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투자천재-210화 (210/300)

210화 한국 법인을 맡아 줘

‘일찍도 오셨군.’

공항에 도착했다고 연락받은 지가 겨우 세 시간도 안 됐다.

호텔에서 쉬고 올 법도 한데, 바로 나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시는데 불편한 것은 없었습니까?”

양준현이 옆에서 통역해주니, 손정의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이한성 회장님을 뵐 생각에, 기분 좋게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소식은 들었습니다.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셨다면서요?”

확실히 기화 자동차가 큰 기업이긴 한가 보다.

샤롯 제과나 노키아 같은 기업을 인수할 때는 심심한 반응뿐이었는데, 외국인인 손정의까지 반응하는 것을 보면.

“예. 자금이 생긴 김에, 자동차 사업의 확장을 꾀하고자 기화 자동차를 인수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기화 자동차라면 일본에서도 인지도가 있는 기업인데, 이렇게 단숨에 인수하시다니.”

“그러는 손정의 회장님도 그룹의 규모를 크게 키우셨지 않습니까?”

“혜성 그룹과 비교하면 어디 자랑하기도 무안할 정도입니다.”

“지금이야 규모 면에서 조금 차이가 있어도 몇 년 뒤에는 소프트뱅크도 남부럽지 않은 규모의 기업이 될 겁니다.”

미래를 아는 나였으니, 빈말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만 지나도 시가총액 200조가 될 기업이 바로 소프트뱅크였다.

‘어쩌면 그때는 시가총액만큼은 우리 그룹을 능가할 수도 있겠지.’

나야 당연히 혜성 그룹이 200조를 넘어 그 이상의 기업이 될 거라고 확신하였다.

하지만 한국 기업은 세계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저평가를 당하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1999년이면 IMF 직후일 테니, 더더욱 저평가를 당할 터.

소프트뱅크가 혜성 그룹 전체의 시가총액을 능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겠군. 우리 기업에서도 이제 대대적으로 IT에 투자할 것이니 말이야.’

IT 버블로 시가총액 200조를 찍는 소프트뱅크였다.

나도 IT 투자는 소프트뱅크 이상으로 할 것이니, 어쩌면 200조를 넘어 300조 아니, 그 이상의 기업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IT 버블 때 잠깐 수백 조짜리 회사가 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로선 그저 감사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여전히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손정의를 보며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소프트뱅크에서 유통하고 있는 HS-88의 전망에 관해 물었다.

“HS-88의 매출이 조금씩 성장세를 보인다 들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거 같으십니까?”

“일단 결과만 말씀드리자면, 저는 HS-88의 성공을 반쯤 확신하고 있습니다.”

“전망이 좋은가 봅니다.”

“인지도야 모토로라가 압도적이긴 합니다. 40대 이상은 전부 모토로라를 선택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40대 이상이 전부 모토로라를 선택한다니.

만약에 한국에서도 그랬다면, HS-88은 사실상 실패했다고 봐야 했다.

한국에서 경제력을 가진 인구는 40대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그야말로 돈이 넘쳐나는 일본이었기에 20대, 30대들도 만만치 않은 자본력을 갖추고 있었다.

20대와 30대의 선택만 받는다면 어느 정도 성과를 보기엔 충분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손정의가 마침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꺼냈다.

“HS-88의 디자인이 워낙에 잘 뽑혀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은 모토로라의 제품보단 혜성 제품을 더 선호합니다.”

“그러면 매출을 기대해 봐도 좋겠군요.”

“물론입니다. 휴대폰 자체가 유행을 타기 시작해서 앞으로의 매출은 기대해도 결코 손해는 아닐 겁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일본에서의 사업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소프트뱅크가 나서서 그런지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오고 있었다.

‘뭐 그래봤자 매출로 따지면 몇백억 수준이겠지만 말이야.’

적자를 간신히 면하는 수준.

하지만 첫 발걸음을 뗐다는 사실이 중요하였다.

비록 일본에서의 사업을 크게 확장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일본 시장을 무시할 생각도 없었다.

휴대폰처럼 가능성이 엿보이는 사업이라면 얼마든지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역시 손정의 회장님을 믿길 잘한 거 같습니다. 일본에서의 휴대폰 사업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런 성과를 보이시다니 말입니다.”

“제품이 워낙에 좋아서 그렇지, 대단한 것도 없습니다. 하하하.”

“앞으로도 손정의 회장님과 함께 일할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손정의는 의례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기분 좋게 웃고 넘겼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늦어도 내후년부터는 일본 기업들에 투자해야겠지.’

게임 회사들을 비롯하여 일본의 각종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투자할 생각이었다.

성공이 정해져 있는 기업들을 알고 있는데 굳이 투자를 안 할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내후년부터는 경기가 하락함에 따라 기업들의 가치도 크게 낮아질 것이기도 했고.

‘일본에서 2조를 벌었으니, 얼마 정도는 써주는 게 예의야.’

물론 내가 돈을 써준다고 일본이 고마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엔 더 많은 부를 내가 가져갈 테니까.

‘그나저나 한국의 IT 산업도 크게 키우고 싶은데, 저작권 의식 때문에 언제쯤 가능할지 모르겠군.’

나는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 * *

“태한이는 유치원에서 어떻게, 잘 지낸답니까?”

식탁에 마주 앉은 유지은에게 그리 묻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무 잘 지내서 탈이에요. 벌써 여자친구만 다섯 명도 넘게 사귀었다네요.”

“여자친구를요?”

“태한이는 이상하게 동성 친구와는 별로 안 친하고 이성 친구와만 사이좋게 지낸다고 해요.”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태한이 그 녀석이 남자답게 잘생겼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냥 아이의 아버지라 그렇게 보인다고 가볍게 넘겼었다.

그런데 이성에게 인기가 많은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잘생겼다고 느낀 게 착각은 아니었던 듯싶다.

‘뭐, 지금 나이에 인기 많은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이제 겨우 3살의 아이였다.

태한이의 친구들도 이성적으로 잘생겼다고 생각해서 태한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은 아닐 거다.

그저 마음이 잘 맞으니 친하게 지내는 거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지은이 이번에는 태한이의 총명함을 칭찬하였다.

“태한이가 영어도 엄청 잘하더라고요.”

“그렇습니까?”

“국민학교 고학년들보다 더 잘한다고 하는데, 제가 테스트를 해보니까, 정말 1, 2년만 더 배우면 영어로도 회화가 가능할 거 같아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랐다.

어린이집 선생들이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해봐야 얼마나 잘할까 싶었는데, 영어 회화가 곧 가능할 거 같다는 말을 들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태한이의 미래가 기대되는군요.”

“저는 조금 걱정이에요. 동성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야 할 텐데.”

“우연히 친구가 된 이들이 이성 친구인 거지, 이성 친구만 가려서 사귄 것은 아닐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까요?”

“그런데 요즘 회사 생활은 어떻습니까?”

태한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그녀도 다시 혜성 호텔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종종 얼굴을 봤는데, 정작 회사에서의 생활이 어떤지는 알지 못하였다.

아내라는 이유로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질문을 하기가 뭐했기 때문이었다.

“외부 손님들이 지나치게 많이 찾아와서 곤란을 겪고 있어요.”

“외부 손님들이요?”

“한성 씨가 저에게 주식을 가르쳐줬잖아요? 한성 씨 덕분에 투자에서 상당한 수익을 보았는데, 어디서 소문이라도 난 모양이에요. 그 소문을 듣고 저에게 투자 조언을 받으려고 찾아오고 있어요.”

유지은이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픽 웃었다.

“지은 씨가 투자한 증권주가 10배 가까이 올랐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겠죠.”

“저는 그저 한성 씨가 투자하라고 한 것만 투자했을 뿐인데, 참…….”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그녀였지만, 3년 만에 10배 이상의 수익률을 거뒀는데 아무런 파급 효과가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도 1, 2억을 벌고 끝난 게 아니었다.

거의 100억.

제아무리 혜성 그룹의 안주인이라고 하나, 그녀는 3년 만에 거의 재벌 총수가 보유한 비자금만큼의 현금을 쥐게 되었다.

이러니 돈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들이 여기저기서 그녀에게 달라붙는 것이다.

주로 강남의 돈 많은 복부인이 말이다.

“외부 손님들이야 그렇다 치고, 회사 내부에서는 곤란한 점이나 특이사항은 따로 없습니까?”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상사들을 대하는 게 어렵습니다.”

“상사들이요? 왜, 혜성 그룹 경영진이 지은 씨에게 차별 대우라도 하는 겁니까?”

만약 그런 거였으면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하지만 다행히 그녀의 답변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차라리 차별 대우라면 좋겠는데, 하급자인 저에게 오히려 눈치를 봐서 문제에요.”

“그렇습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지은이 혜성 그룹의 안주인인 이상, 예정된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혜성 호텔 임원들로서는 그녀를 하급자로 보는 게 아니라, 회장의 아내로 볼 것이니 말이다.

‘말로 해서 될 일도 아니지.’

그녀의 직급 문제는 예전에도 했던 고민이었다.

물론 아직도 그 고민은 유효하였다.

내 아내라는 이유로 혜성 호텔을 잘 경영하고 있는 혜성 호텔 대표를 해임하고 그녀를 임명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지금처럼 어정쩡한 전무 대우로 계속 놔두는 것도 별로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그냥 회사를 관두라고 해볼까?’

나는 속으로 그 같은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도 바깥일을 하고 싶어 하는데 억지로 막을 수는 없었다.

억지로 막았다가는 100억이 넘는 현금으로 자신이 직접 회사를 차릴 터.

자칫하면, 불화설이 퍼지면서 재계 모임에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수도 있었다.

물론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녀가 하고 싶은 일에 최대한 협조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내가 그녀에게 했던 약속이기도 했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군.’

생각을 정리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베스 호텔이라고 아십니까?”

“네, 들어봤어요. 미국과 일본에서 크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호텔 체인점 아닌가요?”

“사실 이베스 호텔의 사주가 접니다.”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혜성 그룹의 안주인이라고는 하나, 그녀 역시 내 재산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였다.

그렇다 보니, 혜성 그룹과 전혀 연관이 없게 느껴지는 이베스 호텔의 지분이 내 소유라는 말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요?”

“네.”

“이베스 호텔은 언제 인수하셨어요?”

“꽤 됐습니다. 혜성 호텔을 한창 확장할 때 비즈니스 호텔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하나 인수했거든요.”

유지은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이베스 호텔의 규모가 혜성 호텔을 넘어선 지 오래인데, 마치 작은 중소기업 인수한 것처럼 이야기하니 그녀로선 황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그런 유지은의 표정에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이베스 호텔을 아신다고 하니,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혹시 이베스 호텔의 한국 법인 대표가 되실 생각이 있습니까?”

“저, 정식으로 한국에 진출하는 건가요?”

“올림픽이 있기 전부터 한국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조금 늦어졌지만 말입니다.”

“준비를 오래 하셨으면 대표 자리도 이미 정해둔 거 아닌가요?”

“오래 걸린 이유가 한국 법인의 대표 자리를 맡길 인재가 없어서였습니다.”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표 자리를 얻은 것보다, 나에게 인정받은 인재라는 사실에 더 기뻐하는 거 같았다.

‘뭐 인재야 잘 찾아보면 많겠지만, 신뢰할 수 있는 인재가 드문 것은 사실이니.’

내 진짜 생각이야 어떻든, 유지은이 기분 좋으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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