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미래 그룹처럼 하지만 않으면 돼
“이제 슬슬 분위기를 풀어주는 게 좋겠지?”
김영산 대통령이 갑자기 혼잣말하듯, 그 같이 중얼거리자 고영태 비서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위기라면 어떤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재벌들 말이야. 지금까지 너무 억압하는 분위기였잖아?”
“아, 그거라면 저도 찬성입니다. 경기도 심상치 않아서 지금 재벌들을 더 압박해봐야 민심만 안 좋아질 뿐입니다.”
안 그래도 지지율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금융실명제를 비롯하여 비업무용 부동산 억제 정책과 5공 부역자 처리 문제, 상속세 문제 등등.
재벌 개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니, 이제는 화해 무드로 전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후우, 아쉽군. 지지율만 유지가 되었으면, 대기업에 집중된 경제력을 조금 더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을 텐데 말이야.”
김영산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력이 너무 대기업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였다.
과거에야 빠른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지만, 어느덧 90년대도 코앞이었다.
이제는 대기업 말고도 중소, 중견 기업을 키워야 할 시점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김영산 대통령이 아무리 재벌 개혁 의지가 강하다 하더라도 그 역시 한 명의 정치인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정치인은 민심에 크게 영향을 받는 존재이니, 대기업을 지나치게 공격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대기업의 광고를 받는 언론부터가 거세게 반응할 것이니 말이다.
“지금까지 하신 것만으로도 개혁의 길은 열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기회가 생길 겁니다.”
“과연 그런 기회가 생길지 모르겠어. 5년이란 시간이 이토록 짧게 느껴질 줄이야.”
한숨을 내쉬는 김영산 대통령을 보며 고영태 비서실장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생각해도 5년이란 시간은 지독하리만치 짧게 느껴졌다.
독재자들이 왜 무리하게 헌법을 고쳐가면서까지 집권 기간을 연장하려고 하는지를 지금이라면 공감할 수 있었다.
‘정권이 연장한다 해도 과연 차기 대통령이 김영산 대통령만큼 재벌 개혁을 이룰지 모르겠군.’
고영태 비서실장은 지지율 때문에 재벌 개혁 중단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내심 재벌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호황기를 거치면서 대기업의 힘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혜성 그룹의 성장은 무서울 정도야.’
재계 1위를 코앞에 둔 혜성 그룹이었다.
미래 그룹도 매출이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는데도 혜성 그룹은 재계 1위가 되어가고 있었다.
기화 자동차를 인수함으로써 사실상 매출 10조를 찍은 상태.
내년에는 15조 가까이도 예상한다고들 하니, 혜성 기업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님, 혜성 그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혜성 그룹에 관한 생각을 하던 고영태 비서실장은 김영산 대통령에게 그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혜성 그룹에 대해서는 왜 묻나? 기화 자동차를 인수한 일 때문에 그러는 건가?”
“그것도 있고, 요즘 들어 혜성 그룹이 폭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고영태 비서실장으로선 샤롯 제과를 인수하는 것도 내심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샤롯 제과에 그치지 않고 기화 자동차까지 인수했으니, 혜성 그룹이 폭주한다는 인상이 점점 강해졌다.
‘무엇보다 이한성 회장은 차기 대권 주자들과 벌써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김태중 국무총리와 킹 메이커로 유명한 이종석 의원.
이 두 사람이 여당의 유력 후보였다.
아직 선거까지 3년 넘게 남았지만, 김영산 정권이 실정을 저지르지 않는 한,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대권을 잇게 될 터.
혜성 그룹은 현재의 정권에 이어 차기 정권의 총애까지 받는 셈이었다.
고영태 비서실장으로선 여러모로 거슬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폭주라고 할 게 뭐가 있어? 은행에 돈도 빌리지 않고 합법적인 자금으로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인수했는데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았다는 부분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음.”
“대통령께서는 혜성 그룹의 자금력 아니, 이한성 회장 개인의 자금력이 어느 정도라고 예상하십니까?”
“작년부터 올해까지 여러 회사를 인수했으니, 이제 자금력을 다 쓰지 않았겠는가?”
“그렇진 않을 겁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한성 회장의 개인 자금은 여전히 천억 단위일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야, 이한성 회장은 투자의 귀재이지 않습니까? 자기 사업보다 투자로 얻는 수익이 훨씬 더 큰데, 구태여 비자금 전체를 기업 인수하는 것에 사용했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런 추측이 아니더라도 청와대 비서실장쯤 되면 이런저런 정보가 전해졌다.
가령 한성이 일본에서 어떤 빌딩을 일본 돈으로 수천억 엔에 매각했다는 그런 정보들 말이다.
고영태 비서실장은 이 같은 정보의 신뢰도에 의문을 품고 있기는 했으나, 한성의 자금력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 주식 투자와 부동산 투자로 그만한 돈을 벌었으니, 투자에 쓸 돈은 남겨두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어.”
김영산 대통령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어, 이한성 회장의 자금은 도대체 얼마였던 것인지 가늠도 안 잡히는군.”
“어쩌면 1조가 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1조라고? 그 정도면 5공의 비자금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을 텐데?”
“몇 년 전에도 이한성 회장의 투자 실력 때문에 온 나라가 화제였지 않습니까? 수십억으로 수백억을 벌었을 때 말입니다.”
“그럼 이한성 회장은 그때 벌어들인 수백억의 돈을 1조까지 늘렸다는 건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물론 이 중 일부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받은 돈이니 대략 7,000억 정도를 벌었다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이는 말이었기에 김영산 대통령도 더는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어차피 혜성 그룹의 자금력이 넘쳐난다는 사실은 이전부터도 알고 있던 사실인데 말이야.”
“대통령님께서 여전히 혜성 그룹에 우호적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나야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네. 혜성 그룹이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사업하는 한, 대통령으로서 혜성 그룹을 지지해줄 것이야.”
김영산 대통령이 생각하기에 재벌 중에서 그나마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업이 혜성 그룹이었다.
그렇다 보니 사적인 감정을 제하더라도 혜성 그룹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님. 이한성 회장이 보유한 천문학적인 자금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정성을 헤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경쟁 기업조차 돈으로 인수하여 독점 구조로 만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자동차 사업만 해도 순식간에 업계 1위로 치고 올라왔습니다.”
김영산 대통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영태 비서실장의 우려는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기화 그룹의 김수호 회장이나, 샤롯 그룹의 신진호 회장은 예외일 수 있지만, 지금까지 혜성 그룹이 인수했던 기업의 총수들은 오히려 혜성 그룹의 인수를 반겼었다.
지분 가치를 시중 가격보다 상당히 높게 쳐서 회사를 인수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빚더미에 앉았던 해운 기업의 사장들은 모든 빚을 청산하고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처럼 압도적인 자본력은 경쟁 기업조차 경쟁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은가? 합법적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강제로 뺏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적어도 견제는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한성 회장이 지금처럼 대통령님의 총애만 믿고 계속 폭주한다면, 이 나라는 혜성 그룹만을 위한 혜성 공화국이 될 겁니다.”
“혜성 공화국이라.”
김영산 대통령은 턱 끝을 쓰다듬었다.
과한 우려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점점 강해지는 혜성 그룹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마냥 터무니없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른 재벌들도 조금씩 압박을 풀어주려는 상황에서 혜성 그룹만 따로 견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차라리 이건 어떤가? 이한성 회장의 넘쳐나는 자금력이 걱정이라면 그 자금력을 국익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쓰게 만드는 걸세.”
“국익 말씀입니까?”
“이를테면 방위 산업이라던가, 아니면 자본 투자가 많이 필요한 산업을 추진하게 만드는 거지.”
그 말에 고영태 비서실장은 탄성을 질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의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이번 만찬회 때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겠어.”
* * *
3월 26일.
오랜만에 청와대 주최로 조촐한 만찬회가 열렸다.
“기업을 경영하는데,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요즘 많이 힘드시죠? 앞으로는 괜찮아질 겁니다.”
김영산 대통령은 만찬회 참석자들에게 시종일관 따뜻한 태도로 대하였다.
작년 만찬회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슬슬 재계와 화해 무드로 전환하려는 모양이군.’
재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분위기가 상당히 괜찮았다.
“오늘은 또 무엇을 요구할지 걱정했는데, 별일 없는 거 같습니다.”
“말 그대로 친선 도모를 위한 자리인 듯싶은데요?”
“하하, 조금 안심해도 되겠습니다.”
내가 재벌 총수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잠시 멍하니 있을 때, 권오중 회장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다가오는 권오중 회장을 향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권오중 회장은 마치 싸움이라도 거는 것처럼 퉁명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이 회장. 너무 비겁한 거 아닌가? 내가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기화 자동차를 냉큼 인수하다니 말이야.”
그의 말에 주변에서는 긴장한 기색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평소 사이가 좋다고 알려진 두 기업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은 채, 피식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게 누가 해외에 그리 오래 나가 있으라 했습니까? 너무 외국만 좋아하시니,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마디도 지는 게 없어.”
“나이도 밀리는데 기세에서 밀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하! 자네가 그래도 나이를 생각하기는 했나 보군!”
우리가 그 같은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들자 재벌 총수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싸움이라도 날 거 같은 분위기였다가 갑자기 화기애애해졌으니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도 참 권오중 회장과 친해지긴 한 거 같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IMF 직후에 정우 그룹의 계열사를 집어삼키려면 지나치게 정을 둬봤자 좋을 게 없을 텐데 말이다.
‘뭐 사실 이제는 정우 그룹을 탐낼 단계를 넘어선 거 같기도 해.’
그냥 권오중 회장을 도와줘서 부도만 면하게 해줄까 고민되었다.
물론, 그때 가서 권오중 회장이 내 조언에 얼마나 귀 기울여 듣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노조는 어떻게 처리한 건가?”
권오중 회장이 불쑥 그 같은 질문을 던졌다.
“노조를 처리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기화 자동차 말일세. 요즘 조용하지 않은가.”
“저는 딱히 한 게 없습니다. 그저 업계 최고의 대우만 약속했을 뿐입니다.”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말게. 자네가 기화를 인수하고 한 달도 안 돼서 노조가 조용해졌어. 그런데도 자네가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기화나 미래에 가려져서 그렇지, 정우 자동차도 노동자 문제가 아예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노동자 문제가 자동차 사업의 고질적인 문제라는 것처럼 정우 자동차에서도 파업과 시위가 자주 일어났던 것이다.
“미래 그룹처럼 노동자의 목소리를 무시하지만, 않는다면 노조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시위나 파업이 아닌, 경영진과의 대화와 합의이니 말입니다.”
어느샌가 내 근처로 다가온 미래 그룹의 왕재구 회장이 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