 거라고 예상하다니. 감이 죽어도 한참 죽은 모양이야.”
“작년에 그리 망했으면서 아직도 도요타를 기대하나 보네?”
“앱설루트가 아무리 잘 나가봐야 도요타의 발끝에도 못 미쳐. 도요타가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앱설루트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니, 미리 대비하는 게 좋을걸?”
브래드 존스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렉서스가 처참하게 망했는데도 아직 기가 죽지 않는 게일 고든의 모습이 그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네가 경고를 해주니, 나 역시 경고를 해줄게. 앱설루트 모회사가 코리아의 승용차 기업을 인수한 거 알지? 기화 자동차란 곳인데, 그곳도 곧 미국에 진출하거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렉서스가 아니라, 도요타도 이제 안심할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야. 기화 자동차와 도요타는 컨셉이 완전히 겹칠 테니까. 마치 렉서스와 앱설루트가 컨셉이 겹쳤던 것처럼.”
그 같은 브래드 존스의 말에 게일 고든이 헛웃음을 흘렸다.
“운 좋게 앱설루트를 성공시켰다고 승용차 부문에서까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앱설루트의 성공은 절대 운이 아니야. 광고부터가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았잖아?”
“…….”
“아니면 지난번처럼 또 내기라도 해볼까?”
브래드 존스는 도발적으로 물었다.
앱설루트가 히트하기 전, 게일 고든이 그에게 했던 도발을 똑같이 갚아준 것이었다.
‘그때도 이겼듯, 이번에도 이길 것이다.’
내기 조건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게일 고든이 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화 자동차의 저력을 낮게 평가하고 있다면 내기의 승자는 브래드 존스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게일 고든은 내기를 거절하였다.
“유치하게 내기는 뭔 내기야! 듣도 보도 못한 자동차 브랜드 따위,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니, 망하든 말든 네 알아서 해.”
혹시라도 추가 도발을 할까 두려워서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게일 고든의 뒷모습을 보며 브래드 존스는 크게 웃었다.
‘기화 자동차를 무시하는 척했지만, 저놈도 결국 기화 자동차의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는 모양이군.’
역시 기화 자동차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은 게 정답인 거 같았다.
혜성이란 기업을 극도로 싫어하던 게일 고든조차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 * *
1989년 7월.
나는 미국으로 가 혜성 자동차 현지 법인을 크게 치하하였다.
“여러분께 정말 감탄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내 말에 임직원들은 자부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앱설루트 기세를 보면 그들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해 보였다.
“길게 연설을 해봤자, 좋을 게 없겠죠? 말로 하는 치하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하하하!”
임직원들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이다음 순서가 무엇인지 그들도 알기 때문이었다.
“호명하는 순서대로 앞으로 나와서 제가 주는 봉투를 가져가시면 되겠습니다.”
성과급.
보통 연말 성과급이라 하여 계열사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지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처럼 특출 난 성과를 보일 경우, 내가 직접 성과급을 지급하고는 했다.
물론 임직원의 수가 만 명 단위인 혜성 자동차에서 말단 직원까지 내가 다 지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혜성 자동차의 미국 법인은 근무자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내가 일일이 지급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정현우 차장,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차장급까지 성과급 지급이 완료되자 이어서 임원들과 악수를 하며 성과급을 지급해 주었다.
직원들과 달리 임원들은 조금 더 여유로운 태도로 내 악수를 받았다.
물론 그들 역시 회장님께 충성하겠다느니, 회사에 목숨을 바치겠다느니 낯뜨거워지는 말들을 잘도 해댔지만 말이다.
“김건휘 법인장님.”
“예, 회장님!”
“정말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회장님께서 과감하고 신속하게 지원해주신 덕입니다.”
“이번 달 8천 대에, 다음 달 1만 대도 가능하다고 하셨죠?”
“어디까지나 예측에 불과하기는 하나, 소비자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월 1만 대 판매도 이제는 가능할 거 같습니다.”
단일 모델이 아닌, 혜성 자동차의 모든 모델의 총판매로 1만 대라 하나 이것만으로도 실로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판매하는 혜성 자동차의 모델들은 하나같이 고가의 차량이었으니 말이다.
“잘하면 올해 5조 이상의 매출도 가능하겠습니다.”
“아쉽게도 영업이익은 작년과 비슷한 수준일 겁니다.”
뭐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비자와 딜러사에 수익을 나눠준 만큼, 우리의 순수익은 줄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순수익은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지.’
뭐가 됐건, 지금으로선 매출이 늘어나고 인지도가 높아지면 좋은 일이었다.
앱설루트라는 브랜드가 미국 프리미엄 시장에 확실하게 뿌리내릴 수 있다면 적자까지 감수할 생각이었으니.
“법인장님의 활약을 보니 어쩌면 3년이란 시간까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말에 김건휘 전무는 크게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기화 자동차 역시도 회장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준비는 다 되신 겁니까?”
“물론입니다.”
“딜러사들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화 자동차가 혜성 그룹의 소유라는 사실이 알려져서인지, 딜러사들은 우리와 계약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절로 흡족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역시나 앱설루트를 통해 인지도를 얻으니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앱설루트 덕에 HS-88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생기기도 했고 말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나는 김건휘 전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김건휘 전무가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공손히 나의 손을 붙잡았다.
‘도요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아니, 우리가 도요타를 걱정할 게 아니라, 도요타가 우리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독일의 자동차 브랜드들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