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방위 산업을 해보라고?
다음 날.
혜성 자동차에 인수되고 1시간으로 길어진 점심시간을 여유롭게 만끽하던 김태형에게 동기가 찾아왔다.
“김태형.”
“어, 희연이 어쩐 일이냐.”
“그냥 안부나 물으려고 왔지.”
김태형은 피식 웃으며 최근에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일찍 퇴근하여 편의점에 가본 일부터, 거기 알바생이 예뻐서 고백해 본 일까지.
“그래서 사귀었어?”
“아직. 일단 데이트 몇 번 하고서 서로 알아 가보기로 했어. 바로 이번 주 주말 약속 정했다.”
“이 자식, 네가 그렇게 저돌적일 줄은 몰랐네.”
“나도 몰랐어. 여자가 고프긴 했었나 봐.”
그렇게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데, 동기가 갑자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야, 태형아. 너는 노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노조?”
몇 달 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으면 일체의 고민도 없이 노조에 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을 것이다.
기화 그룹의 경영진은 누가 보더라도 악이었다.
노조는 그런 악과 대립하고 있으니, 선이라고도 볼 수 있을 터.
김태형으로선 노조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예전엔 괜찮았는데 요즘은 좀 그렇긴 해.”
“왜?”
“뭐라고 해야 하나. 요즘의 노조는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라고 외치는 거 같아. 아무도 공감해 주지 않는 그런 문제들을 말이야.”
그가 그렇게 말하니, 동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너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대부분은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건 그렇긴 하지. 노조가 지나칠 정도로 시끄럽잖아?”
“그니까. 기화 그룹의 경영진을 상대로라면 그렇게 해도 괜찮은데, 굳이 혜성 그룹을 상대로 그렇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 근무 조건도 업계에서 제일 좋은 기업인데.”
“너는 그럼 노조의 방향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거네?”
“방향? 뭐, 거창하게 그런 건 아니고. 노조가 조금 더 온건하게 바뀌었으면 좋겠어. 파업이니 시위니 그런 건 혜성 그룹에서 굳이 할 필요가 없잖아?”
동기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갑자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태형아. 가능하면 이거에 서명 좀 해줄 수 있겠냐?”
“이게 뭔데?”
“별거는 아니고 동의서인데, 그냥 지금 말한 것처럼 노조를 온건하게 바꾸는 것에 찬성한다고 서명하는 거야. 우리 노조를 혜성 자동차의 노조처럼 경영진과 대화와 합의로 문제를 해결하는 식으로 바꾸는 거지.”
대화와 합의라.
정말 좋은 말이었다.
김태형이 생각하기에도 지금 기화 노조에 필요한 것은 투쟁이 아니라 상생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거라면 서명은 해줄 수 있는데, 너 노조에 가입한 거야?”
“어, 왠지 지금의 노조를 가만 놔두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귀찮지 않아?”
“귀찮기는. 보람찬 일이지. 우리 기화 자동차의 직원과 혜성 그룹 모두를 위해 봉사하는 거잖아?”
동기의 말에 김태형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로서는 자신의 시간을 내버리면서까지 노조 같은 것에 참가하는 게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동기의 행동이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회사 전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정말 희연이 말처럼 노조가 회장님과 공존하는 방향을 선택했으면 좋겠군.’
김태형은 혜성 그룹도 좋았지만, 지금의 혜성 그룹을 만든 한성도 극도로 존경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한성이 기화 자동차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봐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혜성 자동차보다 더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노조의 변화였다.
노조가 앞으로도 줄곧 혜성 그룹의 경영진에 적대적으로 나선다면 한성이 기화 자동차를 좋게 볼 리는 없을 것이다.
* * *
(요즘 언론에서는 네 이야기밖에 안 하는 거 같더구나.)
노사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기화 자동차를 인수한 게 생각했던 것보다 파급 효과가 컸던 거 같습니다.”
(국민들은 벌써 혜성 그룹이 미래 그룹을 넘어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렇습니까?”
(일단 인지도 자체는 확실하게 넘어섰다고 봐도 무방해.)
기분 좋은 이야기였다.
물론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기화 자동차를 인수했다고 미래 그룹을 넘어섰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매출이나 자산이 아직은 미래 그룹이 근소하기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 그것도 이제 시간문제지만.’
올해 안에는 반드시 넘어설 것이다.
반도체만 해도 엄청난 매출이 예상되었으니, 어쩌면 1조 이상 압도할 수도 있으리라.
(노조 이야기도 많던데.)
“강경파들이 워낙에 소란을 피우고 있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사내 여론이 온건파로 넘어가고 있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일까?
기화 자동차의 노조는 더욱더 강경한 스탠스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밀리면 노조의 존립도 위협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혜성 자동차의 노조가 파견한 조합원들의 활약으로 이 같은 강경 대응은 노조의 고립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에서도 기화 자동차의 노조를 마치 공산주의자처럼 비유하며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우고 있었고 말이다.
(여유로운 표정을 보아하니, 노조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 모양이군?)
“예. 강경파는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적으로 소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사는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노조에 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래 그룹은 이제 어쩔 거냐?)
“고민 중입니다.”
(샤롯 그룹이나 쌍호 그룹을 상대했을 때처럼 미래 그룹의 계열사를 인수하고 싶으면 언제든 내게 말해라.)
든든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과유불급의 상태였다.
미래 그룹의 계열사 중에 크게 탐이 나는 기업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탐나는 기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리해서 인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외국에만 나가도 미래 그룹보다 잠재력이 높은 기업들이 수두룩했으니까.
“다른 재벌들 때문에라도 기업을 인수하는 일은 여기서 멈추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잘 판단했구나. 사실 네가 미래 그룹의 계열사까지 인수하겠다고 말한다면 따끔하게 혼내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그렇습니까?”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노사가 저리 말하니 옛 생각이 나는 거 같았다.
예전에는 노사의 잔소리를 정말 많이 들었었는데.
(네 말처럼, 미래 그룹의 계열사까지 인수하려 했다면 대기업 전체가 반 혜성 동맹에 가담할 수도 있었을 거야.)
“혜성이 그만큼 위협적으로 느껴졌나 보군요.”
(당연하지. 네가 쓰러뜨린 대기업만 몇 개인데, 위협을 안 느끼고 배기겠어?)
“한국에서 기업을 더 인수할 생각은 없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앞으로는 미래 그룹만 생각하지 말고 재계의 반응 전체를 신경 써서 움직여. 너는 지금 너무 주목을 받고 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미래 그룹은 당분간 가만히 놔둬야겠군요.”
(사업에서 이기면 될 일이야. 아니면, 방산업을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고.)
“방산업이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노사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래 그룹이 방산 쪽에서 알아주잖아. 매출도 아마 천억 단위로 나온다지? 네가 미래 그룹의 파이를 빼앗는다면 미래 그룹도 꽤 성가시게 느껴질 거야.)
“음. 근데 저는 방산업에 문외한이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방산업을 시작해야지. 지금처럼 정권과의 사이가 좋을 때 아니면 언제 방산업을 시작하게?)
“하지만 저희 그룹은 자동차 말고는 방산업과 관련 있는 사업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소련이 무너지면 러시아 과학자들을 데려올 거잖아? 러시아 과학자들을 가장 써먹기 좋은 곳이 방산업 말고 또 뭐가 있겠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련이 붕괴할 날도 멀지 않았다.
이미 작년부터 소련이 붕괴할 날을 대비하고 있었으니, 소련이 무너질 때 소련 출신의 과학자를 영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터.
노사의 말처럼 방산업을 미리 시작해둔다면 소련 과학자를 활용하기가 한결 더 수월해질 것이다.
‘러시아 과학자를 데려와 로켓이라도 만든다면 국익에 상당히 도움이 되기는 하겠어.’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업하면서 늘 느꼈던 것이 국력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만약 한국의 국력이 일본만큼 강했다면?
소비자에게 어필하기도 한결 수월했을 것이고 다른 나라에서 협력사를 구하는 것도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무시당하는 일도 지금보단 적을 것이고.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한국의 국력을 키우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야 내 사업에만 열중했었지만, 재계 1위를 눈앞에 둔 이상 더욱 장기적인 관점에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그래. 급한 건 아니니 천천히 고민해 봐.)
“노사께서는 요즘 특별한 일 없으십니까?”
(나는 똑같다. 신도를 늘리고 돈 버는 것에 집중하고 있지.)
“그렇습니까?”
(아직은 혜성 그룹에 크게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나중을 기대해봐. 어떤 식으로든 혜성 그룹을 도와줄 테니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솔직히 사이비 종교의 도움을 받을 일이 과연 있을까 싶기도 했다.
물론 기화 자동차를 인수할 때 노사의 도움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예 무시할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 * *
“비서실장님.”
“예, 회장님. 말씀하십시오.”
“혜성 경제연구소에 연락해서 방산업 관련하여 사업성 좀 조사해 보라고 전해 주세요.”
혜성 그룹의 싱크탱크나 다를 게 없는 것이 혜성 경제연구소였다.
미래 정보를 더는 신뢰할 수 없게 되고부터 나도 조금씩 혜성 경제연구소에 자문을 얻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정확도가 높았다.
물론 아직은 내가 미래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하는 결과가 훨씬 더 정확했지만 말이다.
“방산업 말씀입니까?”
“예, 아직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닌데, 혜성 연구소의 조사만 괜찮다면 방산업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진봉현 비서실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노사와 똑같은 말을 하였다.
“정권이 저희에게 우호적인 만큼, 방산업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니 새삼 김영산 대통령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5공의 총애를 받았던 기업들을 봐서 그런지, 나는 별로 특혜 같은 것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섣부른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생각해보면 정권의 특혜를 받을 필요도 없이 그저 우호적인 관계만 맺어도 알게 모르게 얻는 이익이 상당한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 주말에 청와대 만찬회가 잡혀 있었죠?”
“예. 토요일이 청와대 만찬회 날입니다.”
청와대 일정이 잡혔으니, 오랜만에 김영산 대통령을 보게 될 거 같았다.
나는 반가운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하였다.
기화 자동차를 인수한 일로 꾸중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꾸중도 꾸중이지만, 또 무엇을 부탁할지 모르니, 그게 또 부담스럽네.’
툭 하면 나에게 경제 자문을 구하는 것이 김영산 대통령이었다.
작년 하반기부터 경기가 조금씩 하락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아마 이번 만찬회에서도 내게 무언가를 부탁하지 않을까 싶었다.
‘부디 성가신 부탁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
미래 정보라는 귀중한 밑천도 조금씩 떨어져 가는 상황이었다.
100번 잘하던 사람이 1번 못하면 오히려 욕먹는 것처럼, 나도 괜히 한 번 실수했다가 욕먹는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때였다.
내가 속으로 김영산 대통령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양준현이 다가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 지금 사옥 정문에 막 도착했습니다.”
손정의 사장, 아니, 이제는 정식으로 회장이 된 손정의의 방문 소식에 나는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