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누구 편을 들래?
이종석 의원이 웃으며 악수하였다.
“언제 뵙나 싶었더니, 오늘 마침내 보게 되었군요. 반갑습니다. 이종석 의원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이한성입니다.”
“여기 앉으시죠.”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종석 의원과 마주 앉으니, 그가 술을 들었다.
“한잔하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혜성에서 술도 제조하지요?”
“예, 혜성 주류라는 계열사에서 소주와 맥주, 위스키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술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의외입니다. 혜성 그룹 하면 뭔가 혁신적이고 첨단 산업이 떠오르는데 말입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긴, 혜성 그룹의 모태 기업도 의류 회사였지요?”
“의류로 시작해서 건설로 그룹을 키웠습니다.”
“지금의 주력 계열사는 자동차와 반도체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단하시군요. 제가 알기로 혜성 그룹이 자동차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 것이 5년도 채 안 됐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이종석 의원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다시 술을 들어 올렸다.
한잔 씩 마시고 나자,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혜성 자동차도 그렇고 혜성 전자나 혜성 반도체도 그렇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다른 그룹의 계열사까지 탐낼 필요가 있습니까?”
아무래도 샤롯 그룹과 있었던 일을 따지는 듯싶었다.
“제가 사업을 하면서 느낀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안주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지금 하는 사업들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이로군요.”
“물론입니다. 재계 1위도 되지 못했는데 벌써 만족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재계 1위라.”
그의 입가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비웃으려는 것을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
‘혜성 그룹이 절대 미래 그룹을 넘어섰다고 생각하나 보지?’
그러니 왕재구 회장과 친하게 지내는 것일 거다.
“그나저나 이한성 회장님. 이렇게 갑자기 저를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그가 용건을 묻자 나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종석 의원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이요?”
이종석 의원이 내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다짜고짜 부탁한다고 하니, 그로선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좀 그렇군요. 친분도 없는 사인데 갑자기 찾아와서는 부탁을 하겠다는 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일단 들어봅시다. 저에게 어떤 부탁을 하려는 겁니까?”
“저희 그룹에서 한 기업을 인수하려고 합니다.”
“허어, 작년에 그렇게 많은 기업을 인수하고도 또 회사를 인수하신다고요?”
놀란 표정의 그를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어떤 회사인지 말하지도 않았는데도 저런 반응이면, 기화 자동차를 인수할 거라고 말할 때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단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절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리란 점이야.’
왕재구 회장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시점이었다.
미래 그룹에 불이익이 갈 것이 분명한데, 이종석 의원이 긍정적으로 반응할 리는 없었다.
“인수하려는 기업이 어딥니까?”
“그전에, 이종석 의원님. 의원님은 미래 그룹과 손을 잡으실 생각입니까?”
갑작스러운 내 말에 이종석 의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미래 그룹과 손을 잡는다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왕재구 회장과 자주 모임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어제도 함께 식사했다지요?”
“이 회장! 감히, 나를 뒷조사하기라도 한 겁니까?”
이종석 의원이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의원님을 뒷조사한 게 아니라, 왕재구 회장과 관련된 소식은 저에게 자동으로 들려옵니다. 아무래도 저를 적대하는 기업이니, 그에 걸맞은 대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왕재구 회장은 아마 지금쯤 강진길 의원과 만나고 있을 겁니다.”
“왕재구 회장이 강진길이를 만나고 있단 말입니까?”
“믿기 어려우시면 이따가 따로 확인해보십시오. 그럼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낯빛을 흐렸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고 내 말이 사실임을 직감한 것이다.
“이한성 회장님이 미래 그룹보다 월등한 정보력을 가졌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결국, 제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의원님, 미래 그룹을 버리고 혜성 그룹과 손을 잡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 제안에 이종석 의원이 코웃음을 쳤다.
“저는 국회의원입니다. 재계의 인사도 아닌 제가 뭣 하러 혜성 그룹과 손을 잡습니까?”
“미래 그룹과 손을 잡는 것보다 혜성 그룹과 손을 잡는 게 의원님의 미래를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일 겁니다.”
“이한성 회장님은 제 미래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의원님의 미래야,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대선에 나가 차기 대통령이 되셔야지요.”
“……!”
눈을 부릅뜬 그에게 나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올해 안에 혜성 그룹은 미래 그룹을 뛰어넘을 겁니다.”
“예?”
“혜성 그룹이 재계 1위가 되는 날은 머나먼 미래가 아닌, 바로 올해라는 뜻입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하지만 그게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두 그룹의 매출 차이가 5조 이상일 텐데 말입니다.”
불신하는 그에게 나는 마침내 기화 자동차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아까 기업을 인수한다고 말했었는데, 제가 인수하려는 기업이 바로 기화 자동차입니다.”
“기화를 인수한다니, 그게 정말입니까?”
“예. 이미 준비는 끝났습니다. 물론 인수 자금도 충분한 상태입니다.”
“허어.”
“어떻습니까. 기화 자동차까지 인수하면 미래 그룹을 올해 안에 넘어설 거라는 제 말도 허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 말하자, 이종석 의원이 진심으로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혜성이냐, 미래냐 두 기업을 두고 머릿속에서 치열한 고민을 하는 거 같았다.
그러다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제가 보기에도 미래 그룹보다는 혜성 그룹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는 합니다. 혜성이 기화 자동차까지 인수한다면 미래 그룹을 넘어서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말입니다.”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이한성 회장님은 차기 대통령으로 김태중 국무총리를 밀어주고 있지 않습니까?”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하긴, 나와 김태중 국무총리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건 정해진 일이 아닙니다.”
“호오, 정말입니까?”
“사적인 관계가 어떻든, 국가와 국민에 더 이익이 가는 쪽을 지지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리 말하자 이종석 의원이 반색하였다.
그로서도 혜성 그룹의 지지는 탐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영산 대통령이 어떻게 대선에서 이겼는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것이 이종석 의원이었으니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한성 회장님과 진즉부터 친하게 지낼 걸 그랬습니다.”
“지금부터 친하게 지내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기분 좋게 웃던 이종석 의원은 이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지켜보겠습니다.”
“지켜보신다는 말씀은?”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신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아니면 설마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는 데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이종석 의원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행입니다. 이한성 회장님께서 아까 저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셔서 설마 저는 기화 자동차 인수를 도와달라는 줄 알았지 뭡니까.”
“기화 자동차는 혜성 그룹의 힘만으로도 인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종석 의원님께서 미래 그룹의 편만 안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에 아까 제가 말하려던 부탁입니다.”
“한마디로 방해만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군요.”
턱 끝을 쓰다듬던 그는 이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좋습니다. 저는 개입하지 않을 테니, 기화 자동차를 인수해 보십시오. 인수만 성공한다면 저와 이한성 회장님은 한편이 되는 겁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이종석 의원에게서 원하는 답변을 들었다.
‘이종석 의원이 개입하지만 않는다면, 여당은 문제 될 게 없다.’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는데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이 여당이었다.
여당의 여론이 넘어가면 정부도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제동을 걸 수밖에 없을 터.
자칫, 기화 자동차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종석 의원이 내 뜻대로 움직이기로 한 이상, 더는 여당의 여론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여당에서 이종석 의원이 가진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종석 의원도 참으로 오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군. 마치 나를 시험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굴다니 말이야.’
이종석 의원은 미래 그룹이냐, 혜성 그룹이냐는, 선택지에서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말은 했지만,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유보였다.
즉, 혜성 그룹에서 기화 자동차 인수에 실패한다면, 다시 미래 그룹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나도 이종석 의원과 끝까지 갈 생각이 없으니까.’
이종석 의원에게는 김태중 국무총리를 배신하기라도 할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나와의 관계도 우호적이고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김태중 국무총리를 배신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조금 전에 그렇게 말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이종석 의원을 회유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대선까지 4년 가까이 남아 있다. 그 안에 혜성 그룹을 성장시켜 미래 그룹조차 압도하는 기업이 된다면 이종석 의원도 내게 뭐라 할 수는 없을 거야.’
4년, 아니 이제는 3년 10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하였다.
올해 재계 1위를 찍고, 92년 안에는 대통령조차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대기업이 되고 마리라.
‘그전까지 최대한 이용해 주마.’
* * *
-합법적인 자금이라면, 정부 차원에서 인수를 막을 일은 없을 겁니다.
고영태 비서실장의 말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대통령의 허락까지 떨어졌으니, 더는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는 것에 시간을 끌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부터 바로 기화 자동차 인수 작업을 시작하리라.
“자금의 출처는 깨끗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단하십니다. 기화 자동차를 인수하려면 한두 푼 필요한 게 아닐 텐데.
“운이 좋았습니다.”
-일본에서 부동산 투자를 하여 큰돈을 버셨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 소문이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입니다.
“예, 모든 소문이 그렇듯, 과장된 것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혹시 기화 자동차 말고도 다른 기업을 더 인수하실 겁니까?
“아닙니다. 기화 자동차가 마지막입니다.”
-그렇군요. 이걸 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탄하는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언론을 움직여야겠군.’
여당과 정부를 설득하는 것은 끝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언론이었다.
물론 모든 언론을 일일이 압박하거나, 회유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기화 자동차를 언론의 먹잇감으로 줘서 기화 자동차 인수를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을 할 생각이었다.
‘기화 자동차의 적자와 부채, 경영진의 비리 등을 폭로한다면, 내가 기화 자동차 인수를 진행해도 반대하는 여론이 적을 수밖에 없을 거야.’
언론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준다면 더는 방해 될 게 없었다.
미래 그룹?
뒤늦게 인수전에 참여해봤자 얻을 거라고는 지분 몇 %밖에 없으리라.