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내가 섭섭하게 한 게 있었던가
“갑자기 우리 그룹 이야기는 왜 꺼내는 겁니까?”
“아, 왕 회장님 거기 계셨습니까?”
“지금 했던 말 다시 해보세요. 미래 그룹이 노동자를 어떻게 대했다고요?”
왕재구 회장이 노한 기색으로 따지듯 말하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가 못할 말한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심각하게 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왕 회장, 진정하게. 이 회장의 말대로 그리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뭘 그리 흥분하고 그래?”
권오중 회장이 나서자, 도리어 인상을 찡그리는 왕재구 회장이었다.
“권 회장님도 너무하십니다.”
“너무하긴 뭘 너무해?”
“혜성 자동차가 시장의 룰을 어기며 막 나가고 있는데, 같은 자동차 기업끼리 힘을 합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갑자기 화살이 자신 쪽으로 날아오자 이번에는 권오중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한테야 농담도 잘하고 친근하게 구는 권오중 회장이었지만, 그의 성격은 사실 드센 편이었다.
상대가 미래 그룹 회장이라 해도 기죽을 성격은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친구, 이상한 소리를 하네? 내가 미래 자동차랑 왜 힘을 합쳐? 미래 자동차나 혜성 자동차나 나에게는 똑같은 경쟁 기업인데 말이야.”
“시장의 룰을 어기면서 사업을 확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네가 말하는 시장의 룰이 뭐야? 내가 모르는 룰이 언제 또 생긴 건데?”
“암묵적인 룰이라는 게 존재했지 않습니까. 혜성처럼 돈을 막 써가며 회사를 인수해대면, 시장 전체에 악영향이 미칠 겁니다.”
왕재구 회장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언제 저리 자동차 시장을 걱정했는지 모르겠다.
“시장 운운하지 말게. 자네는 그냥 기화 자동차를 뺏겨서 빈정상한 거뿐이잖아?”
“제가 설마 빈정상한다는 이유로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혜성이 기화를 인수한 게 그리도 마음에 안 들었다면, 나에게 컨소시엄이라도 하자고 제안했어야지. 정작 본인도 기화를 인수하려고 했으면서 왜 뒤늦게 따지는지 모르겠어.”
“…….”
권오중 회장의 따끔한 지적에 왕재구 회장은 순간 말문을 잃었다.
아마 정곡을 찔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순서의 차이는 있어도, 기화 자동차를 노린 것은 미래 자동차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저는 권 회장님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결국에 혜성 그룹이 시장 전체를 잠식하려 들 텐데, 왜 그렇게까지 혜성 그룹을 두둔하는 겁니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신경 쓰지 말게.”
“권 회장님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만을 바라겠습니다.”
저주하듯 말하고는 이내 휙 하고 몸을 돌리는 왕재구 회장이었다.
“왕재구 회장이 자네를 많이 미워하기는 하는 모양이야. 이런 자리에서까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이런 자리니 더더욱 저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주변을 돌아보니 여기저기서 나를 힐끔 보며 웅성거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미래 그룹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재벌 총수들로선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번 일로 재계가 두 개의 파벌로 나눠질 수도 있겠어.’
혜성과 미래.
앞으로는 재계가 이 두 개의 파벌로 양분되지 않을까 싶었다.
‘뭐, 설령 그렇게 된다 한들 나쁠 것은 없지.’
결국 혜성은 하나의 파벌에서 핵심이 된다는 뜻이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강해지는 셈이니, 나쁘게 볼 일은 아니었다.
* * *
권오중 회장과는 그 뒤로도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기화 자동차 일 말고도 이것저것 이야기할 게 많았던 것이다.
소련에서의 사업을 비롯하여 앞으로의 자동차 시장 전망과 휴대폰을 비롯한 전자 산업의 전망 등등.
주가 시장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밖에 사적인 대화도 나누었는데, 유지은과 관련한 질문도 하였다.
“뜬금없이 이베스 호텔의 대표가 되었다고 해서 놀랐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이베스 호텔에서 제 안사람의 능력을 좋게 본 모양인지, 한국 법인의 대표로 기용하였습니다.”
유지은이 이베스 호텔의 한국 법인 대표가 된 것은 재계에서도 큰 화제였다.
아니, 재계뿐만이 아니라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있었는데, 한국 여성이 외국계 회사의 임원이 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뿐인가?”
“글쎄요.”
“역시 뭔가 있는 것이로군. 뭐 더 묻지는 않겠네. 어차피 지분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자네의 인맥과 관련되어있는 것일 테니.”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아마 그가 생각하는 지분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무려 경영권 지분을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구태여 그 사실을 자랑할 필요는 없었기에 어깨만 으쓱거리고 말았다.
“권 회장님. 아직도 여기 계십니까? 너무 혼자서만 이 회장님을 독점하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구혁재 회장이 다가와 그 같은 말을 하자,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긴 날인 듯싶었다.
빅 4의 회장들을 전부 만나는 것을 보면.
하긴, 청와대 만찬회 날이니 평범한 날이 아닌 것은 분명하였다.
“평소에 자주 보지 그랬나? 나처럼 해외를 쏘다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 회장님이 워낙 바쁘신 분이라, 용건이 없을 때 찾아가는 것은 죄송스러워서 그랬습니다. 죄송스러워서.”
“자네는 눈치를 너무 많이 봐서 문제야. 은성 그룹이라는 대기업을 경영하면서 뭘 그리 소심하게 굴고 그래?”
“하하, 회장직을 단지 얼마 안 된 신참이지 않습니까. 눈치를 보는 것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넉살스럽게 구는 구혁재 회장이 싫지만은 않은지, 권오중 회장이 친근하게 어깨를 두드리고는 자리를 비워주었다.
“권 회장이 사람 많은 곳으로 가는 걸 보니 괜히 불안하군요.”
“어떤 점이 불안하십니까?”
“제 뒷담화를 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내 말에 구혁재 회장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권 회장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웬만한 내용들은 지금쯤 다 퍼지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내용들은 쏙 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하,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용건이 있으시다고?”
“예, 사실 저보다는 저희 부친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 이 회장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부친이라.
구자성 명예회장이 시킬 일이라면 왠지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전경련 회장직의 거취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구혁재 회장이 내가 생각한 그대로를 이야기하였다.
“부친께서 곧 은퇴하실 예정입니다. 은성 그룹에서도, 전경련에서도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은성 그룹이야 이미 제가 회장이 되었으니 그리 걱정하지는 않으십니다만, 전경련의 차기 회장 자리를 두고 크게 우려하고 계십니다.”
“혜성 쪽에서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달라는 말씀입니까?”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구혁재 회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전경련 회원들 대부분이 이한철 명예회장께서 전경련 회장으로 부임하는 것에 찬성하였습니다.”
“대부분이라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범 미래 그룹으로 분류되는 기업들을 제외한 전부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역시나 왕재구 회장은 혜성에서 전경련 회장직을 맡는 것에 반대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전경련 회장이 아무리 엄청난 권력을 가진 자리는 아니라 해도, 재계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이니 왕재구 회장으로선 반대하는 게 당연하였다.
‘전경련 회장이라.’
혜성의 영향력이 더 강해지는 셈이니,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김영산 대통령이 재벌 개혁 중단 의지를 보일 때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구혁재 회장의 생각이 궁금하였다.
구태여 지금 시점에 나에게 전경련 회장직을 넘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그리도 미루다가, 정권과 화해 무드가 조성되는 지금 시점에 전경련 회장직을 맡으면 괜히 욕먹을까 두렵습니다.”
“하하, 누가 혜성 그룹을 욕할 수 있단 말입니까?”
“뒤에서 욕하는 거야 누구든 못하겠습니까? 물론, 왕재구 회장이야 대놓고 욕하겠지만 말입니다.”
내 말에 구혁재 회장은 쓴웃음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오히려 지금 시점이기에 더더욱 혜성에서 재계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묻자, 그가 주변을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정부와의 평화 관계를 계속 이어가려면 혜성의 힘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제 영향력을 너무 크게 보시는 거 같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정부와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확실히, 김영산 대통령이 나를 총애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근데 오늘은 왜 아무 접촉이 없으시지?’
김영산 대통령을 생각하니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만찬회라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당연히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줄 알았는데, 다른 재벌 총수들 하고만 대화를 나누고 내 근처에는 다가오지도 않고 있었다.
‘조금 신경 쓰이는군.’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구혁재 회장과의 대화에 집중하였다.
어차피 만찬회가 끝나기 전에는 한 번 만날 테니,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제 부친께 구 회장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씀은?”
“부친께서 전경련 회장직을 원하신다면, 저도 반대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오오, 정말입니까?”
구혁재 회장은 내 대답이 기꺼웠던 모양이다.
활짝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재벌 총수들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탐내는 게 전경련 회장 자리인데, 은성 그룹은 왜 이리도 전경련 회장 자리를 부담스럽게 여기는지 모르겠네.’
뭐 그룹마다 성향이란 게 있으니,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은성 그룹은 5공의 특혜도 받은 적이 없는데, 전경련 회장이란 이유로 정부와 마찰을 빚었으니 더더욱 전경련 회장직을 부담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디 아버지께서 전경련 회장으로 부임하시는 동안은 정부와 마찰을 빚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 * *
이번 청와대 만찬회는 여러모로 얻은 게 많았다.
전경련 회장 자리부터, 정부와 재계의 우호적인 관계 조성까지.
물론 왕재구 회장에게 한 방 먹여준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크게 얻었다고 생각한 것은 다름 아닌, 인맥이었다.
기화 자동차를 인수한 일로 그동안 다른 재벌 총수들과 관계가 조금 소원해졌었는데, 이번 만찬회를 통해 다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양희수 회장님의 공이 컸지.’
혜성에 가려졌지만, 사실 세계 그룹도 작년부터 몇 차례 기업 인수를 진행하였다.
내게 받은 자금으로 사업 확장을 꾀한 것인데, 이 같은 세계 그룹의 사업 확장은 재계의 주목을 받는 중이었다.
5공의 견제를 받은 이후, 줄곧 재계 10위권에 머물던 세계 그룹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난 자금으로 줄줄이 기업을 인수하며 순식간에 재계 순위 8위가 되니, 재계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양희수 회장은 이번 만찬회에서 자신이 가진 자금력의 원천을 공개하였다.
내가 투자를 대신해준 덕에 큰 수익을 보았다고 말이다.
‘양희수 회장의 말을 들은 재벌 총수들이, 무슨 교주를 영접한 광신도 마냥 헐레벌떡 뛰어왔었지.’
심지어 기화 그룹의 김수호 회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게 돈을 맡기면 최소 10배는 불어난다고 생각하면 제아무리 나를 안 좋게 보던 사람도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김영산 대통령은 끝까지 말을 걸지 않았군. 내가 대통령에게 섭섭하게 한 것이 있었던가?’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지금 시점에 대통령과 사이가 틀어지면 좋을 게 없었다.
적어도 1, 2년 정도는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그룹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르릉!
그때였다.
갑자기 내 직통 전화기로 통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이한성 회장님, 저 김영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