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후임을 생각해 봐야겠어
나는 기화 자동차의 본사까지 나와 함께 움직였던 혜성 자동차의 하운철 대표에게 불쑥 물었다.
“섭섭하지는 않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던 것일까?
하운철 대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섭섭하다니요. 제가 회장님께 섭섭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기화 자동차와 혜성 자동차를 합병했으면 더 큰 회사를 경영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허허.”
내 말에 하운철 대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회장님,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오히려 감사한 마음입니다. 지금도 버거운데 기화 자동차까지 합병하면 제가 어떻게 감당했겠습니까?”
“혜성 자동차를 지금의 자리까지 만든 대표님입니다. 감당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요즘 들어 하루가 다르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최신의 추세에 따라가는 것도 버겁다는 생각이 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회장인 내 앞에서 자신의 흠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하운철 대표가 빈말하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진심인가 보군.’
불만을 내비치지 않는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욕심 없는 저 모습은 누가 봐도 목표를 달성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운철 대표는 혜성 자동차를 여기까지 키운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슬슬 하운철 대표의 후임을 생각해 봐야겠어.’
지금까지야 누구보다도 잘해줬었다.
재벌까진 아니어도 어쨌든, 중견 그룹의 총수였다 보니 경영인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하운철 대표의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자동차 업계 역시 트렌드가 수시로 바뀌는 정글 같은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본인부터가 은퇴를 염두 하는 모습이기도 했고.
‘후임은 기화 자동차 대표가 좋을 거 같다. 물론 기화 자동차가 성공적으로 미래 자동차를 제친 이후의 이야기겠지만 말이야.’
나는 기화 자동차에 엄청난 투자를 할 예정이었다.
일본에 남아있는 개인 자산은 물론이고, 그룹의 사내 보유금까지 총동원할 생각인데, 규모로 따지면 조 단위에 이를 것이다.
아마 이 정도의 자금에 기화 자동차의 인지도가 합쳐진다면 몇 년 안에 미래 자동차와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았다.
뭐, 혜성 자동차는 그사이에 미래 자동차가 아니라, 도요타와 동등한 위치에 설 테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혜성은 점령군 행세를 그만두고 기화에서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듣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허허, 기화 자동차의 노조인가 봅니다.”
“노조라…….”
“예상했던 대로 노조의 반대가 상당할 거 같습니다.”
하운철 대표는 그렇게 말하면서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만으로도 피곤한 존재라 그러는 듯싶었다.
‘역시 쉽게 물러나지는 않는다 이건가?’
기화 자동차의 사내 여론이 대단히 긍정적이라 해서 조금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화 자동차의 노조를 장악한 것은 미래 자동차의 노조와 비슷한 강경 노선의 집행부였다.
경영진과 투쟁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그들에게 기화 자동차의 경영진이나, 혜성 그룹의 경영진은 똑같은 존재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혜성 자동차와 기화 자동차의 중복되는 부서가 곧 통합될 예정이지 않습니까? 그때 혜성 자동차의 노동 조합원 일부를 기화 자동차로 전임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 하하하!”
내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가 이내 통쾌하게 웃었다.
혜성 자동차의 노조를 이용하여 기화 자동차의 노조를 공격하겠다는 의미였으니 그로선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경 노선의 노조가 왜 혜성 그룹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하는지 알게 해주마.’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혜성 그룹이 기화 자동차를 인수한 일은 해외 자동차 제조사들도 제법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특히나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의 도요타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요타의 경쟁 업체들이 렉서스의 실패를 두고 앱설루트와 비교하며 도요타를 깎아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요타 경영진은 어쩔 수 없이 혜성 자동차를 의식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기화 자동차를 인수했으니 혜성 자동차도 본격적으로 대중차에 진출하겠군.”
“예, 분명히 그럴 겁니다.”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어차피 한국 기업일 뿐입니다. 세계 시장에 큰 영향을 끼칠 일은 결단코 없을 겁니다.”
“그 한국 기업이 성공한 프리미엄 시장을 우리는 발도 제대로 디디지 못하고 있지 않나?”
회장의 지적에 도요타 데쓰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렉서스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 도요타 데쓰로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은 성과가 미미하지만, 조금씩 시장에서 반응이 나오고 있으니, 올해는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흠.”
도요타 데쓰로의 반론에 회장은 이렇다, 저렇다 대답 없이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혜성 자동차다. 그들이 만약 대중차 시장에서 앱설루트와 같은 반향을 일으키면 일이 곤란해져.”
앱설루트의 매출 자체야 도요타와 비교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앱설루트의 브랜드 이미지가 도요타를 조금씩 앞서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기화 자동차까지 앱설루트와 같은 성공을 거둔다면?
도요타로선 최악의 경쟁 업체가 생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제가 조사한 결과, 혜성 그룹은 작년부터 여러 기업을 인수하는데 막대한 자금을 사용하였습니다. 자동차 사업을 크게 일으키려면 그만한 투자가 필요할 텐데, 혜성 그룹에는 그런 여력이 없으니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흠, 그래?”
다른 이사의 말을 들은 도요타 데쓰로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혜성의 자금력은 아직 여유가 있을 텐데…….’
물론 그도 혜성 그룹의 정확한 자금력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엠파이어 빌딩을 한국 돈으로 조 단위의 가격으로 사들인 그였으니, 혜성 그룹에 자금력이 넘쳐난다는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걸 말해야 하나?’
도요타를 위해서라면 그가 아는 정보를 회장에게 전해주는 게 맞았다.
문제는 이 정보를 회장에게 전해준다면, 회장이 그를 내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안 그래도 렉서스 일로 낙제점을 받은 상태에서 경쟁 업체의 사주에게 수천억 엔의 자금을 쥐여 줬으니, 임원직에서 해임당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누가 혜성 그룹이 이렇게 클 줄 알았냐고.’
혜성 그룹이 한국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야 진즉부터 알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혜성 그룹이 한국을 넘어 세계에 영향력을 끼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도요타도 수십 년에 걸쳐 사운을 걸고 노력한 결과, 80년대가 되어 간신히 세계로 영향을 뻗쳤는데, 고작 한국 기업이 단기간에 그런 성과를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예상은 처참하게 깨졌고, 기화 자동차를 인수한 혜성 그룹은 어느덧 도요타 회장조차도 경각심을 느끼게 하는 기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래 그룹보다 혜성 그룹을 더 높게 평가하니, 다들 이점 유의하고 혜성 자동차를 경계하도록.”
“하이!”
회장의 그 같은 말에 도요타 데쓰로는 벌떡 일어나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였다.
‘부디 혜성 자동차가 이 이상 도요타를 위협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만약 그에게 받은 자금으로 혜성 그룹이 도요타를 추월하기라도 한다면, 도요타 데쓰로는 도요타에 남아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 * *
“과장님이 빡세질 거라고 해서 매일 야근하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퇴근 시간이 더 빨라졌잖아?”
귀가하는 김태형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혜성 자동차와 합병하니, 마니 어수선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회장이 기화 자동차 본사에 입성한 이후, 일반 직원들의 혼란은 줄어들었지만, 간부들은 오히려 더 바쁘게 움직였다.
무려 미래 자동차를 넘어서라는 거창한 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임원들이야 당연히 그랬겠지만, 김태형도 회장의 이 같은 지시가 떨어지자, 크게 걱정했었다.
물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에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현실적인 이유, 야근하게 될 거 같아서였다.
실제로 그의 상사가 토요일은 물론이고, 일요일도 반납해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내리기도 했었고.
하지만 정작 혜성 그룹에 인수되고 김태형은 한 번도 야근이란 것을 한 적이 없었다.
회장의 지시가 내려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오히려 퇴근 시간이 점점 빨라질 정도였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어.’
임원들은 바빠졌는데 직원들은 오히려 여유가 생기다니.
이전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매일 이랬으면 좋겠군.’
김태형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해가 떠 있을 때의 퇴근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편의점에 가서 맥주나 사 갈까? 동생들 먹을 과자도 좀 사고 말이야.”
그의 눈에 HS24가 보였다.
HS24란, 혜성 그룹의 편의점이었는데, 원래는 괜한 라이벌 의식 때문에 방문을 꺼렸었다.
기화 자동차 직원으로서 혜성 그룹의 편의점을 이용하는 게 아무래도 양심에 찔리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도 혜성 그룹의 일원이었고, 일찍 퇴근하여 기분이 좋으니 HS24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첫 편의점 경험은 의외로 ‘나쁘지 않다’였다.
일단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거는 마트 주인이 없다는 점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물품이 다양했고 위생적으로 관리되는 모습이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알바생이 예쁘네.’
김태형은 피식 웃으며 알바생 때문에라도 다음에 또 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예전 같았으면, 매일 야근하느라 여자에게 눈길도 두지 않았을 텐데, 여유가 생기니 여자에 다시 관심이 생긴 것이다.
“태형이 왔어?”
“형, 오늘도 빨리 왔네!”
“혜성이 확실히 직원 복지가 좋은가 봐!”
집에 도착하니 가족들이 반겨주었다.
특히나 기뻐한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기화 자동차에 다닌 이후로 그와 저녁 식사를, 아니 식사 자체를 함께 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녁 먹자.”
마침 그의 어머니가 손을 씻는 그에게 말했다.
김태형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가족들과 같이 식사하였다.
“오빠, 나도 혜성에 다녀야 할까 봐.”
“혜성이 네가 다니고 싶다고 다닐 수 있는 기업인 줄 알아?”
“나 정도면 꿀릴 게 뭐가 있어? 대학 잘 나왔지, 머리도 좋잖아.”
“꿀릴 것을 찾는 게 아니라, 남들 앞에 내세울 장점을 찾아야지. 애초에 단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혜성에 갈 생각하면 안 돼.”
“와, 혜성 그룹 직원이 되었다고 완전히 혜성맨 다 됐네!”
“그럼! 내가 혜성맨이 아니면 누가 혜성맨이야!”
당당한 그의 선언에 여동생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가족은 흐뭇하게 웃었다.
가족 역시 혜성 그룹의 직원이 된 그가 자랑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김태형에게 불쑥 이같이 말했다.
“태형아. 네가 이제 자리도 제대로 잡았고, 나이도 찼으니, 슬슬 결혼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평소, 김태형이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 바로 결혼하라는 말이었다.
여자를 만날 시간은커녕, 잠잘 시간도 부족한 그에게 결혼하란 말은 부담스러운 수준을 넘어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혜성 그룹의 직원이 되면서 여유 시간이란 게 생겼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정말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3년 안에 손자를 보여드릴 테니.”
그의 선언에 가족은 매우 놀랐다.
취직하고 한 번도 여자를 만난 적이 없는 그가 손자 이야기까지 꺼냈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