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매출 3조 기업을 인수한다
“여보세요?”
-나, 미래 그룹 회장 왕재구 회장이요.
양준현이 건네준 수화기를 받으니, 수화기 너머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우리 한번 만납시다.
“용건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 굳이 물을 필요도 없겠군요.”
-물을 필요 없지. 우리가 만나서 할 이야기란 뻔하니까.
나는 흔쾌히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그럼 내가 바로 잠실에 갈 테니, 기다리고 계시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바로 찾아온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왕재구 회장이 우리 회사로 찾아온답니다.”
“미래 그룹의 왕 회장 말씀입니까?”
진봉현 비서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기화 자동차 인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군요.”
“마침 잘 됐습니다. 미래 그룹의 현실을 이야기해 줄 때가 되었는데 말입니다.”
나는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재구 회장도 아마 지금쯤이면, 내가 김수호 회장에게 어떤 제안을 했는지 들었을 것이다.
30%가 채 안 되는 지분을 1,200억에 인수한다는 바로 그 제안 말이다.
미래 그룹의 재정 상황은 나도 알 수 없지만, 당연히 1,200억은 미래 그룹에도 부담스러운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경쟁을 하면 인수 금액이 더 높아질 것이니 더더욱 부담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지금 다급히 나를 찾으려는 것도, 인수가를 조정하려는 것이 아닐까?
“회장님, 미래 그룹의 왕재구 회장이 찾아왔습니다.”
진봉현 비서실장과 잠깐 잡담을 나누는데, 왕재구 회장이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사옥에 도착하였다.
이미 달려올 준비를 하고서 전화 걸었던 듯싶었다.
“어서 오십시오.”
“억지로 반길 필요는 없습니다.”
“미래 그룹의 회장님께서 오셨는데, 반갑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 회장이 빈말을 잘하는 성격일 줄이야. 아무튼,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역시나 왕주형 명예 회장의 아들다운 태도였다.
저돌적이라고 해야 하나?
“말씀하시죠.”
“기화 자동차 인수, 포기하십시오.”
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누가 누구보고 포기하라고 하는 건지.
“거절하겠습니다.”
“미래 그룹을 상대로 자금력 승부라도 해보자는 겁니까?”
“반대로 묻겠습니다. 미래 그룹의 사내 유보금이 혜성 그룹의 사내 유보금보다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왕재구 회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가진 자금은, 적어도 한국 기업을 인수할 때만큼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가총액 2조가 넘는 기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장한 모든 기업의 시가총액을 다 합쳐봐야 80조가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이러니 왕재구 회장이 보여주는 자신감이 우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여유 자금이 많으시기에 그런 태도를 취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기화 자동차, 아니, 미래 자동차 급의 기업을 여러 개 인수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돈이 아무리 많아도 미래 자동차는 인수할 수 없었다.
악재가 따로 없으니 주가를 사전에 떨어뜨릴 수도 없었고, 애초에 지분을 10% 이상 모으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기화 자동차보다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방어하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미래 자동차의 시가총액이 1조가 조금 넘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가진 자금으로 여러 개 인수하는 것은 이론상 가능한 이야기였다.
“결국 끝까지 가보자는 겁니까?”
“중간에 끼어든 것은 미래 그룹 쪽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뭔가 제 잘못처럼 느껴집니다?”
“혜성 그룹의 잘못이 아니면 누구의 잘못입니까? 애초에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려고 한 거부터가 잘못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기업이 기업을 인수하는데 경쟁 기업이 와서는 잘못했다고 말하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일일이 변론하면 이야기가 쓸데없이 길어질 거 같으니, 그저 경고 하나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경고라고 하셨습니까?”
“예. 조금 전에 저에게 말씀하셨지요? 기화 자동차 인수를 포기하라고? 이번에는 제가 경고하겠습니다. 더 손해 보기 전에 기화 자동차에서 손 떼십시오.”
“재계 2위가 되었다고 자신감이 과하신 거 같습니다. 혜성 따위가 미래 그룹에 경고를 하다니 말입니다.”
꽤 화가 났는지, 말투가 험해지는 왕재구 회장이었다.
“지금 제가 기화 자동차의 지분을 얼마나 갖고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왕 회장님께 현실을 일깨워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하! 지분을 조금 많이 매입하셨나 본데, 그래 봤자 10%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까짓 10% 지분쯤이야 우리도 금방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뭘 그럴 수 없다는 겁니까? 우리 미래 그룹이 지분을 매입하겠다는데!”
“죄송하지만, 시장에서 매입할 수 있는 지분은 저희가 거의 다 매입하였습니다.”
내가 들고 있는 지분만 30%가 넘었다.
은행이나 명동 사채업자, 그리고 김수호 회장 본인의 지분을 제외하면 기화 자동차의 지분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가는 미친 듯이 올라가는데 거래량이 거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분을 얼마나 가지고 있기에 지분을 다 매입했다고 하는 겁니까?”
“30%. 이미 30%를 인수했습니다.”
“……!”
왕재구 회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로서는 실로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들은 이제 막 자금을 모아서 기화 자동차의 지분을 매입하고 있는데, 혜성은 이미 지분을 30%나 인수했다니.
“어, 어떻게 지분을 30%씩이나…….”
“기화 자동차의 악재가 갑자기 왜 터졌겠습니까?”
“그게 다 이 회장의 짓이었습니까?”
“저는 작년부터 기화 자동차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작년에 이미 10%가 넘는 지분을 인수했고, 올해 준비했던 것들을 실행에 옮겼을 뿐입니다.”
“이미 승패가 정해진 게임이었다니.”
왕재구 회장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기화 자동차 인수전이 이렇게 쉽게 막이 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시가총액만 3천억에 가까운 회사였으니 더더욱 예상치 못했을 터.
‘노사 덕분이었지.’
아무도 모르게 지분을 15% 가까이 인수한 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수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도 뒤에서 몰래 매집했던 것이 노사였고 말이다.
“김수호 회장을 도와서 제 인수를 방해하려 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제가 가진 지분만 30%인 데다, 우호 지분까지 합치면 이미 50%가 넘었으니 말입니다.”
“…….”
김수호 회장과 만난 다음 날부터 나는 기화 자동차의 다른 주주들과도 한 번씩 밀회의 시간을 가졌다.
김수호 회장이 끝까지 매각을 거절할 수도 있었기에 강제로 경영권을 빼앗을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도 주주들은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그동안 혜성 그룹 계열사들의 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약간의 사례금을 주고 의결권을 위임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 김수호 회장이 매각을 반대해도 기화 자동차의 경영권은 언제든 내가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단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좋습니다. 기화 자동차는 제가 포기하는 거로 하죠.”
마치 선심 쓰듯 말하는 게 우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자동차 업계 1위 타이틀을 넘겨주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재계 순위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그러자 왕재구 회장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래 그룹이 기화 자동차를 포기했으니, 이제 김수호 회장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겠군요.”
“왕재구 회장은 아직 기화 자동차를 포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 회장님께서 친절하게 경고해 주셨는데, 계속 고집을 부릴 거라는 말씀입니까?”
“미래 그룹의 힘은 자본력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 인맥의 힘을 총동원하여 기화 자동차 인수를 방해하려 들 겁니다.”
물론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왕재구 회장이 동원할 인맥의 힘이란 뻔했다.
야당과 여당의 정치인들이겠지.
그리고 그 여당의 일부 인사는 이미 내가 회유한 상태였다.
‘이종석 의원도 완전히 나와 손을 잡은 거나 다름없으니, 왕재구 회장의 편을 들어줄 정치인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여당이 혜성 그룹을 두둔한다면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야당이야 여전히 5공 비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차라리 왕재구 회장이 끝까지 발버둥 쳐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아쉽게도 왕재구 회장은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날 당일, 이종석 의원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 회장, 축하드립니다. 결국, 기화 자동차를 인수했군요.
“아직 인수가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왕 회장도 포기했는데 뭐가 아직 남아 있답니까?
“왕재구 회장이 의원님을 찾아갔습니까?”
-예, 찾아와서는 저보고 도와달라 하더군요. 하하, 물론 저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기화 자동차를 인수할 기업으로는 혜성 자동차가 더 적합하다고 말입니다.
나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아무래도 왕재구 회장이 이종석 의원의 힘을 빌리려다 실패한 모양이었다.
-제가 그리 말하니, 왕 회장이 비통한 표정을 짓더군요. 그래서 제가 기화 자동차는 포기하는 게 좋다고 왕 회장을 설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편을 들어주셔서.”
-이미 약속했던 일 아닙니까? 하하, 앞으로 혜성 그룹과 저는 한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한편이라고 생각해주면 나야 좋은 일이었다.
‘어쨌든 미래 그룹이 물러났으니, 이제 기화 자동차 인수도 마무리하는 게 좋겠어.’
* * *
왕재구 회장과 만나고 이틀이 지나자, 언론에서 이 같은 소식을 보도하였다.
<미래, 기화 자동차 인수 포기하나?>
공식적으로 미래 그룹이 인수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식시장에서 기화 자동차의 지분을 공격적으로 매입하던 세력이 갑자기 사라지자, 언론은 미래 그룹이 기화 자동차 인수를 포기했다고 받아들였다.
이미 혜성의 보유 지분이 한참 앞서가고 있는 상황에서 지분 매입을 멈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한성 회장님, 혹시 오늘 시간이 됩니까?
신문을 살피고 있는데 김수호 회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왕재구 회장이 기화 자동차 인수를 포기했다는 소식에, 김수호 회장도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오늘은 시간이 안 될 거 같습니다.”
-으음.
“그런데 기화 자동차 매각에 관해서는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기화 자동차에 관해서는 만나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회장님도 들어서 아시겠지만, 미래 그룹은 기화 자동차를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들었는데…….
“왕재구 회장 본인이 직접 저에게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게 있겠습니까?”
-허, 왕 회장은 왜 그런 선택을?
“그야 제가 보유한 지분이 30%가 넘으니,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니겠습니까?”
순간 수화기 저편이 잠잠해졌다.
아무래도 내 말을 듣고 매우 놀란 듯싶었다.
하긴, 난데없이 본인의 지분을 넘어서는 최대 주주가 등장한 격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경영권 프리미엄이라도 받고 싶으시다면 지금 지분을 넘기는 게 좋을 겁니다.”
-경영권 프리미엄이라면, 50%입니까?
“설마 더 욕심내시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내일 시간을 내드릴 테니, 그때 결정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김수호 회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다음 날이 되자, 예상했던 대로 김수호 회장은 내게 기화 자동차 지분과 경영권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마침내 기화 자동차가 온전하게 내 손으로 들어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